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69
제669화
“저,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 신을 모욕하시다니 이 무슨!”
“눈동자가 왜 검은빛으로….”
고위 신관들과 왕국의 간부들이 바우른 국왕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바우른 국왕은 눈을 부릅뜬 신관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라온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의 어깨 위로 새까만 마기가 스멀스멀 타올랐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확신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라온은 기괴하게 뒤틀린 바우른 국왕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호펜 경의 말을 듣고, 가장 의심스럽다고만 생각했죠.”
아버지의 변모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시울을 붉히는 호펜을 가리켰다.
“어떤 말이었습니까?”
바우른 국왕은 궁금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당신은 바이튼 경이 죽었을 때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위험한 임무에 막내아들을 보내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라온은 차분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거기다 당신은 막내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안도하는 것보다 제게 고맙다는 속이 빈 인사만을 반복했죠.”
바우른 국왕은 호펜을 따로 호출하여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조사가 허술했던 정보부에 징계를 내리지도 않았다.
세 명의 아들을 잃은 아비가 절대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건 아들보다 중요한 일이 있거나, 심적으로 큰 변화를 이뤘거나 혹은 둘 다겠죠.”
라온은 확신을 가진 채 말을 이었다.
“정확한 조사 없이 멀리 떨어진 디바른 산까지 병력을 보낸 것도 지그하르트가 이번 일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닙니까?”
“하….”
바우른 국왕이 본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확합니다. 완전히 제 속을 읽고 있군요.”
그는 하나 남은 아들에게 옅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에는 따스함과 냉혹함이 괴이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대계가 얼마 남지 않아서 조급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듯합니다. 아쉽군요. 당신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바우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이번 일의 주동자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아, 아버지. 정말 아버지가….”
호펜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니.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손을 떨었다.
“이 씨발!”
성녀 올가가 어금니가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이를 갈았다.
“안 믿었었는데! 끝까지 안 믿었는데! 대체 왜 이 지랄을 하는 건데!”
그녀는 표독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게 투명한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팔라딘 키니어가 건틀릿을 만지며 입술을 씹었다.
“왜 전하께서 범인인 것처럼 말하는 건데요!”
그는 바우른 국왕을 보며 악을 질렀다.
“두 분은 역시 절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바우른 국왕은 성녀와 키니어를 차례로 바라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우리의 왕국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곳이죠.”
그가 손가락을 들어 어둠이 조금씩 차오르는 왕국을 가리켰다.
“하지만 국왕이 된 이후로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이 거대한 왕국은 제 마음과 달리 누군가의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는 아주 약한 곳이라는 것을.”
“그게 무슨….”
“첫째는 두 번째 임무에서 흑탑의 마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씹어 먹혔다더군요. 둘째는 성력 봉사에 나갔다가 에덴의 철혈귀에게 사지가 찢겨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저는 따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바우른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솟아올랐다.
“신이 복수를 원하지 않으시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복수를 할 수가 없으니까! 오마 그 괴물들이 앞에서 이 왕국은 종이로 만든 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가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숨이 끊어진 듯한 검은빛이었다.
“기도했습니다. 복수를 외치지 않겠다. 화를 지우겠다. 대신 더는 제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말아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검게 물든 바우른 국왕의 입술에서 키득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관과 성기사 그리고 아무런 죄도 없는 국민들은 악인들의 칼날에 무수히 죽어 나갔습니다. 거기다 당신이 함께 있었던 바레네에서 셋째가 죽었죠. 그것도 백혈교주에게 피를 빨리면서. 그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얼마나 서글펐을지 저는 상상이 안 됩니다.”
“…….”
라온은 눈앞에서 바이튼의 죽음을 보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복수를. 똑같이 전신의 피를 뽑는 복수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죠. 신은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제게는 복수할 능력도 없었으니까. 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바우른 국왕이 점차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 이 세상에 신 같은 건 없구나. 내가 빌고, 기도했던 건 좆 같은 개새끼였구나!”
“아, 아버지….”
호펜은 바우른의 뒤틀린 웃음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떨었다.
“전하….”
키니어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마침 다가왔던 어둠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귀머거리와는 달리 바로 제 물음에 답을 주더군요.”
바우른이 두 손을 모았다. 빛이 모여들던 그의 손아귀에서 새까만 어둠이 피어났다.
“귀머거리는 너잖아!”
성녀가 바우른 국왕의 앞에 서서 악을 질렀다.
“내가. 우리가 널 어떤 마음으로 지켰는데, 그딴….”
그녀는 악독하다기보다는 괴로워하는 눈빛으로 바우른 국왕을 노려보았다.
“성녀. 아니, 올가.”
바우른이 성녀를 보며 신성이 바스러지는 듯한 미소를 그렸다.
“당신은 이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너무 선해요.”
“닥쳐!”
“당신 같은 사람을 빨리 부르는 머저리 신 따위는 제가 죽이겠습니다. 곧… 음?”
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춰 섰다.
“뭐죠?”
바우른 국왕은 신성력의 벽으로 차오르던 마기가 멈춰 선 것을 보고 눈매를 찌푸렸다.
“분명 성물과 성수는 모두 제거했을 텐데?”
그는 왜 마기가 멈춰버린 건지 모르겠다는 듯 손끝을 매만졌다.
“대비를 했지.”
라온이 탑 아래를 향해 턱짓했다. 성물과 성수를 지닌 채 벽면의 마기를 억제하는 성기사와 광풍대를 가리켰다.
“마족의 손을 잡은 자가 누구든 간에 막을 수 있도록.”
“하, 용살자의 진짜 무기는 검이 아니라, 혀와 심계라고 듣기는 했는데, 그게 정말일 줄은 몰랐군요.”
바우른은 광풍대가 마기를 막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끄는 게 전부일 겁니다.”
그가 두 손으로 합장을 이루자, 손아귀 사이에서 타오르던 마기가 허공으로 떠올라 왕국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터어엉!
라온이 이를 악물고 태화보를 밟았다. 마기가 떠오른 천공으로 도약하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뽑았다.
숨을 한 번 내쉬기도 전에 두 검으로 극쾌의 서리연을 뻗어냈다.
치이이이잉!
수많은 사선을 걸으며 담금질 된 경험으로 쏘아진 칼날이 마기를 짓눌렀다.
하지만 바우른 국왕이 일으킨 마기가 워낙에 지독했기에 완벽하게 막을 수가 없었다. 서쪽을 제외한 북, 동, 남쪽으로 섬뜩한 마기가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
대지에 추락한 마기에서 검은 불꽃에 휘감긴 마물들이 일어나 괴성을 터트렸다.
“어….”
“으아아아아악!”
“괴, 괴물이다!”
“살려… 크아아악!”
“도, 도망쳐! 당장 여기서… 어억!”
기도를 올리던 국민들은 도망칠 새도 없이 마물들에게 짓밟히거나, 그대로 씹어 먹혔다.
“끄으으윽….”
“사, 살려줘!”
“신이시여….”
마물들의 움직임과 힘은 웬만한 몬스터를 뛰어넘고 있었기에 아무런 힘도 없는 슈페르의 국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그들의 핏물이 새하얗게 달아오른 땅으로 흘러가며 검은 불길이 점점 더 짙게 타올랐다.
“멈춰!”
“바우른!”
라온과 성녀가 동시에 바우른 국왕을 향해 쇄도했다.
핏줄이 선 듯 날카롭게 갈린 칼날과 신성력의 벼락을 담은 주먹이 바우른 국왕의 목을 향해 나아갈 때 신성력의 벽과 푸른 강환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어엉!
첨탑 전체를 뒤흔드는 강대한 충격파가 퍼지고, 검은 안개가 차올랐다.
그 사이에서 빛나는 건 네 개의 눈동자. 바우른 국왕이 아닌, 피른 신관과 근위 기사단장 다니에프였다.
두 사람만이 아니다. 그들의 뒤에는 고위 신관 4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국왕 혼자만의 변질이 아니었다.
“피, 피른 신관!”
성녀가 고요한 가라앉은 피른 신관의 눈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당신까지!”
그녀는 국왕의 배신보다도 더 가슴이 아픈 듯 손끝을 떨었다.
“역시….”
라온은 검을 맞대고 있는 다니에프를 향해 입매를 비틀었다.
“두 분도 함께였군요.”
호펜은 피른 신관과 근위 기사단장 다니에프가 어릴 때부터 바우른 국왕을 모셨다고 했었고, 광풍대의 조사 때도 저 셋은 거의 함께 다녔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바우른 국왕의 변화를 저 사람이 모를 리 없으니, 배신도 함께했으리라 예상했었다.
“허어?”
바우른 국왕이 놀랍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 읽힐 줄은 정말 몰랐는데. 하지만 이제는 다 끝입니다.”
그가 다시 합장을 이루자, 발밑에서부터 어둠이 차올랐다.
“나가주시지요.”
바우른 국왕의 주변으로 어둠이 차오르며 지금 밟고 있는 첨탑의 바닥이 대비할 새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볼 때는 제가 신이 되어 있을 겁니다.”
바우른 국왕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검은 구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피른 신관은 더는 웃지 않았고, 다니에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허억….”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첨탑 위에 워낙에 많은 사람이 있었고, 상당수는 신성력만을 지닌 신관이었기에 이대로 놔둔다면 밑에 있는 사람들과 겹쳐서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것 같았다.
“시발! 시발! 시이이발!”
성녀는 욕을 하면서도 먼저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는 신성력을 두껍게 펼쳐서 추락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막을 만들었다.
“바우른!”
키니어는 국왕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떨어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후우.”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길게 뻗었다. 광풍류와 가루누아의 바람을 동시에 불러와 추락하는 사람들의 속도를 늦췄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집중력을 드높였기에 조그마한 실수도 없이 떨어지던 수십 명을 모두 구해낼 수 있었다.
다만 바우른 국왕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이미 검은 구체 안으로 들어가 몸을 감추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마기의 구체는 바우른 국왕을 보호하려는 듯 탑 전체를 휘감은 채 검은 불길을 일으켰다.
심장처럼 박동하는 지독한 마기의 흐름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라온.”
리메르가 어깨에 검은 피를 묻힌 채 다가왔다. 이미 마물들을 베고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정말 네 말대로 되었군.”
“시발. 아니길 바랐는데….”
“대주….”
버렌과 마르타, 루난도 칼에 검은 핏물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주님. 예상보다 마기가 독합니다.”
마크 괴튼이 인상을 찌푸린 채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마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는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성물과 성수를 뿌리고 있어도 그때뿐이에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꺼낸 성물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일이니라.
라스가 바닥에서 타오르는 옅은 검은 불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계에서부터 준비해온 제물의 낙인. 제물이 도망치면 안 되기에 육체와 정신에 제약을 거는 결계이니라.
‘그럼 진작에 좀 말해주지.’
라온이 라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계에서부터 준비해온 걸 본왕이 어떻게 알겠느냐! 저 머저리와 계약한 놈이 그 잡것의 권속인 줄 알았다면 진즉에 막았을 것이니라!
라스는 본인도 후회스럽다며 고개를 저었다.
‘제물의 낙인이라….’
라온이 천천히 신성력의 막을 뒤덮는 마기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기는 신성력의 막을 깨부수지 않고,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하루종일 기도를 하며 신성력을 끌어냈기에 외부에서 볼 때는 아직도 모두가 성회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국왕은 이 순간을 노려서 왕국을 제물로 본인의 힘을 키울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족도 하나 움직이고 있어.
바우른 국왕과 계약한 놈이 아니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마족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족 자체가 굉장히 강한 건 아니지만, 이 결계 안에서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마기는 내가 지워주겠소.”
팔라딘 키니어가 순백색 검을 뽑았다. 그가 어둠을 지우는 검날로 대지를 찍은 순간 사방으로 청아한 빛이 퍼지며 마기의 불꽃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크윽, 이, 이거 생각보다 강한데….”
키니어의 안색이 노랗게 질려간다. 성기사 중 최강이라 불리는 팔라딘의 신성력으로도 벽과 대지를 뒤덮는 마기를 짓누를 수 없는 것 같았다.
“한심한 놈.”
성녀가 키니어의 검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작은 손아귀에서 거대한 빛이 싹튼다. 왕국의 중심에서 새하얀 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쿠와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뿜어지며 사방에서 타오르던 마기의 불길이 가라앉았다.
“이것도 못 해?”
성녀가 키니어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너 같은 괴물이랑 비교하지 마.”
키니어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저었다.
“버틸 수는 있겠지?”
“그것도 못 할까 봐?”
그는 자신을 믿으라며 눈썹을 깊게 내렸다.
“호펜.”
“아, 예….”
멍하니 서 있던 호펜이 키니어의 부름에 손을 떨었다.
“모든 성기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주마.”
키니어가 가슴에 차고 있던 팔라딘의 문양을 호펜에게 넘겨주었다.
“마물들을 쓸어버려.”
“저, 저는….”
호펜은 그 문양을 받지 않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비의 잘못을 자식이 책임지는 건 부당한 일이죠. 하지만….”
라온이 호펜에게 다가가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 부당함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알겠습니다.”
호펜은 입술을 깨물고서 팔라딘의 문양을 받았다.
“마족이 움직이고 있어.”
라온이 광풍대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대주가 그렇게 사정한다면 해줘야지.”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요.”
“빨리 끝내고 아이스크림.”
버렌, 마르타, 루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크 괴튼도 믿어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처음 말했던 대로 내 상대는 저 위에 있나?”
리메르가 허리춤의 검을 툭툭 치며 웃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간다. 뒈지더라도 그 망할 새끼들을 후려패고 죽을 거야.”
성녀가 입가에서 흘러내린 핏물을 닦으며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허벅지에는 신성력을 과하게 사용하여 피부가 녹아내린 문양이 하나 늘어나 있었다. 말려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탑 전체를 휘감은 검은 마기를 향해 손을 얹었다.
* * *
“우측에서 들어온다!”
버렌의 외침에 광풍진의 균형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쿠구구구구!
검은 불꽃에 타오르는 괴수가 대지를 갈아엎으며 돌진해온다. 눈알이 달린 꼬리 세 개가 채찍처럼 움직이는 모습. 이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마물이었다.
“1조 만창!”
마르타가 1조의 검사들과 함께 땅을 박찬다. 짙은 오러가 차오른 칼날 위로 광풍류의 바람이 깃들며 푸른 검격이 명멸했다.
퍼어어어엉!
건물들을 으깨며 다가오던 마물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며 검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후우우우웅!
광풍대의 검이 살짝 내려간 틈에 허공에서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마물이 급격히 하강하며 도끼 같은 발톱을 뻗어왔다.
치이이이잉!
루난과 2조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푸른 서리가 그물처럼 펼쳐지고, 그 뒤를 바람이 감싸며 새 형태의 마물을 통째로 감싸버렸다.
촤아아아악!
마물이 얼어붙는 날개를 보며 도망치려 할 때 마크 괴튼의 벼락 같은 도격이 떨어지며 새 형태의 마물이 반으로 갈라져 녹아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떨리는 다리로 선 채 고개를 숙였다.
“이거 받으세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작은 성수병을 꺼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뿌려주었다.
“서쪽으로 움직이세요. 여기는 위험합니다.”
버렌은 마물이 떨어지지 않은 서쪽을 가리키며 다시 움직였다.
‘광풍류를 익힌 게 큰 도움이 되는군.’
마물들 하나하나가 강력하여 본래라면 많은 오러를 소모해야 했지만, 광풍류 덕분에 전투 효율이 좋아졌다.
전부 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시간은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족 놈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마르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찌푸렸다.
“기척이 너무 많아. 우리가 찾는 건 무리다. 하지만….”
버렌이 고개를 저으며 입맛을 다셨다.
“놈이 올 곳은 정해져 있지.”
“정해져 있다고?”
“그래. 지금 가면 될 거야.”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그는 왔던 길을 돌아가며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여긴 왔던 길이잖아요?”
크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족 놈이 노리는 건 뻔해.”
“아!”
마르타도 버렌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손뼉을 쳤다.
“모두 전력으로 돌아간다!”
버렌은 급하다고 말하며 라온과 국왕이 기도를 올렸던 첨탑으로 달렸다.
그의 시선에 마기를 억누르는 키니어가 보이기 시작할 때 중앙 대로가 반으로 갈라지고, 흑화가 솟구쳤다.
검은 불꽃은 가시 목줄을 매단 거대한 개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꼬리 짓 한 번으로 주변의 건물들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쿠와아아아아아!
거대한 개 위에는 이마에 작은 뿔이 솟구친 흑발흑안의 청년이 타고 있었다. 그는 키니어만을 노리며 개 형태의 마물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수가 키니어를 향해 불꽃을 뿜어낼 때 광풍대가 돌진하여 앞을 막아섰다.
쿠우우우우우!
검은 불길은 광풍류의 바람을 뚫지 못한 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키니어가 검에 손을 얹은 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방해를!”
흑발흑안의 마족이 광풍대를 노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하등한 인간 따위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족 주제에 개소리를 하고 있네.”
마르타가 마족을 노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매일 같이 싸우는 건 너 같은 잡몹이 아니라, 마왕이야.”
“무서울 게 없지.”
루난이 고개를 꾸벅였다.
광풍대 역시 마족의 마기에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검을 다잡았다.
“이놈들 무슨….”
마족은 본인의 마기에 노출되고도 덤덤한 광풍대를 보며 당황스럽다는 듯 검은 눈동자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