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515)
제515화
하늘과 땅이 침묵한다.
인간의 정점에 선 초월자들의 기파에 붉게 젖은 달빛마저 어그러지는 듯 보였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겨루게 된 두 명의 검사는 눈을 마주하며 각자가 쌓아 올린 의념을 풀어냈다.
글렌 지그하르트에게서 피어나는 붉은 광휘는 현재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갖췄다. 그 어떤 외압에서도 꺾이지 않겠다는 거목의 형상으로 뇌전이 그려졌다.
반면 어둠이 일렁이는 성검련주의 의지는 단순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욕망. 피와 싸움을 즐기고, 더 고차원의 검술을 얻겠다는 탐욕으로 일렁였다.
두 초월자의 발밑에서부터 솟구친 의념의 파도가 달빛의 중심에서 맞부딪치자, 대기가 출렁이며 막대한 파동이 솟구쳤다.
피아아아앙!
그게 시작의 신호인 듯 성검련주가 움직였다. 제자리에서 흑검을 그어 내리는데, 공간을 뜯어내는 듯한 매서운 참격이 뻗어나갔다.
예리하면서도, 빠르고, 강맹하며, 가벼웠다. 찰나의 순간에 만검의 묘리를 담아낸 초상승의 검술이었다.
글렌 역시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진천검을 중단에 세운 채 쇄도해오는 묵빛의 검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파아아앙!
성검련주의 쏘아낸 참격이 진천검 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성검련주의 검술과는 반대로 굳건하면서, 느리고, 유연하며 묵직했다. 검술 묘리를 반대로 운용한 절묘한 한 수였다.
초월자들의 검이 한 차례 부딪쳤건만 얇은 얼음 호수에는 자그마한 충격도 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오러 운용이 하늘에 닿았다는 뜻이었다.
치이이잉!
성검련주가 두 번째 검을 쳐왔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짜인 육체와 함께다.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듯 밑에서부터 흑검을 긁어 올렸다.
단순한 올려 베기에 수많은 무학의 묘리가 스며들며 만검의 진의를 드러낸다. 마지막에 덧씌워진 패기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빠지지직!
첫 검격처럼 가볍게 막을 수 없는지 글렌이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진천검을 안쪽으로 당겼다.
검극에서 타오른 뇌기가 칼날 전체로 번지며 적색 휘광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글렌은 검의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이 없다는 듯 오직 힘으로 성검련주의 검격을 찍어 눌렀다.
“재미없게 굴지 말라고.”
성검련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어깨를 휘돌렸다. 글렌의 검격에 담긴 뇌기를 허공으로 풀어버리면서 상단에서부터 검을 찔러왔다.
이번에는 위력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칼날 위를 시꺼먼 어둠의 불꽃이 휘감고 있었다.
글렌의 기운은 여전히 허허로웠다. 알현실 옥좌에서 세상을 굽어볼 때처럼 냉랭한 눈빛으로 진천검의 뇌기를 일으켰다. 검극에서 번져나간 붉은 뇌전이 성검련주의 검격을 집어삼켰다.
쿠와아아아아앙!
밤하늘을 뭉개는 듯한 거대한 폭발이 터지며, 사위로 오러의 폭풍이 몰아쳤다.
다만 글렌과 성검련주의 옷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육체 내부와 외부의 오러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해.”
성검련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의 의지를 따라 자연스레 떠오르는 흑검이 어둑한 흑화로 스스로의 몸을 태웠다.
“준비운동은 충분히 했으니, 제대로 시작해보도록 하지.”
“…….”
글렌은 대답하지 않고, 진천검을 세웠다. 처음과 같은 자세였지만, 그의 적안에서는 오싹할 정도의 살의가 피어났다.
두 초월자가 다시 움직이려 할 때 하늘 위에서 거대한 의념이 파도쳤다. 드래곤 로드. 마왕을 쫓던 그가 허공에서 전투의 중지를 외쳤다.
[마왕 때문에 어지러운 상황에서 당신들이 부딪친다면 대륙의 균형이 어그러질 것이오!]“너희들의 목을 먼저 치기 전에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성검련주는 드래곤 로드의 말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흑검의 칼날이 수백 개로 번지며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흑검들은 모두 다른 묘리와 검술을 펼치며 글렌의 심장과 목을 향해 쇄도했다.
흑야마검의 절기 중 하나인 불혼만리였다.
수백 개의 칼날은 모두 거짓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성검련주의 의념을 담아낸 초상승의 검격이었다.
빠지지지직!
글렌이 진천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하늘을 찌르는 칼날 위로 붉은 뇌기가 폭발하듯 일어섰다.
창궁검 삼초.
홍연천라.
검극에 맺힌 뇌기가 그물처럼 번지며 천지를 뒤덮었다.
글렌이 라온에게 보여주었듯 그의 창궁검은 어두우면서 웅대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힘이 차올라 있었다.
쿠와아아아앙!
세상을 밝히는 월광처럼 뇌기를 풀어내는 홍연천라와 검으로 천지를 뒤덮은 불혼만리가 맞부딪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뇌기의 파동이 검날을 지우기도 했고, 예리한 칼날이 전광의 그물을 뜯어내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오러의 파동이 끝도 없이 이어지며 얼음 호수의 중심에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돋아났다.
파아아아앙!
갈라진 얼음 위로 거대한 해일이 솟구친다. 파도와 파도가 엉겨 붙는 폭발의 중심에서 글렌과 성검련주가 서로에게 검격을 쏟아냈다. 뇌신과 흑야검신이라는 이름값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신위였다.
“새로운 검술인가? 더 보고 싶군!”
성검련주는 조금 더 보여달라고 말하며 흑검을 쏘아냈다.
“말했지. 시간 끌 생각 없다고.”
글렌이 호수 위에 진천검의 검극을 적셨다. 한 폭의 그림처럼 유려한 기수식과 함께 아이가 조약돌을 던진 듯한 작은 파동이 번진다.
고요했던 검파가 이어지고, 뻗어나가며 공간을 찢어발기는 수검의 칼날이 되었다.
캬아아아앙!
물길로 만들어진 칼날과 어검이 부딪치며 치솟은 격렬한 힘의 여파가 천공에 푸른 구멍을 뚫었다.
저벅.
글렌이 허공에서 태화보를 밟았다. 의념을 담은 발걸음은 공간을 초월하여 그의 육체를 이동시켰다.
천검세 광결.
빛과 함께 이어지는 뇌기의 칼날이 엄숙한 선을 그렸다. 적을 침묵하게 만드는 초월의 검격이 성검련주의 목을 그었다.
“결국 천검세인가!”
성검련주가 입매를 비틀자, 공간이 녹아내리며 흑검이 드러난다. 어검술조차 초월한 듯한 속도의 검격이 천검세 광결 앞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엉!
흑검의 불꽃은 정말 그림자라도 되는 듯 진천검에 어린 뇌기를 흡수하여 그 위력을 현저하게 가라앉혔다.
이어지는 흑검의 연환세. 인간이 이룰 수 없는 투로로 뻗어나간 검격이 글렌의 목을 향해 뚝 떨어졌다.
글렌이 진천검을 쥐고 있던 손목을 꺾었다. 거꾸로 솟구치는 벼락처럼 진천검이 흑검을 쳐내고 성검련주의 어깨를 갈랐다.
피이익!
의념을 두른 오러의 방패가 조각나며 성검련주의 장포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성검련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부상조차 본인의 의도인 것처럼 짧은 순간에 반격을 떠올렸다.
흑검이 만화경처럼 번지며 패악적인 기운을 일으켰다. 피할 수 없다. 방어를 강제하는 일격이었다.
글렌은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 자리에서 진천검을 세웠다. 위를 향했던 진천검의 칼날이 간격을 초월하여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어어엉!
급소를 노리던 열 자루의 흑검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글렌은 흑검이 튕겨 나간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강인한 의지로 뇌기의 칼날을 제련하여 성검련주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피아아악!
성검련주의 허리에서 핏물이 차올랐다. 노리던 건 왼쪽 가슴이었지만, 그 사이에 몸을 틀어내고 반격까지 가해온다. 역시나 방심할 수 없는 자였다.
흑검이 악의로 타오르는 불길을 두른 채 쏘아져 온다. 힘으로 짓누르려는 듯한 검격이었다.
글렌이 오른발을 앞으로 뻗었다. 무게 중심을 낮춘 채로 진천검을 들어 올렸다. 달빛을 가를 듯 솟구친 칼날 위로 적색의 뇌전이 들끓었다.
쿠와아아아앙!
흑염과 적뇌가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며 허공에 괴이한 형상을 그려냈다.
글렌과 성검련주는 번져가는 오러의 잔염 속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쩌어어어엉!
진천검과 흑검이 톱니처럼 맞물리며 거센 스파크를 튀겨냈다.
치이이잉!
글렌이 발목과 손목을 동시에 비틀어 흑검의 중심을 쳐내며 성검련주의 목을 노렸다.
다만 성검련주는 그 투로를 읽은 듯 왼쪽 상반신을 뒤로 젖히며 흑검으로 두터운 검막을 세웠다.
캬아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거센 충격파가 터졌지만, 두 초월자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가며 서로의 숨통을 노리는 칼날을 그어내렷다.
글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강대한 오러가 아닌 검의 묘리를 극성으로 드러냈다.
글렌의 검이 성검련주의 가슴을 가르고, 성검련주의 흑검이 글렌의 어깨를 찔렀다. 초근접거리에서 벌어지는 검술의 향연. 숨을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검격이 끝없이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검술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듯한 경합. 글렌과 성검련주 모두 만검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다.
콰아아아아아앙!
글렌과 성검련주의 근접전이 길어지며 뇌기와 불꽃이 뱀처럼 똬리를 튼 채 번져가다가 결국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어마어마한 빛의 폭풍이 호수의 중심에서부터 퍼지며 물을 가두고 있던 땅거죽을 뒤집었다.
눈 덮인 대지를 적시는 물기 위로 글렌과 성검련주가 내려섰다.
“역시 북멸왕답군.”
성검련주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환희로 가득 찬 얼굴. 희열이라는 불꽃이 육신을 태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
반면 글렌의 눈빛은 메마른 듯 건조했다. 진천검을 아래로 내린 채 그저 이 싸움의 끝을 내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만….”
성검련주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흑검이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르며 진중한 불길을 일으켰다.
타오르고 또 타올라 재가 된 듯한 회색빛으로 명멸하며, 공간이 일그러뜨렸다.
“그게 전부라면 여기가 네 끝이 될 것이다.”
그의 잔잔한 읊조림과 함께 흑검이 나아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자그마한 파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 검에 어려 있는 초식은 검으로 하늘에 오른 성검련주의 의념과 무학을 집대성한 흑야마검의 절기 마의탈혼이었다.
마왕을 상대할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전력. 만검의 수련자가 쌓아 올린 초월의 검이 글렌의 심혼을 향해 쇄도했다.
우우우우웅!
글렌이 검을 들어 올린다. 검극에서 솟구친 뇌기의 구체가 얼어붙은 하늘을 가르고 적색 여명을 불러왔다.
“검계현신.”
하늘에 선 검사의 오연한 외침이 세계의 흐름을 뒤틀었다.
“천의무봉.”
진천검의 검은 칼날이 붉은 광휘와 함께 뇌기로 타오르는 광검으로 화했다. 그리 크지 않은 변화. 하지만 진짜는 검이 아니다.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지고의 검사가 한 자루의 검이 되는 것이 천의무봉의 진의였다.
빠르고, 강하고, 유연하고, 가볍고, 느리고, 무겁고, 곧바르고, 날카롭고, 환상을 담았고, 패기롭고, 굳건하다.
글렌 역시 지금까지 쌓아 올린 만검의 묘리를 연료처럼 태우며 뇌영검을 일으켰다.
천신이 걸친다는 신복처럼 자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는 완전무결함이 그의 검에 깃들었다.
“인뢰.”
글렌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뇌영검이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초승달을 그린 듯한 검격이 성검련주의 마의탈혼에 스며들어 있던 무리와 의념을 녹여버렸다.
“드디어 다시 보게 되는구나! 천의무봉!”
성검련주의 외침과 함께 그의 검이 변한다. 무리와 의념 속에 그의 오러가 스며들며 흑색의 광채를 폭발시켰다. 마의탈혼에서 이어지는 절세의 초식 자화선개가 이어졌다.
“지결.”
글렌이 뇌영검이 지평선을 따라 날개를 펼친다. 공간을 찢어발기려던 자화선개가 빛을 잃고 추락했다.
쿠우우우우.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검과 검 사이에 기괴한 비틀림이 벌어지며 호수의 반이 뜯겨나갔다.
“아직이다!”
성검련주의 외침과 함께 흑검이 나아간다. 그의 모든 무리가 뒤섞이며 밤보다 어두운 빛이 타오른다.
시공간이 멈춘 듯 온 세상에 흑검의 존재만이 유일했다. 흑야마검의 마지막 절기 광염패였다.
“아니, 끝이다.”
글렌의 눈빛은 그 절대의 검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천검.”
뇌영검을 두 손으로 잡고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그어 내려오는 무신의 칼날이 광염패를 갈랐다.
새하얗게 물드는 검격 속에서 흑검이 지워지려 할 때였다.
“아직이라고 했지.”
흑검의 뒤에서 성검련주가 나타났다. 앞으로 내뻗은 그의 손아귀에서 무색의 광채가 뻗어 나왔다.
쿠구구구구!
백혈교주의 혈기와는 격이 다르다. 어떠한 색도 입지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신령스러운 기운이 고고한 싹을 틔우고 있었다. 베지 못하는 게 없다는 무적의 검. 무형검의 현신이었다.
어검으로 펼치는 광염패보다 더 강맹한 무형검의 파동에 공간이 길쭉하게 갈라져 내렸다.
“그건….”
“널 위해 준비한 비의다.”
성검련주의 무형검은 그저 단순한 힘의 발현이 아니었다. 광염패를 방해하지 않고, 영리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쌍검의 묘리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소리조차 닿지 못하는 초월의 영역 속에서 각자의 궁극을 담은 검이 부딪쳤다.
쿠구구구구!
글렌이 마른 입술을 씹었다. 밀고 들어오는 힘이 강하다. 광염패 하나라면 천검이 갈라냈겠지만, 성검련주가 준비한 두 번째 칼날은 쉽게 베이지 않았다.
찌지지지직!
광염패와 무형검의 조화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천검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약해졌구나. 글렌 지그하르트.”
성검련주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전에 너는 이렇지 않았어.”
그는 두 검을 거세게 밀어붙이며 말을 이었다.
“북멸왕이 언제부터 수하와 손자 따위를 생각했더냐! 싸움을 끝내지도 않고 도망을 치는 건 네놈과 어울리지 않아!”
성검련주는 실망했다는 듯 이를 갈며 두 검을 사선으로 끌어 내렸다.
“복수와 군림만을 영혼에 담고 있던 때가 훨씬 나았단 말이다!”
그는 약해진 북멸왕 따위는 필요 없다며 붉은 눈동자를 부라렸다.
“네 과거를 더럽히지 말고, 여기서 죽어라!”
의지와 감정이 폭발한 성검련주의 검격이 더 무거워진다. 뇌영검의 칼날은 부러질 듯 떨리며, 천검이 나아가질 못했다.
“약해졌다라….”
글렌은 하늘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무게를 느끼며 입매를 비틀었다.
“네가 보기엔 그럴지도 모르겠군.”
성검련주의 말이 맞다. 처음 성검련주와 부딪칠 때는 수하들에 대한 복수와 가문을 키우겠다는 의지만 가득했으니까.
예전이라면 라온과 광풍대가 죽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검련주와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다만 그게 약해진 것이냐 묻는다면 아니라 고개를 저을 것이다.
힘의 약함과 강함 따위가 아니라, 의지가 변했을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복수와 군림을 포기하고, 실비아와 라온 그리고 가문을 수호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 마음을 평생 가져가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지키려고 했던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가르침을 내리고, 어색하지만 잡담을 나누는. 아비와 할아비로서 포기했던 역할을 하게 되며 새로운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약해진 게 아니다.
“여기까지로군. 나의 호적수여.”
성검련주가 끝을 고하며 두 검을 동시에 내리쳤다. 광염패와 무형검이 각자의 원을 그리며 궁극의 조화를 이룬다. 모든 것이 지워질 듯 검은 불꽃이 세계를 뒤덮었다.
“나는….”
글렌이 담담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 타버린 듯한 눈동자 위로 붉은 뇌전이 번쩍였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군림을 버렸던 틈새에서 라온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차오른다. 인간의 희노애락. 그저 분노만이 가득했던 균열이 행복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으로 채워지며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섰다.
“내 모든 것을 그 아이에게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
벼락의 칼날이 다시 한번 뻗어나간다. 인뢰, 지결, 천검. 그 무엇도 아니다.
하늘이 열렸던 개벽의 그 순간처럼.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검사가 평생을 쌓아 올린 무학이 단 하나의 검이 되어 상서로운 광휘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