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66
제666화
라온이 마기가 느껴졌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많은 사람과 마차가 왕래하는 중앙 대로가 보였다.
‘사라졌어.’
다만 눈동자를 움직이는 그 짧은 순간에 마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투욱!
왼발로 새하얀 땅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마기가 움직였던 중앙 대로로 이동하여 기감을 펼쳤다.
‘어디지?’
광풍류의 바람을 탄 기감이 사위로 뻗어나갔지만, 어디에서도 마기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눈으로도 마기를 흘렸던 존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뭐지?”
“저 사람 누구야?”
“지그하르트?”
“조금 전에 왕자님이랑 같이 있던데….”
오히려 땅에서 솟구치듯이 나타난 자신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대, 대주님. 무슨 일입니까.”
버렌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와 검병에 손을 얹었다.
“적이라도 나타난 겁니까?”
“적? 여기에 적이 어디 있어.”
마르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눈매를 찌푸렸다.
“적이 아니야.”
루난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주는 빨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거야.”
그녀는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거 아니거든.”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세 조장의 눈빛을 살폈다. 모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혹시나 해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지금 뭐 하냐는 듯 멍하니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부대주님도 알아차리지 못했군.’
리메르는 엘프라는 종족 특성상 같은 경지의 무인보다 감각이 뛰어나다. 그런 그도 마기를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내가 특이한 것 같았다.
아니, 다 떠나서 이곳은 신성 왕국이다. 사제와 신관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장소에 나만 마기를 느낀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라스 때문이겠지.
라스는 마계의 왕. 그런 놈과 거의 평생을 함께하고 있으니, 마기에 민감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외부에서 슈페르 신성 왕국을 보고 있을 때 라스가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했던 게 떠올랐다.
이 솜사탕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너 다 알고 있었지?’
-무얼 말이냐?
라스가 시치미를 떼듯이 고개를 가늘게 돌렸다.
‘이 왕국 안에 마기를 지닌 놈이 있다는 거.’
-본왕이 마기를 지배하는 마왕인데, 모를 수가 없지.
녀석은 쉽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본왕이 왜 말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라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네놈이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본왕은 마계의 왕이자, 분노의 군주이니라. 아무리 본왕의 권속이 아니라고 해도 같은 마족을 파는 짓은 하지 않는다.
녀석은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라며 입매를 비틀었다.
‘음….’
라스의 말이 맞다. 창염마군의 일과는 결이 달랐다. 라스는 마계의 왕. 마족을 파는 짓을 한다는 게 웃긴 일이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으로 협박해볼까 생각해봤지만, 한동안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주겠다고 약속했기에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 떠나서 음식으로 몰아붙이는 건 스스로를 너무 추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어디지?’
현재 마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단체는 두 곳이다.
첫 번째는 마계와 선이 닿아 있는 흑탑이고, 두 번째는 마족을 숭배하는 마족추영회다. 둘 중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조금 전에 느껴졌던 마기는 흑탑의 마인들보다 조금 더 순도가 높은 것 같았다.
-흠, 그래도 한 가지를 말해주자면….
라스도 너무 정이 없었다고 생각한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네놈이 들어올 때 보았듯이 이 왕국의 성벽에는 신성력이 휘돌고 있느니라. 허접한 마족은 들어오지 못하고, 강한 놈은 뚫을 수는 있겠지만 전쟁이 벌어졌겠지.
‘그게 어쨌다는 건데?’
-대가리가 텅 비었구나. 저 성벽에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건 마족이 억지로 침입한 게 아니라….
‘사람의 손을 잡았다?’
라온이 라스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먼저 답을 말했다.
-그렇느니라. 마족과 인간이 합의에 따라 계약을 했다는 뜻이니라.
라스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 같은 군주가 아니라면 마족은 억지로 계약을 들이밀 수 없느니라.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 즉, 네놈이 느꼈던 마기의 주인은 스스로 마족을 받아들였을 것이니라.
녀석은 괜히 인간과 마족의 계약을 망치지 말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저었다.
‘성벽 그리고 합의라….’
라스의 말을 되새기다 보니, 아주 작지만 답이 떠오를 것 같았다.
“라, 라온 님. 무언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호펜이 다가왔다. 걱정이 된 듯 그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라온이 호펜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가 사람을 풀어서….”
“아닙니다. 잘못 봤어요.”
다른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실례했습니다.”
라온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호펜은 손을 저으며 다시 신성 왕국의 안내를 시작했다.
‘라스.’
라온은 호펜의 등을 따라 중앙 대로를 오르며 라스에게 눈을 돌렸다.
‘네 말대로 마족과의 계약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라면 딱히 건드릴 생각 없어.’
나 자신도 마왕인 라스와 계약 관계나 마찬가지였기에 이중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다만 놈의 소원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을 거야.’
그게 마왕을 사육하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 사육? 지금 본왕에게 사육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냐? 그 말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저곳이 새로 생긴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입니다. 먼저 알현을 끝낸 후에 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스가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할 때 호펜이 우측에 있는 2층 건물을 가리켰다.
간판이 밝으면서도 화려했고, 내부는 깔끔했으며 아이스크림이 저장된 냉동고가 지그하르트에 있는 매장보다 3배는 큰 것 같았다.
-꺄후!
라스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듯 가는 비명을 터트렸다.
-이따 말고 지금 가면 안 되는 것이냐? 본왕이 모르는 맛이 가득하느니라!
‘…….’
라온은 아이스크림 매장의 창문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키우는 거 맞잖아….’
* * *
성스럽게 느껴지는 태양 빛이 조금도 스며들지 않는 꺼뭇한 공간.
색이 바랜 듯한 낡은 책상 앞에 앉은 남성이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기도를 올리는지 그의 입술은 단정한 형태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우우우웅.
남성이 기도를 끝내고, 합장하고 있던 손을 내릴 때 책상 아래에서 구정물 같은 그림자가 솟구쳐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낮에는 그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도를 마친 남성이 가늘게 미간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인지라….”
흑발의 청년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신관이 하는 인사였다.
“급한 일?”
“예. 4왕자가 돌아왔는데, 일행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일행이 문제인 모양이군.”
책상 앞의 남성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용살자라는 이명을 가진 괴물이, 광풍대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흑발이 청년이 라온의 이름을 말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유는?”
책상 앞에 앉은 남성은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 차오른 어둠이 거세게 요동쳤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가 디바른 산에서 4왕자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몬스터의 왕이 예상 이상으로 강했던 것 같습니다.”
청년은 호펜이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그런가.”
남자는 4왕자가 간신히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대에는 라온 지그하르트 만이 아니라, 광검 리메르도 있습니다. 조장들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죠. 대계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광풍대가 남아 있는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흑발의 청년은 걱정이 된다는 듯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대라….”
남자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 위에서 점차 섬찟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그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을 모았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대까지 제물로 삼겠다.”
“예?”
청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 하지만….”
“어차피 결계 안에서는 놈들도 제힘을 낼 수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광풍대의 소식이 끊어지면 지그하르트에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괜찮다.”
남성이 등을 돌렸다. 그는 어둑한 벽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 * *
라온은 호펜이 내어준 숙소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의 굳은살을 매만졌다.
‘역시 시험을 해보지 않는 이상 답은 나오지 않겠군.’
라스의 힌트 덕에 나름의 가닥은 잡았지만, 거기에 확신을 가지려면 단서가 필요했다.
-답이 나오기는 무엇이 나온다는 말이냐!
라스가 되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말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 설마 이제 와서 안 사주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녀석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면서 입맛을 다셨다.
‘내가 그렇게 치사한 인간은 아니거든.’
-그, 그럼 당장….
‘일단 이곳의 주인에게 인사부터 해야 한다니까.’
-본왕이 이 땅을 밟은 이상 이 땅의 주인은 본왕이니라!
라스는 자기한테 인사하면 된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
라온은 말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은 이런 점이 너무 귀찮으니라! 왕에게 인사하고, 귀족에게 인사하고. 여기는 신성 왕국인가 뭔가니. 교황도 찾아가야 하지 않느냐!
‘그럴 필요 없어.’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슈페르는 제정일치야. 왕이 곧 대신관이거든.’
슈페르 왕국에는 교황이 없다. 국왕이 대신관의 역할을 겸해서 신께 기도를 올린다고 들었다.
-오, 그건 꽤 괜찮네.
라스는 인간 주제에 편의를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라온이 피식 웃고 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호펜이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알현 허가가 났습니다. 가시죠.”
“알겠습니다.”
라온이 흑룡포를 다시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광풍대는 이미 밖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신성 왕국의 국왕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타가 궁금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굉장히 인자한 분이라고 들었어.”
버렌은 국왕의 이름이 선행으로 알려졌다며 기대감에 찬 눈동자를 빛냈다.
“맞아. 인자해.”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 슈페르 국왕을 알아?”
“네가?”
광풍대 모두가 루난을 돌아보며 눈을 끔벅였다.
“모르는데.”
루난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인자하다고 한 건데?”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가 크니까.”
그녀는 당당하게 맹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어휴….”
“그럼 그렇지.”
광풍대는 괜히 놀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잖느냐! 저 모지리들이 감히 우리 아이스크림 소녀를 조롱하다니!
라스는 루난의 의견에 공감한다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라온이 광풍대 앞에 서서 미간을 구겼다.
“전하를 뵙게 되면 확실히 예의를 갖추도록.”
“걱정마…요.”
“저희가 누군데요!”
마르타와 크레인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너희 둘이 제일 걱정이야.’
라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호펜을 바라보았다.
“가시죠.”
“알겠습니다.”
호펜이 옅게 웃으면서 왕성으로 향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있는 첨탑 아래에 마름모꼴 형태의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외부에서도 단연 눈에 들어왔던 저 건물이 왕성이었다. 벽면이 밝은 회색이라 더욱 성스럽게 보였다.
미리 이야기를 해놓았기 때문인지 왕성 정문이 열려 있었고, 문을 지키는 성기사들도 조용히 고개를 숙여왔다.
라온은 성기사들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서 왕성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따스한 백색을 띠었고, 금박이 씌여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왕자님!”
푸른빛을 휘감은 카펫을 밝으며 알현실로 향할 때 금색 스카프를 두른 노신관이 호펜에게 다가왔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노신관은 신의 은총이라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피른 신관님!”
호펜이 방긋 웃으며 노신관에게 마주 인사했다.
“이분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이번 임무에서 만났던….”
그는 이제 익숙한 듯 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군요!”
피른 신관이 광풍대를 두 손을 모아서 합장을 했다.
“왕자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라온이 호펜을 돌아보며 눈을 끔벅였다.
“왕자님이라는 건….”
“아, 말씀드리지 않으셨던 겁니까?”
피른 신관이 호펜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이분이 저희 슈페르 왕국의 4왕자님이십니다.”
“4왕자?”
라온이 호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호, 호펜이 왕자였다고?”
“전혀 몰랐어….”
“아니. 뭔 왕자가 저렇게 소박해!”
“난 자수성가한 줄 알았어!”
광풍대도 호펜과 대화를 나눠봤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헛바람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속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희에게 신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서.”
호펜은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라온이 호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지.’
호펜은 바레네에서 만났을 때나, 산에서 만났을 때나 항상 같았다.
왕자 같은 언행은 조금도 없이 그저 성기사로서만 살았다. 누구보다도 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알현 허가도 바로 받은 거로군.’
미리 말하고 온 것도 아닌데, 바로 알현 허가가 난 것을 보면 호펜의 신분 덕분인 것 같았다.
“아,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잡아둔 모양이네요. 가시죠.”
피른 신관은 본인도 알현실에 초대를 받았다며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라온과 호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피른 신관의 뒤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제가 왕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씀드릴 게 있는데….”
호펜이 라온을 보며 눈동자를 살짝 내렸다.
“바레네에서 만났던 바이튼 경은 제 형님이십니다.”
“아….”
라온이 호펜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왕자인 것도, 호펜과 형제인 것도 아예 몰랐다. 나도 나름 가문의 위광을 빌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한 수 위였다.
‘신기한 집안이네.’
헛바람을 흘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알현실 앞에 서 있었다.
피른 신관이 알현실 앞에서 고개를 숙이자, 성시가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따스한 빛과 함께 백색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고오오오오오!
창문에 새겨진 고아한 신의 형상들이 햇살을 담은 채 쏟아져 내린다. 당장 신이 강림해도 이상하지 않을 신성한 공간이었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기둥 앞에는 고위 신관들이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신기하게도 반 정도는 젊은 남녀였는데, 특색 있는 외모만큼이나, 기질들이 제각각이었다.
다만 하나같이 거대한 신성력을 두르고 있었다. 꼭 바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도 가보지요.”
피른 신관은 뒤를 돌아 고개를 숙이고서 가장 안쪽의 자리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그의 반대편에는 은빛 갑주를 입은 노기사가 서 있었는데, 이들과 달리 강대하면서도 고고한 오러의 향기 진하게 풍겨왔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기사였다.
그 바로 옆에는 금발의 젊은 기사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허리를 곧게 세웠다. 호펜보다도 더 거대한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였다.
라온은 마지막으로 중앙의 아주 낮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호펜처럼 연한 청발의 중년인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순망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슈페르 신성 왕국의 국왕 바우른인 것 같았다.
저벅.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알현실에 깔린 푸른 카펫을 밟았다. 영혼의 격이 솟구치며 고요히 내뻗는 걸음에 패도적인 위엄이 실렸다.
슈페르 국왕과 근위기사, 최고 신관의 눈동자가 모조리 쏠린 순간 분노를 개방했다. 마기와는 결이 다른 마왕의 감정이 신성함으로 가득 찬 알현실을 비틀었다.
투우웅!
그 순간 분노에 반응하듯이 알현실 내부에서 아주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마기와는 다른 마족의 본능적인 파동이었다.
-네놈 무슨 짓을….
라스가 뭐 하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예상대로네.’
라온은 알현실의 중앙에 선 채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마족과 계약한 인간은 이 안에 있어.’
왕과 고위 신관, 근위기사 그리고 성기사단장으로 가득 찬 이 방에 마족과 계약한 변질자가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