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62
제662화
“어, 엄마의?”
마르타가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쥐고 있던 검이 툭 떨어져 땅에 박혔다.
“그래. 네 어머니. 아니, 백혈교주의 행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듯 눈썹을 살짝 내렸다.
“…어디죠?”
마르타가 아려 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입술을 씹었다.
“남쪽이다. 야수연맹과 가까이 있는 칼 왕국을 헤집어 놓았다고 하더구나.”
데니어가 이마를 매만지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기사단 세 개가 전멸했고, 국왕도 죽었다고 한다.”
“으으….”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악마 같은 년이….”
백혈교주가 지배하는 몸은 엄마의 것이다.
악착같이 살았기는 했어도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 엄마의 몸으로 수백 명을 학살했다니,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분노가 들끓었다.
“그년이 왜 칼 왕국을 습격한 거죠?”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왕국의 유물을 강탈하려고 한 것 같다. 국왕이 죽은 것을 보면 성공한 모양이야.”
데니어는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금 백혈교주는 어디에 있죠?”
“야수연맹주께서 칼 왕국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추적하셨지만 이미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그렇겠죠….”
아무리 야수연맹주라도 해도 먼 거리에 있는 백혈교주를 추적해서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괜찮으냐?”
데니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르타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백혈교주의 행적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서 조사는 했지만, 이게 맞는 판단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아뇨. 제게 꼭 필요한 일이에요. 고마워요. 아버지.”
마르타가 흔들리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입술을 꾹 씹었다.
‘그래. 꼭 알아야 해.’
백혈교주가 엄마의 몸으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죽였는지 알아야 훗날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엄마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데니어가 마르타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좋은 소식이요?”
“그래. 백혈교주가 네 어머니의 목걸이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다고 했었지?”
“맞아요. 그래서 알아볼 수 있었어요.”
백혈교주는 엄마와 비슷하지만, 훨씬 곱상하면서도 어린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주술사 발람의 답이 돌아왔다. 백혈교주가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이유는 네 어머니의 혼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데니어가 마르타가 쥐고 있는 목걸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운이 닿는다면 백혈교주의 혼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다만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
“그거면. 그거면 돼요.”
마르타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를 구할 수 있다니….’
백혈교주를 죽인다는 목적은 확고했지만, 엄마를 구할 방법에 대해서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소리를 듣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엄마를 구할 수 있죠?”
“개벽의 주술이 깃든 주물과 피붙이인 네가 중요하다고 하더구나. 그 물건은 이미 내가 부탁을 해 놓았다.”
데니어가 흔들리는 마르타의 눈을 보며 숨을 골랐다.
“발람은 미친 듯이 돈을 밝히는 만큼 일 처리는 확실해. 믿어도 될 거다.”
“아버지. 고마워요.”
마르타는 데니어의 눈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언제가 꼭 갚을게요.”
발람은 대륙에서 가장 돈을 밝히는 주술사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을 테니, 고맙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었다.
“아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데니어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떠는 마르타를 안아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마르타는 데니어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당신을 만난 건 제 가장 큰 기연이에요.’
데니어가 아니었다면 지그하르트에 오기는커녕 길거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얻고, 라온과 광풍대를 만날 수 있었기에 평생 갚아야 할 빚이었다.
“그런데 마르타?”
“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네가 바람을 썼던 것 같은데….”
데니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요.”
마르타가 데니어를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새로운 무학을 만들었거든요. 광풍류라는 이름인데….”
데니어에게 라온이 만든 광풍류와 광풍대 전체가 무아지경에 빠졌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광풍류라….”
데니어는 마르타가 남겨두었던 검흔을 살피며 광풍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혹시 보여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다만 남은 기운이 많지 않아서 오래는 힘들어요.”
마르타가 데니어에게서 한발 물러선 뒤 광풍류를 발동시켰다.
타이탄의 오러에 광풍류의 바람을 휘감은 채 데니어에게 배웠던 무격검을 펼쳤다.
쿠우우우웅!
육중한 무게를 담은 검격에 날카로움과 속도가 깃들며 한 차원 높은 위력을 만들어냈다.
“어때요?”
마르타는 무격검의 초식을 연달아 펼쳐내고서 턱을 치켜들었다.
“설마 초감각을 이용한 무학인가?”
데니어가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맞아요. 제 생각대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바람 자체가 의지를 가진 채 검에 깃들죠.”
“허어….”
데니어는 진심으로 놀란 듯 마른침을 삼켰다.
“이 무학을 정말 라온이 만들었다고?”
“그것도 일주일 만에 창안했죠. 저희도 다 놀랐다니까요. 오죽하면 그 도박쟁이가 도박장에 안 가고 수련을 했겠어요.”
마르타는 리메르조차 수련을 하게 만드는 무학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음….”
그녀는 손에서 사라진 바람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바람이 다 꺼졌네요. 들어가서 연공을 좀 해야겠어요.”
“그래. 가보거라.”
데니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타가 인사를 하고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데니어의 눈빛이 공허한 색으로 가라앉았다. 딸에게 보여주던 관심과 사랑, 놀람과 당황은 비를 맞은 수채화처럼 녹아내렸다.
* * *
라온은 글렌과의 불편한 식사를 마친 후 실비아의 병실로 향했다.
“라온!”
실비아는 환자복이 아니라, 무복을 입은 채 침상에서 일어났다.
“엄마. 왜 무복을….”
“오늘 마님 퇴원 날이에요.”
헬렌이 실비아가 입고 있던 환자복을 개며 웃었다.
“하나 있는 아들 녀석이 엄마가 퇴원하는지도 모르고,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고….”
실비아가 슬프다고 말하며 코를 훌쩍였다.
“애, 애들에게 무학을 전수하느라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라온이 실비아의 눈망울을 보며 뒷목을 매만졌다.
-쯧쯧!
라스가 길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천사를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니라!
녀석이 실비아에게 달라붙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엄마는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본왕이 끝까지 모실 것이니라!
라스는 진짜 자식이 여기에 있다며 실비아의 어깨를 잡았다.
“농담이야.”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네가 바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광풍류는 잘 전한 거야?”
“예. 운이 좋게도….”
라온은 광풍대 전체가 무아지경에 빠졌던 일을 말해주었다.
“저, 전부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실비아도 그런 일은 처음 들었다며 눈을 부릅떴다.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라온이 손을 저으며 실비아의 옆에 앉았다.
“애들이 무아에 빠졌다고 하니, 몸이 뻐근해지네.”
실비아는 당장 퇴원해서 수련하고 싶다며 어깨를 돌렸다.
“네. 수련도 하시고 휘광류를 가르치셔야죠.”
“음….”
그 말에 헬렌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감았다.
“도련님. 정말 저희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응. 무학 입문이 늦다고 해도 쉽게 배울 수 있게 만들었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라온은 실비아만 믿고 가면 될 거라며 웃었다.
“후우, 이 나이에 무학을 배우게 될 줄은 몰랐네요. 기대되면서도 떨려요.”
손을 떠는 헬렌을 보니, 글렌과의 일이 떠올랐다.
“아, 오늘 특이한 일이 하나 더 있었어요.”
“특이한 일? 광풍대 전원이 무아에 빠진 것보다 특이한 게 있어?”
“네. 가주님께서….”
병실에 오기 전에 있었던 글렌과의 일을 말해주었다.
“허억….”
헬렌이 먼저 반응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가, 가주님과 식사라니! 마님! 이건 가주님이 더 다가가고 싶다는 뜻 아닐까요?”
“음, 글쎄….”
실비아는 예상과 달리 놀라지 않은 채 연한 웃음을 그렸다.
“라온.”
“네?”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가주님을 살갑게 대해주렴.”
“사, 살갑게요?”
“응. 살갑게.”
그녀는 부탁한다고 말하며 어깨를 잡았다.
“그건 불가능….”
힘들다고 말하려고 할 때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를 집필한다며 요난 가문으로 떠나 있던 엔시아와 시얀이었다.
“어머님!”
“괘, 괜찮으세요?”
두 사람은 실비아와 헬렌에게 달려가 두 사람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아. 다 나았어.”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죄송해요! 저희가 밀실에 있다가 나와서 소식이 너무 늦었어요!”
“미, 미안해요.”
엔시아는 비연회의 친구가 정보를 보내준 것도 몰랐다며 울상을 지었다. 시얀 역시 미안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오히려 너희가 떠나 있어서 다행이었어.”
실비아는 너희라도 고생하지 않아서 좋았다며 웃었다.
“어머님!”
“시, 실비아 님.”
엔시아가 실비아에게 달려들었고, 시얀은 긴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였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래. 없어서 다행이었지.’
엔시아는 요난 가문을 물려받을 대장인이고, 시얀은 세이피아의 하이엘프이자 정령왕의 계약자다.
킬루안이 저 둘을 건드렸다간 정말 피곤해졌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난 안 보이나?
평소라면 실비아보다 나를 먼저 찾아서 존잘을 외쳤을 텐데, 얼마나 미안했는지 이쪽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분명 원하던 일이었는데, 조금 씁쓸해졌다.
-찌질한 놈.
라스가 그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책은 다 썼니?”
“네! 곧 대륙 전체로 출판될 거예요!”
“보여줄 수 있어?”
“물론이죠!”
엔시아가 표지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책을 꺼내서 실비아에게 넘겨주었다.
중앙에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 2권이라 적혀 있었고, 커버는 짙은 녹색이었다. 책을 보았을 뿐인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엔시아와 시얀에게 다가갔다.
“어? 라온 님! 언제부터 계셨어요?”
“헉!”
엔시아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고, 시얀은 그녀의 뒤에 숨었다.
“오늘도 존잘이시네요! 살짝 까진 이마 너무 좋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며 웃었다.
“저 다 들었어요! 해검지!”
엔시아가 입맛을 다셨다.
“다음 권은 해검지까지 적으려구요! 전기에 쓰기 딱이야! 진짜 전설이잖아!”
“응. 응.”
시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아, 책을 달라고 하셨죠? 당연히 드려야죠.”
엔시아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 2권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이것도 빳빳한 새 책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을 펼쳤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호통을 치자, 광룡 카이바르가 겁에 질려 역린을 부르르 떨면서 바다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태양의 숨결을 담은 신검을 뽑아내자, 바다가 반으로 갈라지고, 해저에 숨어 있던 광룡 카이바르의 몸체가 드러났다.] [광룡 카이바르는 패배를 직감하고, 지금까지 모았던 재물을 모조리 바칠 테니, 제발 용서해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광룡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달빛을 휘감은 마검을 들어 단숨에 광룡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순간 신이 축복을 내리듯 카이바르가 숨겨둔 보물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라온은 광룡 편을 읽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역린을 떨면서 숨고, 바다가 반으로 갈라지고, 드래곤이 무릎을 꿇고, 보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
무엇 하나 정상이 없었다.
‘시얀이 함께 갔는데 왜 더 심해진 거야!’
* * *
산과 강이 맞닿아 햇살이 곱게 이지러지는 지대.
부왕 로만이 크고 작은 돌로 가득한 자갈밭에 도끼 자루를 박아 넣었다.
그는 동전처럼 둥근 자갈을 들어 붉은 도끼날을 쓸어내렸다. 자갈은 날을 두 번 갈기도 전에 네 조각으로 쪼개졌다.
로만은 새로운 자갈을 들어 다시 도끼의 날을 갈았다. 이번에는 다섯 번을 훑어내리고 나서야 자갈이 먼지가 되었다.
그는 자갈로 도끼날을 가는 일이 중요한 임무라도 되는 듯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가라앉고, 자갈이 날을 스칠 때 터지는 불똥이 어둠을 밝힐 때가 되어서도 로만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로만은 천이 넘는 자갈을 모래로 만든 후에야 손을 멈췄다. 그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턱짓을 했다.
“이제 나오시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산의 그림자 속에서 회백색 머리칼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몸은 바위를 채워 넣은 것처럼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정말 드러내는 건 벼락과도 같은 강맹한 기세다. 정기신이 합일된 거대한 파동이 구름처럼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부맹주.”
로만은 노인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고요하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하여 찾아왔네.”
부맹주라 불린 노인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안 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다만 생사결이 이리도 기대되는 건 정말 오랜만이오.”
로만은 그저 즐길 뿐이라면서 차분히 손목을 돌렸다.
“그 어린놈이 도검존의 무학을 얻었다고 하던데?”
“나도 들었소.”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 어린놈과 생사결을 치르는데 어찌 상관이 없다는 거지?”
“중요한 건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
로만은 평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자갈을 손에 잡았다.
“그럼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물론이오.”
그는 왕이라는 이명을 가진 무인답게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스스로의 승리를 말했다.
“자신감은 좋군. 그래. 그 자신감대로 이겨야 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오?”
“자네는 남북맹의 세 번째 창이네. 이제 막 약관을 지난 지그하르트의 애송이에게 진다면 개망신이지 않겠나.”
부맹주의 입술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리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부맹주. 당신 설마….”
“나는 멍청한 원로원주와 다르네. 원한 따위로는 움직이지 않아. 그저 맹을 위할 뿐이네.”
그는 기대하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나와 라온 지그하르트의 생사결이오. 혹여나 내가 진다고 해도 절대 움직이지 마시오!”
로만이 경고를 하듯 부맹주에게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자네가 이기면 되지 않나.”
부맹주는 생사결에만 집중하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젓고서 등을 돌렸다.
“그만 가지.”
그 말에 우측 나무 뒤편에서 적색 머리칼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청년의 기파는 부맹주와 달리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듯 안개비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기괴할 정도로 짙은 광채를 두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따스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흘려내는 빛이었다.
“베오른….”
베오른이라 불린 청년은 꺼져가는 불씨처럼 잔잔한 눈동자로 고개를 숙인 후 부맹주의 뒤를 따라갔다.
로만은 베오른의 등을 보며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부맹주도 그렇지만 저놈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베오른이 렉터를 망가뜨렸기 때문이 아니다. 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같으면서 다르군.’
라온과 베오른은 둘 다 무지막지한 재능과 피보다 진한 붉은 눈을 가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완전히 달랐다.
라온의 열기를 담은 눈을 보게 되면 저절로 그에게 기대와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베오른은 그 정반대다. 놈의 고요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오싹함과 거북함이 느껴졌다.
“후우.”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짧게 호흡을 내뱉었다.
다시 자갈을 주워서 도끼날을 갈았다. 집중력이 다했는지 자갈은 처음처럼 두 번 만에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로만은 혀를 차고서 새로운 자갈을 쥐었다. 도끼의 날이 갈리는 소리는 잔잔히 흐르는 강물과 함께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라온은 그림자를 얹어 놓은 듯한 고급스러운 원탁 앞에 앉은 채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괜찮은 임무가 없네.’
대주 회의에서 광풍대에게 실전을 경험시킬 임무를 고르려고 했지만,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정찰, 조사, 수색….’
최근에 굵직한 사건 몇 개가 발생했지만, 대부분 남쪽과 중앙이라 지그하르트가 신경 쓸 일은 많지 않았다.
‘다른 거 없나?’
산적 토벌이라도 좋으니,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임무가 나오길 빌며 채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 임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채드가 서류를 펼치며 이쪽으로 짧게 눈길을 주었다.
“디바른 산 주변에 다양한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에틴까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꽤 강한 왕이 태어난 듯합니다.”
“왕….”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부족 단위로 움직인다.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부족이 다르다면 치열한 영역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부족, 종족에 상관없이 하나 되어 움직일 때가 있다. 왕. 모든 종족을 아우를 수 있는 왕이 태어났을 때다.
‘이거다.’
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강력한 에틴까지 있다면 채드의 말대로 강한 왕이 태어난 것 같았다.
“디바른 산의 몬스터 토벌 임무를 맡으실 분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지금까지 중 가장 굵직한 임무였기에 임무를 배정받지 않은 간부들이 모두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 역시 고민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광풍대주는 곧 생사결을 치러야 하는데, 임무를 할 시간이 있나?”
“그러게. 개인 수련을 하는 게 나을 텐데?”
직계 간부들이 손을 내리라는 듯 은근히 시선을 보내왔다.
예전처럼 무력으로 압도할 자신이 없으니, 입으로만 신경을 건드려왔다. 아리스가 없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도록.”
라온은 직계 간부들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으음….”
“저, 저….”
직계 간부들은 라온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다만 견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바로 진무전주 발데르에게 다가갔다.
“전주님이 직접 나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전주님이 나서신다면 저놈도 손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나온 임무 중에서는 이게 가장 나을 겁니다.”
직계 간부들은 카룬 대신 발데르에게 붙으며 힘을 써달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흠….”
발데르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전주가 거수하자, 다른 이들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역시! 발데르 님이십니다!”
“전주님의 용덕에 모두가 감격할 겁니다!”
직계 간부들은 히죽 웃으며 라온을 비웃었다.
라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임무 배정은 지위와 힘이 결정하기에 발데르가 움직인 이상 답이 없었다.
혀를 차고서 손을 내리려고 할 때 발데르가 들고 있던 손으로 이쪽을 가리켰다.
“다들 빠진다면 이 임무는 광풍대주에게 주도록 하지.”
발데르는 씩 웃으며 한쪽 눈을 깜박였다.
“어…?”
라온은 발데르의 윙크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 덩어리는 또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