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71
제671화
철퍽.
발에 짓밟힌 마기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마기는 공포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한 떨림을 일으키다가 난간 사이로 흘러내렸다.
쯧.
라온은 끈끈한 마기가 차오른 계단을 오르며 혀를 찼다.
‘끝이 없군.’
라스에게 넘겨받은 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모두 소모했을 것이다.
바우른이 이 탑의 정상에서 개짓거리를 하는 것도 이 지독한 마기의 길을 뚫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 같았다.
-끄으으윽….
라스가 어깨에 내려앉은 채 오동통한 주먹을 떨었다.
-본왕이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니라! 이러려고 분노를 넘긴 게 아닌데에에에에!
녀석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억울하다며 비명을 질렀다. 본인의 무기가 내 무기로 변한 상황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 끝나면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조용히 좀 해.’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흡.
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지금 보니 이걸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으로 적응이 안 되는 마왕이다.
“야.”
성녀 올가가 등 뒤에서 손짓을 해왔다.
“너 혼자 조뺑이 치는 거 아니지?”
“조뺑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그녀는 마기를 거침없이 밀어내는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떨었다.
“혹시라도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거라면….”
“난 너처럼 무식하지 않으니까. 걱정 말도록.”
“저 썅….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네.”
올가가 라온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너처럼 무식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리메르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 가짜 성녀. 신성력을 다 소모하면 자기 생명력을 갈아 넣고 있거든요.”
“뭐…?”
“팔다리에 새겨진 검은 줄은 문신이 아니라, 생명력을 신성력으로 전환할 때 피부가 녹아내리는 현상입니다.”
라온이 성녀의 삐죽 나온 입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그건 돈을 갚을 수 없는 고리대금이나 마찬가지야! 왜 그러고 사는 건데!”
리메르 본인도 그런 식으로 싸워보았기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이사 어떻게 살든.”
올가는 신경 끄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넌 쓸데없이 신성력을 낭비하지 마.”
라온은 올가의 구겨진 표정을 향해 턱짓했다. 성향은 정반대지만 하는 짓이 꼭 멀린을 보는 것 같아서 속이 불편했다.
“내 모가지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입 다물라고.”
“그러다가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죽을 거다.”
라스는 올가의 천통에 대해서 한 가지 정보를 더 말해주었다.
‘요절.’
스스로의 의자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상단전이 개방되어 있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다고 한다.
‘저 여자 정말 얼마 안 남은 거 맞아?’
-그렇다고 말했잖느냐! 상단전이 파인애플 소녀보다 훨씬 많이 열려 있기에 오래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느니라!
라스는 몇 번을 물어보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바우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어.’
바우른 국왕이 올가에게 그녀를 빨리 데리고 가려는 신을 죽이겠다고 한 이유도 그녀의 수명을 알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멀린만큼 미친 여자를 보게 될 줄이야.’
짧은 수명으로 태어났으면서 남을 살리기 위해서 그 수명을 더 조이는 올가의 모습은 짚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았다.
“너는….”
라온이 올가를 내려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힐 때 라스가 불쑥 솟구쳤다.
-잠깐! 이 난리가 났는데, 아이스크림 매장이 무사할 리가 없지 않느냐! 당장 나가거라!
‘그럼 다른 곳에서 사면… 위에 있군.’
라온은 달라붙는 라스를 설득하다 말고,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마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짙어진다. 이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신성력과 마기가 뒤섞인 듯한 회색의 땅 위에 피른 신관과 근위 기사단장 다니에프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다시 오실 줄은 몰랐군요.”
피른 신관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다니에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잔잔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피른! 다니에프!”
올가가 계단을 오르자마자, 두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이 개새끼들이!”
어찌나 분한지 그녀의 어깨가 내려앉을 것처럼 떨렸다.
“올가.”
피른 신관은 성녀라는 칭호가 아닌, 올가의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왕국 전체를 보호할 신성력을 쏟아부어 놓고, 여기까지 오시다니. 그러다가 정말 죽을 겁니다.”
그는 올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어. 죽을 거야. 일단 너희부터 조지고.”
올가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올가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건 당신입니다.”
피른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신성력도, 오러도, 마나도 아닌데 대체 무엇으로 마기를 뚫는지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당신은 무슨 힘을….”
“…….”
라온은 피른 신관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회색 바닥을 내디디며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라온 님이 갈 수 있는 길은 여기까지입니다!”
“…….”
피른 신관이 새하얀 기운이 타오르는 주먹을 내지르고, 다니에프가 발검과 동시에 목을 노려왔다.
라온은 피른 신관과 다니에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담담한 걸음으로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후우우우웅!
피른 신관의 권격과 다니에프의 칼날이 라온에게 닿기 전에 새하얀 빛과 푸른 바람이 떠올랐다.
쩌어어어어엉!
리메르와 올가다. 두 사람은 라온의 좌측과 뒤편에 서서 피른 신관과 다니에프의 공세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당신 상대는 나야!”
올가가 피른 신관의 주먹을 팔뚝으로 막은 채 이를 갈았다.
“댁은 처음부터 나보고 잡으라고 하더라고.”
리메르가 검을 맞댄 다니에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은 올가와 리메르의 경합을 보지도 않은 채 더 짙은 마기가 차오른 계단을 올라갔다.
“야!”
올가가 라온을 돌아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바우른 새끼 멱살 잡고 끌고 와!”
“살아있다면.”
라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두 사람을 완전히 믿는 모습이었다.
“멈추십시오!”
피른의 몸이 안개 속에 스며들 듯 흐릿해졌다. 그가 라온을 잡기 위해 계단으로 향할 때 올가의 몸이 똑같은 형상을 그린 채 계단 앞을 막아섰다.
쿠우우우웅!
신성력을 담은 주먹과 주먹이 교차하며 강대한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쩌어어어엉!
다니에프도 라온에게 강기를 쏘아냈지만, 리메르의 검에 꺾여 바닥을 무너뜨릴 듯한 진동만 일으켰다.
“비켜라….”
“일단 판에 앉았으면 패는 돌려야지. 어딜 가려고.”
리메르가 다니에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올가! 전하를 믿으셔야 합니다!”
피른이 올가의 주먹을 밀어내며 턱을 떨었다.
“믿어? 마족과 손을 잡고, 국민을 제물로 바치는 왕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올가가 피른을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난세입니다. 육황오마. 아니, 그 이상의 괴물이 판치는 이 대륙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전하는 이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
“나도 신은 개새끼라고 생각해. 귀도 먹었고, 눈도 멀었지. 하지만 너희는 눈깔도, 고막도 없잖아!”
그녀가 이를 악물며 신성에 휘감긴 주먹을 내질렀다.
터엉!
피른은 극쾌를 담은 올가의 주먹을 가볍게 쳐내고, 수도를 세워 그녀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어어억!
올가가 팔꿈치로 피른의 수도를 막아냈지만, 힘에서 밀린 듯 얼굴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섰다.
터어엉!
올가가 바닥을 밀어내며 피른에게 달려들었다. 숨 쉴 틈 없이 연달아 주먹을 뻗어낸다.
난잡한 듯 보이지만, 긴 세월 동안 쌓인 정밀한 체계가 잡혀 있었다.
하지만 피른은 올가가 펼쳐낸 권법의 흐름을 모두 읽고 있는 듯 그녀의 권격을 모조리 흘려냈다.
“올가.”
피른 신관이 올가와 비슷한 자체를 취한 채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권을 가르친 게 누구인지 잊고 계신 듯하군요.”
그가 하얀 신성의 불꽃이 타오르는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래. 당신에게 배웠었지.”
올가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었다? 절대 아니지.’
어릴 적 고사리손으로 피른의 권법을 따라 하던 일이 떠오른다.
바우른과 다니에프가 그 뒤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것도, 옷깃을 빳빳이 세워주던 햇볕도, 땀에 젖은 머리를 식혀주던 선선한 바람도 무엇 하나 잊지 않았다.
그들과의 추억이 내 머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인간을 포기한 스승은 내 손으로 막아야 했다. 설사 이곳에서 삶을 끝내더라도.
“올가.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본인을 넘어서는 걸 기뻐한다고 하더군.”
올가의 자세가 땅을 기듯이 낮아졌다. 수풀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사자를 보는 듯했다.
“당신은 어떨까?”
그녀의 어깨와 허벅지 위로 피부가 녹아내리며 신성의 상흔이 새겨진다.
찌지지지직!
올가는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고고한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좌측. 핏줄이 선 주먹이 피른의 허리를 향해 쏘아졌다.
“흠.”
피른은 조금 당황한 듯 눈썹을 떨면서도 손을 들어 올가의 권격을 막아섰다.
후우우웅!
올가는 권격이 막힐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피른에게 한 발 더 다가가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매섭게 갈린 권격의 충격파가 폭발했다.
“당신이 저를 넘으려면… 음?”
피른이 올가의 주먹을 흘려내다 말고, 어깨를 떨었다.
‘뭐야 이건….’
올가의 권격이 점차 예상을 벗어난 궤도로 파고들어 오고, 그 위력 역시 방어를 뚫고 뼈와 내장을 뒤흔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올가의 무력이 아니었다.
뻐어어어억!
올가의 주먹에서 전해져오는 충격이 너무 거세서 점차 방어가 어려워진다. 강대한 고통에 손끝이 흔들린 순간 그녀의 주먹이 허리를 직격 했다.
“커헉!”
피른이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허리가 구겨진 종이처럼 깊게 파여나가 있었다.
“대, 대체….”
“놀라긴 일러.”
올가가 이를 악문 채 피른에게 다가가 재차 주먹을 뻗어냈다.
“크윽!”
피른은 두 손을 들어 방어 태세를 갖췄다. 공세를 포기하고, 모든 신성력을 방어로 돌렸다.
하지만 올가의 주먹은 채찍처럼 길게 휘어지며 피른의 방어를 무시하고, 그의 어깨와 복부를 터트렸다.
퍼어어억!
피른이 피를 토하며 마기로 세워진 벽에 부딪혔다.
“이, 이게 무슨….”
“나는 당신이 항상 내 위에 있어 주기를 바랐어.”
올가가 다리를 떠는 피른의 앞에 선 채 입술을 씹었다.
“설마….”
피른이 입술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힘을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삶이 끝을 향해 갈수록 무학의 경지가 미친 듯이 올라가더군.”
올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입매를 밑으로 비틀며 왼 주먹을 내질렀다.
“크윽….”
이제 피른은 올가의 권격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고, 오른쪽 가슴을 얻어맞은 채 바닥을 굴렀다.
“일어나. 내 속이 풀리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대, 대단하군요. 하지만….”
피른이 검은 피를 내뱉으며 두 손으로 합장을 이뤘다. 지금까지와 달리 새하얀 신성력 위로 검은 마기가 타올랐다.
권격을 얻어맞아서 살점이 드러났던 상처들이 꿈틀거리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저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피른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인자함이 스며있던 그의 얼굴이 표독함으로 가득 찼다.
쿠구구구구구!
그의 주먹을 휘감은 신성과 마기가 음습한 조화를 이룬다. 이 공간 자체를 지워버릴 듯한 막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쿠우우우웅!
올가가 거세게 진각을 밟았다. 그녀의 두 눈에 어린 건 두려움이 아닌 신의였다.
“당신이 가르쳐준 마지막 기술이야.”
올가의 작은 주먹에 어려 있던 흐릿한 백광이 햇볕을 받은 듯 진한 빛을 토해냈다.
마기에 흩어졌던 신성의 조각들이 실타래처럼 엉키며 찬연한 광채가 명멸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올가와 피른의 자세는 거울을 비춘 듯 같았다. 허나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의 승패는 의지가 갈랐다.
쩌어어어어억!
처음부터 한 길을 걸어온. 아니, 아래로 향하는 길 자체를 보지 않은 올가의 주먹은 피른의 마기를 깨부수고, 그의 오른쪽 뺨을 무겁게 후려쳤다.
“커헉….”
피른은 광대가 무너지고, 새하얀 이빨을 모조리 뱉어낸 채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일격에 정신을 잃은 듯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허억….”
올가는 피른이 쓰러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검은 피를 토했다. 그녀의 다리에는 검은 줄이 세 개 더 그어져 있었다. 죽지 않은 게 용한 상태였다.
“씨발….”
올가가 천장을 올려보며 욕을 내뱉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는 게 분하다는 듯 이를 바득 갈았다.
“꼭 끌고 내려와!”
* * *
“청출어람.”
리메르는 다니에프와 대치한 채로 올가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스승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 기사들도 그러한가?”
“…….”
다니에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래에서부터 검을 쳐올렸다. 강환이 스며든 검격이 리메르의 머리카락 끝을 잘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사에게는 기사도가 있잖아. 그 기사도에 이런 짓을 해도 된다고 적혀 있어?”
“…기사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자.”
다니에프가 검을 사선으로 내리치며 섬뜩한 안광을 드러냈다.
“주군의 명이라면 지옥불에라도 들어가는 게 기사다.”
“아니지.”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다니에프의 검을 가볍게 밀어냈다. 단순한 힘이 아닌, 영혼이 쌓은 의지가 실려 있었다.
“너는 기사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어.”
“비루한 검사 따위가….”
“그래. 이 비루한 검사가 진짜 기사도를 알려주지.”
그가 쥐고 있는 새하얀 검날 위로 푸른 바람과 붉은 뇌전이 요동쳤다.
“검계현신. 바람과 벼락의 노래.”
그 낭랑한 외침이 울리는 순간 마기로 가득 찬 세계가 뒤틀린다.
대자연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과 벼락이 사방에서 몰아치며 강대한 빛을 토해냈다.
“일검이다.”
리메르가 바람과 뇌전이 깃든 검날을 뒤로 젖히며 고개를 까딱였다.
“…….”
다니에프도 일검 승부를 받아들인 듯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채 오러를 모조리 끌어냈다. 그의 검날 위로 타오른 강환이 파도처럼 너울졌다.
뚜욱.
천장에서 흘러내린 마기의 물방울이 땅에 떨어진 순간 검사와 기사의 검이 찬란한 빛살이 되어 뻗어나갔다.
쿠구구구구!
다니에프의 검신에서 타오른 강환은 대해의 해일처럼 리메르의 모든 것을 지울 듯이 쏟아져 내렸다. 강환 앞에 걸린 마기가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치이이이잉!
리메르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번뜩인 순간 사방에서 요동치던 바람과 뇌기가 가라앉으며 그의 검날에 스며들었다.
검계현신 폭풍의 눈.
바람과 벼락의 노래에 폭풍의 눈의 마지막 검격을 응용한 새로운 검계였다.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광풍류의 바람. 대기를 지배하는 바람이 어둠 속에서 뇌전의 폭풍을 불러왔다.
벼락 폭풍이 그어져 내리는 하나의 궤적 사이로 다니에프의 푸른 파도가 걸렸다.
쩌어어어억!
다니에프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낸 강환의 파도가 갈라지고, 그의 검이 바스러진다.
푸카아아아악!
다니에프의 가슴에서 살벌할 정도의 핏물이 치솟았다. 그는 힘이 모두 빠진 듯 무릎을 꿇으며 반 토막 난 검을 떨어뜨렸다.
“내, 내가….”
다니에프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피가 쏟아지는 입술을 떨었다.
“어떻게 했어야 했지?”
그가 묻는 건 패배가 아니라, 바우른을 어떻게 막아야 했는지였다.
“기사는 군주를 따르기만 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리메르는 도검존의 무덤에서 라온을 구하고 죽어간 뇌쇠 바르필과 코만 기사단장 쿠잔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내가 본 기사들은 죄를 지었어도, 군주를 위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군주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목숨을 걸고 막아서는 자들이었다. 군주가 어긋난 행동을 한다면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는 게 진짜 기사다.”
“잘못된 길을 걷는 군주의 엉덩이를 걷어찬다라….”
다이에프는 위를 올려보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바우른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되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네 멍청한 군주는 내가 모시는 왕이 끌어내려 줄 테니까.”
“네가 모시는 왕?”
“그래. 내가 걷어찰 필요도 없이 오히려 지가 날 걷어차는 망나니 왕이지.”
라메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위층을 가리고 있던 마기가 갈라지고, 황금빛 불길이 솟구쳤다. 그는 불길 속에 서 있는 금발적안의 청년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 아이가 내가 따르는 지그하르트의 어린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