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68
제668화
빛줄기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밀실.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남성이 벽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대의 움직임이 이상하더군.”
그가 책상 아래를 굽어보며 턱을 매만졌다.
“꼭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리고 있어.”
“저, 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놈을 보았을 때 의도치 않게 마기를 흘려서….”
무릎을 꿇고 있던 흑발의 청년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정말 미세한 양이었습니다. 신관이나 성물도 반응하지 못할 수준이었는데 어떻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가끔 특별한 감각을 지닌 자들이 태어나는 법이지.”
남성이 입매를 가늘게 말아 올렸다.
“그럼 라온 지그하르트가 성회에 참여한 건 너를 찾기 위해서였나?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저, 정말 놈들이 마기를 느낀 거라면 지금이라도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더 가까이에 두는 게 맞다. 대놓고 찾지 못한다는 건 확신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는 적은 동료보다도 더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며 웃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한때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얻었을 정도로 의협을 중요시하지. 그런 이들은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해. 아마 널 찾는 데에 매몰되어 무엇도 보지 못할 것이다.”
남성은 라온과 광풍대의 행동이 보인다며 손가락을 가볍게 저었다.
“위는 내가 알아서 조율할 테니, 너는 네가 할 일에 집중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흑발의 청년이 고개를 숙인 후 구정물 같은 그림자가 되어 흩어졌다.
타다닥.
남성은 다시 등을 돌려서 벽에서 타오르는 흑화에 눈길을 주었다.
검은 불꽃이 점점 짙어지며 벽에 새겨진 글귀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라….”
그는 입꼬리를 축 내린 채 검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대체 어디에?”
* * *
“피른 신관님은 참된 사람 그 자체셨어.”
버렌이 뒷목을 매만지며 헛바람을 흘렸다.
“하루종일 봉사만 하시더군. 고위 신관이 아니라, 이제 막 성직자가 된 소년을 보는 기분이야.”
그는 저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며 고개를 저었다.
“키니어는 다른 의미로 성기사던데?”
마르타가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새끼 기도도, 수련도 안 하고 여자만 꼬시러 다녀! 내 눈앞에서 차여놓고, 바로 나한테 들이댈 때는 그 주둥아리에 검을 날릴 뻔했다고!”
그녀는 양아치 그 자체라며 이를 갈았다.
“으, 그때 말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도리안이 어깨를 축 내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루난. 다니에프 경은 어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루난을 불렀다.
“아.”
벽에 기댄 채 꾸벅이던 루난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왕을 따라다니고, 왕을 쫓아다니고, 왕한테만 붙어있어. 쉬는 시간에는 검을 휘둘러. 그리고….”
“그리고?”
“말이 없어.”
루난은 그렇게 말이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성녀는 어때요?”
라온이 벽에 등을 기댄 채 귀를 후비고 있는 리메르를 불렀다.
“머리카락도 안 보여. 어디 숨어서 애들 삥이라도 뜯나?”
리메르가 답답하다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부대주님. 일 안 하고 도박장 갔죠?”
“뻔하네.”
“어휴….”
버렌과 마르타, 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때와 장소는 가리거든?”
“언제부터?”
루난이 뼈를 때리듯 담백하게 답했다.
“으윽….”
리메르는 할 말이 없는 듯 가슴을 움켜쥔 채 입술을 씹었다.
“어쨌든 진짜 안 보여. 수녀원도 들어가서 뒤져봤다고!”
“변태 자식.”
마르타가 혐오스럽다는 듯 이를 갈았다.
“어휴,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네….”
리메르가 지친다는 듯 어깨를 축 내렸다.
“제가 따라다녔던 발트, 유손도 특이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크 괴튼도 고위 신관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는 어땠는데?”
버렌이 라온과 호펜을 향해 손짓을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라온이 호펜과 눈을 마주치며 짧게 혀를 찼다.
왕자이자 제5 성기사단장인 호펜의 신분을 이용하여 알현실에 있던 사람들이나, 고위 인사들을 모두 만나보았지만,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다.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인지 라스의 분노를 일으켜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그 쌍년인가?”
마르타는 성녀가 보이지 않는 게 의심스럽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성녀님은 하루이틀이 아니라, 몇 달씩 모습을 감추시는 경우도 흔합니다. 오히려 계속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이죠.”
호펜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다 허탕이네.”
버렌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정말 마기를 쓰는 놈이 정말 있기는 한 거야?”
마르타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 확실해.”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겠지만, 라스의 확인이 있었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라온이 창가에 스치는 노란 달빛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찾지 못했군.’
나와 광풍대가 직접 움직여서 알현실에 있던 모든 사람을 수색했지만, 마족과 계약을 한 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기를 드러낼 함정을 팠는데, 그게 함정인지조차 모르는 것을 보면 정말 마족과 계약한 인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성녀하고는 만나지 못했지.
리메르의 말대로 성녀는 그날 이후로 사라져서 자취를 감췄다.
싼티가 날 정도로 양아치스러운 행동을 해서 성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녀도 의심 선상에 놓아야 할 것 같았다.
특히 대놓고 성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한 건 그녀뿐이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지? 내일모레가 성회잖아.”
버렌이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수색 작업은 취소다.”
라온이 가볍게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이대로는 시간 낭비야.’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적은 우리가 찾고 있다는 것을 알 가능성이 높다.
신성력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을 보면 성회까지 놈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어쩌려고?”
“방법을 바꿔야지. 누가 마족을 부른다고 해도 싸울 수 있도록 대비를 해야 해. 조금의 희생이 있더라도 더 큰 걸 지키는 쪽으로.”
나는 영웅이 아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뺏기느니, 제대로 된 준비를 하는 게 훨씬 나았다.
“도리안. 성수 있지?”
“당연하죠. 필수품인데.”
도리안은 신성 왕국에서 성수가 필수품이라는 소리를 하며 방긋 웃었다.
“성수는 저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걸 사용하시면….”
“아뇨. 그건 못 쓸 겁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위 인사가 관계된 이상 이 나라에 있는 성수와 성물은 이미 오염되었다고 봐야 했다.
“지금부터….”
라온은 광풍대와 호펜에게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해주었다.
상대를 모르다 보니 계획이 복잡했지만, 모두는 인재답게 단번에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땅도 아닌데, 참 귀찮네.”
리메르가 호펜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번 일 잘 끝나면 보답은 확실하게 해주는 거다? 알지?”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호펜이 풀코스로 모시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기대할 게!”
리메르는 씩 웃고서 창문으로 나갔다. 문이 있는데, 왜 매번 저런 곳으로 나가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것도 줄 필요 없어요. 어차피 여기서 다 잃고 갈 테니까.”
버렌은 금화 한 닢도 줄 필요 없다고 말한 후 방을 나섰다.
“맞아. 그냥 무시해.”
“쿠우….”
마르타는 잠이 든 루난을 등에 업고 나가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마크 괴튼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떠났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호펜이 어색한 웃음을 그리고서 마크 괴튼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발걸음은 누구보다도 무거워 보였다.
‘야.’
라온은 방문을 닫고서 천장에 등을 데고 있는 라스에게 손짓했다.
-왜.
라스가 꼬리를 살랑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말할 생각 없어?’
-몇 번을 묻는 것이냐. 인간과 마족의 계약은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느니라. 그 조건을 건 게 본왕과 다른 잡것들인데, 그걸 어떻게 어기겠냐고!
녀석은 되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손을 세게 내리쳤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치고는 너도 좀 불안해 보이던데.’
-뭐, 뭐가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냐!
라스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어찌 되었든 본왕은 계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라! 절대!
‘그러냐.’
저 말은 계약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도와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우른 국왕, 피른 신관, 근위 기사단장 다니에프, 팔라딘 키니어, 성녀 올가 그리고 신관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음? 잠깐….’
5일 전에 호펜이 고위 인사들을 설명해주었던 때를 다시 떠올리자, 의심스러운 사람이 그려졌다.
호펜에게 들은 것과 최근의 상황을 떠올려볼 때 그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확답은 못 하겠지만, 경계를 올릴 정도는 충분했다.
쿵! 쿵! 쿵!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 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노크가 아니라, 발로 차는 듯한 소리였다.
라온이 미간을 찌푸린 채 방문을 열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왼쪽 귀 뒤로 넘긴 성녀 올가가 짝다리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지금 보니 그녀의 귀 뒤에도 기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성녀?”
지금까지 찾아도 안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성녀는 지랄. 시간 좀 내라.”
시간 좀 내달라도 아니고, 내라다.
더 웃긴 건 성녀는 그 말을 하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성격 한 번 끝내주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성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숙소 앞에 있는 느티나무에 멈춰서 등을 기댔다.
“왜 불렀지?”
탐색하는 눈빛을 감춘 채 고개를 까딱였다.
“왜 반말?”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하니까.”
“성격 더럽네.”
“너만 하겠어?”
“크흐흐.”
성녀는 기분이 좋다는 듯 오히려 웃었다. 역시나 특이한 인간이었다.
“담배 피워?”
“아니.”
고개를 젓자, 성녀가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너희 이상한 짓 하는 것 같은데.”
성녀가 연초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지그하르트로 돌아가.”
“무슨 이상한 짓?”
“못생긴 엘프를 보내서 나 찾는 거 말이야.”
그녀는 리메르를 말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난 얼굴을 많이 보거든. 너라면 모를까. 그런 얍실한 놈은 사양이야.”
성녀는 리메르가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넌 뭘 알고 있는데?”
그녀가 오히려 되물었다.
“뭘 찾으려고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건데?”
“…….”
라온이 성녀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손끝을 모았다.
“오, 죽이게?”
성녀가 본인의 목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어. 그저 감이니까.”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회색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케헥! 케헥!
허공에 떠 있던 라스가 콜록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계집을 죽여라! 이거 간접흡연이니라!
‘가만히 좀 있어 봐.’
라온은 라스를 멀리 쳐내고서 성녀를 바라보았다.
“감?”
“난 태어났을 때부터 감이 좋았거든. 위기도 읽고, 기회도 읽었지.”
성녀가 옅게 입맛을 다셨다.
“그 감이 말하네. 너희들 쓸데없는 짓 말고 떠나라고.”
“그 말은 슈페른에 위기가 닥친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녀가 손을 휘휘 저었다.
“감이 좋지 않다면 왜 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는 거지?”
“몇 번 해봤는데, 내 입에서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더 큰 위기가 되어서 찾아오더라고. 더럽게도 많이 죽었지.”
성녀는 개 같은 인생이라며 연초의 끝을 질겅 씹었다.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네가 날 관찰했듯 나도 너를 봤거든. 이상하게 너는 괜찮게 느껴졌어.”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연초를 길게 빨고서 웃었다.
“봐. 지금 너와 대화하고 있는데도 오싹함이 전혀 없어. 정말 널 살리라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네.”
성녀는 다 타버린 연초의 불을 끈 후 고개를 저었다.
“너 하나를 살리라는 계시라니. 더럽게 재수 없는 신이지? 아구창을 날리고 싶어.”
그녀는 연초 꽁지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서 이를 갈았다.
라온은 신을 모욕하는 성녀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 여자는 대체 뭐지?’
초월에 닿은 것도 아닌데, 천기를 읽는 듯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세한 내용이 없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천통이니라.
‘천통?’
-태어날 때부터 상단전이 열려서 하늘과 선이 이어져 있는 경우지. 파인애플 소녀보다 더 크게 열려 있느니라. 다만 본의가 아니기에 저 계집의 말대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아….’
라스의 말을 듣자, 성녀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경고야. 뒈지기 싫으면 괜한 지랄 말고, 집으로 돌아가.”
“이 곳이 위험하다면 나와 광풍대가 도움이 될 텐데?”
“그 위기가 언제 닥칠 줄 알고? 평생 있게?”
성녀는 때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답답이 왕이 말했잖아. 우리는 너희보다 약해도 끝까지 싸울 용기가 있다고.”
그녀가 자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런 말을 들었으면 타인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끝까지 싸울 수 밖에 없어.”
성녀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답답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바우른 국왕을 존경하는 것 같았다.
“알아들었으면 성회가 열리기 전에 지그하르트로 꺼져.”
성녀는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고서 등을 돌렸다.
“음….”
라온이 성녀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하지?’
성녀에게 사실을 밝힌다면 계획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녀의 의도일 수도 있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입술을 씹으며 고민하고 있을 때 라스가 성녀의 팔과 허벅지를 보며 손뼉을 쳤다.
-아, 그거였군!
‘뭐?’
-저 계집의 문신이 영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귀를 보니 알겠다. 전부 문신이 아니었느니라.
라스가 성녀의 귀에 새겨진 네모난 문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신이 아니라고?’
-그렇느니라. 저 기괴한 형태의 점은 문신이 아니라, 신성력의 반발이니라.
‘신성력의 반발은 뭔데?’
-신성력을 필요 이상으로 사용하게 되면 저런 형태로 피부가 녹아내린다. 마족도 같은 현상을 겪지.
녀석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광녀가 분명하다며 어깨를 떨었다.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듣고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 * *
성회의 날이 밝았다.
신이 축복하기 때문일까. 신을 축복하기 때문일까. 하늘에는 자그마한 구름 한 점 없었다.
신성 왕국 슈페르는 새벽안개가 가시자마자 성문을 걸어 잠그고, 왕국 전체를 신성력의 벽으로 휘감았다.
새하얀 성벽 위로 태양이 떠오르자, 왕국의 모든 시민이 집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물이나, 성수가 담긴 잔을 손에 든 채 거리에 무릎을 꿇었다.
라온은 첨탑의 정상에 서서 왕국 전체를 굽어보았다.
비눗방울처럼 둥그렇게 조형된 신성력의 하늘 아래에서 기도를 준비하는 무수한 신도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풍대주.”
피른 신관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확실히 저 모습은 장관이지요.”
팔라딘 키니어가 뒷짐은 진 채 두 손을 비볐다.
“매년 보는 건데, 장관은 지랄.”
성녀 올가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쪽을 매섭게 노려봤다.
라온이 성녀와 눈을 마주칠 때 뒤편에서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바우른 국왕과 근위 기사단장 다니에프 그리고 고위 신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라온이 바우른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광풍대주님이 남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바우른 국왕이 마주 인사를 하며 웃었다.
“다른 검사분들은 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는 홀로 있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이 불편한지 아래에 있겠다고 하더군요.”
“하긴 늙은이들이 많으니 그렇겠군요. 대주님도 지루하시면 언제라도 내려가셔도 됩니다.”
바우른은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해가 떠오르고 있으니, 바로 시작해야겠군요.”
국왕이 평온한 걸음으로 첨탑의 끝에 섰다. 그는 한 발만 더 나가도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곳에 앉은 채 들고 온 성수를 내려놓았다.
피른 신관이 그 옆으로 다가가서 국왕의 잔에 성수를 따라주었다.
찌이이이이이잉!
왕국 전체로 퍼지는 종이 울리자, 국왕은 잔을 가득 채운 성수를 허공을 향해 들어 올린 후 본인의 입에 담았다.
그 밑에 있던 국민들도 왕을 따라 물과 성수로 본인의 입술을 축였다.
바우른 국왕은 그 모습이 기껍다는 듯 웃은 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신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그분께서 지켜보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가 성경의 구절을 외우기 시작하자, 아래에 있는 국민들도 그 구절을 따라 읊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가장 높은 국왕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신관과 성기사, 국민으로 이어지며 왕국 전체를 휘감은 신성력의 벽이 더 두텁고 장대한 휘광을 토해냈다.
이 땅으로 신이 현현할 것 같은 신성함과 거룩함이 차올랐다.
라온은 손가락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의 신성력을 느끼며 눈동자를 돌렸다.
‘이 정도 신성력이 퍼지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의 신성력이 움직이고 있는데, 고통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족과 계약을 맺은 사람은 내 예상 이상으로 인내심이 무시무시한 자였다.
라온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곳에 있는 모두를 훑어내렸다.
하지만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이를 때까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지이이이이잉!
정오를 알리는 웅장한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모두가 눈을 떴다.
국왕은 두 번째 성수를 마시고, 다시 성경을 읊었다. 국민들도 가지고 온 물과 성수를 들이킨 후 기도를 계속했다.
그 이후로도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지이이이이잉!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세 번째 종이 울렸다.
슈페른의 국민 모두는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성수와 물로 입술을 적셨다.
라온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오늘이 아닌 건가?
성회의 기도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마기는커녕 작은 구름 하나 지지 않았다.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집중력이 풀어질 지경이었다.
‘내가 찾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정을 미룬 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주변이 고요했다.
기도를 외워야 할 바우른 국왕이 입을 다문 채 옅은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지 않습니까?”
바우른 국왕은 두 손을 모은 국민들을 보며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대주. 혹시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가 부드러운 눈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야기는 이곳 슈페른 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누구보다 저 말을 신봉했습니다. 큰 시련, 작은 시련도 제 살과 영혼을 채워주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지요.”
국왕이 본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나는?’
바우른 국왕은 본인을 칭할 때 항상 제가, 저는이라 표현했었다. 스스로를 나라 칭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안 되더군요.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건만, 신은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제가 시련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인간이기 때문이거나….”
국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 위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신이 개새끼이기 때문이겠지요.”
그 서늘한 음성이 첨탑 아래로 흘러내리자, 왕국을 휘감은 신성력의 벽 위로 새까만 어둠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