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75
제675화
“내게 무엇을 원하지?”
글러트니는 라스의 절규를 듣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도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니, 식탐이라는 속성은 확실했다.
“일단 이곳에 있는 이들은 건드리지 마라.”
라온이 라스의 푸른 눈동자로 글러트니를 노려보았다.
“모두 본왕의 수하들이니까.”
“으음….”
글러트니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살짝 씹었다. 표정을 보니, 말을 안 했으면 정말 먹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하여튼 마왕 중에는 정상이 없었다.
“네놈이 먹어 치운 놈은 그리드의 권속이니라. 본왕의 수하를 건드린 대가를 영혼에 새겨주려고 했는데….”
라온이 글러트니를 굽어보며 턱을 모로 틀었다.
“네놈이 산 채로 집어삼켰느니라. 거기다….”
라스의 기파를 날카롭게 퍼뜨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 모습까지 보이게 했지.”
“으음….”
글러트니가 눈썹을 움찔하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네놈의 주둥아리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법이 없으니, 대가는 확실하게 받을 것이니라.”
“…….”
그녀는 할 말이 없는 듯 어깨를 축 내렸다.
이렇게 보니, 퍼런 솜사탕의 무력과 존재감이 마왕 중에서도 최상위라는 게 느껴졌다.
-그, 글러트니의 입에 관한 건 또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냐!
라스가 가슴팍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네가 말해줬잖아.’
라온이 라스의 동그란 눈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왕이 언제!
‘저 입에 먹히면 본왕도 구해줄 수 없으니, 빨리 그 몸을 본왕에게 넘기거라. 라고 했지.’
녀석이 저 말을 해준 덕분에 글러트니가 소환하는 하얀 입술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에게 권능을 얻을 방법도 떠올랐다.
-으아아아악!
라스가 살랑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악을 질렀다.
-미치겠느니라! 왜 그런 말을 한 것이냐! 본왕의 입이여!
녀석은 항상 수다를 떠는 게 문제라며 본인의 입을 두드렸다.
“그럼 이곳에 있는 인간들만 안 먹으면 되는 거야?”
글러트니는 크게 양보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저걸 양보라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착각이 심하구나. 그건 요구가 아니라, 경고이니라.”
라온이 글러트니의 하얀 입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혓바닥이 뽑히기 싫다면 알아서 굽히는 게 좋을 것이야.”
“으….”
글러트니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자, 허공에 떠 있던 하얀 입술이 어둠 속으로 녹아내렸다.
-으으. 돌아버리겠느니라!
라스가 동그란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질렀다.
-왜 검술 수련을 할수록 연기만 느는 건데!
‘이건 타고난 거야.’
암살자로 살며 수많은 인간을 연기했기에 단순한 마왕들을 속이는 건 무엇보다도 쉬웠다.
“식충이.”
라온은 라스의 발악을 즐기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네놈의 권능을 내놓거라.”
답을 기다리는 글러트니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 권능?”
“그렇느니라.”
“네가 을 원한다고?”
글러트니는 의외라고 생각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어째서?”
“본왕이 왜 네놈에게 답을 해주어야 하지?”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괜히 말이 많아지면 글러트니가 의심해올 수도 있다.
라스의 위세를 이용하여 말을 아끼는 게 정답이었다.
“네놈은 결정만 하면 되느니라. 여기서 혀가 뽑히든가 혹은 네 권능을 내놓고 사라지든가.”
극한의 허세. 지금 글러트니가 손짓 하나만 하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게 될 테지만,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당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으으으….
라스가 관자놀이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보, 본왕도 속을 것 같으니라. 그래도 속으면 안 된다!
녀석이 글러트니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식충아! 이놈을 죽이거라! 인간계만이 아니라, 마계에도 위협이 될 천사 같은 놈이다!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당연히 글러트니는 듣지 못했다.
“후….”
글러트니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가 고플 것 같지만, 알겠어.”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애애애애!
라스가 머리를 움켜쥐며 절규를 토했다.
-왜 마왕들은 이런 호구 놈들밖에 없는 것이냐! 왜!
‘네가 제일 호구잖아.’
첫 번째이자, 가장 많은 것을 퍼준 호구가 다른 호구를 타박하는 게 우스웠다.
‘이제 글러트니에게 권능을 받는 방식만 결정하면 되겠군.’
-자, 잠깐!
미소를 지을 때 라스가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네놈 설마 꽃팔찌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받을 생각이냐?
‘그런데?’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세 개의 꽃팔찌는 전부 라스의 취향이다. 이제는 다른 모양으로 받고 싶었다.
-미적 감각도 없는 놈! 너는 깔맞춤도 모르는 것이냐!
‘아는데?’
-그런데 왜!
‘꽃팔찌가 더 싫으니까.
-안 되느니라! 본왕은 깔이 안 맞는 걸 못 참는다고!
라스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깔은 네 몸에나 챙겨.’
녀석을 쳐내고서 글러트니에게 손짓을 했다.
“글러트니.”
라온은 두 마왕을 농락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본왕의 손목에 네놈의 권능을 담은….”
손목을 가리키며 글러트니에게 권능을 넘겨주는 방식을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글러트니의 위에서 귀를 무겁게 누르는 듯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
시선을 들어 올린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글러트니의 머리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흑발금안에 피부가 살짝 그을린 큰 키의 미청년이다. 소매를 걷은 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었고, 오른쪽 눈에 금색 외눈 안경을 끼고 있었다.
‘저놈은 뭐야….’
숨을 쉬는 것만으로 공간을 비틀어버리는 글러트니와는 다르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이 살짝 내려가 있는 게 아니었다면 허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역시 온 건가….
라스의 신음을 듣자,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라스. 저거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니라.
라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의 군주. 그리드이니라.
그리드라는 이름이 들린 순간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
실크렛이 그리드의 권속이었기에 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드.”
글러트니는 눈동자를 올려 본인의 머리에 턱을 괴고 있는 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있어?”
“네가 내 권속을 먹어 치웠으니까.”
그리드가 글러트니를 내려보며 픽 웃었다. 권속이 당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여유와 미소만 번져 나왔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혼나고 있었어.”
글러트니가 라온을 바라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널 혼내? 누가?”
“라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라온을 가리켰다.
“라스라….”
그리드의 금빛 눈동자가 라스의 육체를 섬찟하게 훑어내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픽 웃으며 턱을 저었다.
“저건 인간이잖아.”
그리드에게 인간이라는 말을 듣자,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인간?”
글러트니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색도, 눈동자도, 마기도 다 라스인데?”
“맞아. 머리 색도, 눈동자도, 마기도 다 그 분조장이지. 하지만….”
그리드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저건 인간이야.”
그는 확신을 가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라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역시나 저놈은 알아차리는군.
라스는 그리드에게 들켰음에도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오른 표정이었다.
-전에도 말했을 터다. 탐욕과 오만은 네가 호구로 만든 놈들과 다를 것이라고.
녀석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본왕에게 몸을 넘길 준비를 해라. 자칫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니라.
라스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그리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으로 녀석이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혀를 살짝 씹으며 어깨와 팔 부분의 마나 회로에 직접적인 손상을 일으켰다.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왕 강림을 꺼내야 하기에 일부러 상처를 만들었다.
“아닌데.”
글러트니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럼 직접 물어볼까.”
그리드가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지만물에 통달한 듯한 금색 눈동자가 연한 빛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연기를 할 생각이지?”
“…….”
라온이 그리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기세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처럼 속이 진탕되었다.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당당히 턱을 세웠다.
“잡것. 돈만 쳐 모으더니, 눈깔도 금화가 된 것이냐.”
“하!”
그리드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탄성을 터트렸다.
“진짜 라스 같네. 그 분조장이 했을 법한 말이야.”
그는 여전히 라스가 아니라고 여기는 듯 여유롭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여기 있는 글러트니나, 다른 녀석들은 속았겠지만….”
그리드의 눈동자 위로 오싹한 빛이 명멸했다.
“나는 속일 수 없어. 넌 누구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숨이 막혀서 혀가 마비된 듯한 기분이었다.
‘긴장해서는 안 돼.’
여기서 말이라도 더듬었다가는 글러트니에게도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끝까지 당당하게 나가야 했다.
“안 그래도 네놈에게도 할 말이 있었느니라. 네놈이 키운 망아지가 본왕에게 시비를 걸어왔으니까.”
라온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입매를 비틀었다.
“글러트니만이 아니라, 네놈에게도 대가를 받겠느니라.”
-허….
라스가 라온을 올려다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정말 미친놈이로다….
녀석은 이 와중에도 연기를 계속하는 라온에게 감탄한 듯 고개를 떨었다.
“정말 네가 라스라면 대가 정도는 치러줄 수 있지. 다만….”
그리드가 미소를 유지한 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너는 라스가 아니잖아.”
“또 개소리를….”
“내가 왜 확신하는지 알려줄까?”
놈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외눈 안경을 툭툭 쳤다.
“이 안경은 상대의 근본을 보여주거든.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네 미천한 영혼이 그대로 보이고 있단 말이다.”
“…….”
라온이 억지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안쪽 입술을 씹었다.
‘이건 진짜 위험해.’
정말 저 안경이 근본을 볼 수 있는 아티팩트라면 이 연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섬뜩함이 다가왔다.
“그래. 인정해주지. 연기 하나는 확실히 잘해.”
그리드가 연한 미소를 그리며 가늘면서도 긴 손가락을 세웠다.
“다만 목이 날아가도 연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안 되겠구나.
라스가 그리드의 눈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연기는 완벽했지만, 저놈은 남을 믿지 않느니라. 더 이상 지체되면 정말 위험하느니라. 당장 몸을….
‘시간이 부족해.’
아직 라스를 받아들일 정도로 육체와 영혼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야…아!’
시간을 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되새기는데, 그리드가 했던 말 중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내 영혼이 하찮다고?’
불의 고리를 운용하고 있을 때의 내 영혼은 라스가 인정해줄 정도로 높은 격을 지녔다.
눈 높은 라스가 인정한 영혼의 격을 하찮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리드의 말에 거짓이 섞여 있는 게 분명했다.
‘가능성은 높아.’
마왕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라스가 특이할 뿐이었다.
다 떠나서 지금은 어떤 말을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장사치.”
라온이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드의 눈을 보며 비웃음을 그렸다.
“본왕이 그딴 거짓말에 속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대가리도 돈을 세다가 망가진 모양이로구나.”
“허어….”
그리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정말이지 인간답지 않군.”
그가 손뼉을 치며 키득 웃었다.
“맞아. 네 말대로 그런 물건은 없어. 하지만….”
그리드가 피식 웃으며 외눈 안경을 벗었다.
“네가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상인의 본능이 말하고 있거든. 네가 인간이라고.”
그리드가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안 돼.’
지금까지 나를 살렸던 감각이 말한다. 저 금안의 마왕은 내가 라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한데….’
이 상태로 라스에게 몸을 넘겨봤자 제힘을 쓸 수 없다는 생각, 생사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진짜 마왕 강림을 사용하면 후유증이 생길 거라는 걱정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에 대한 안타까움에 손이 떨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가 손가락을 무겁게 까딱였다.
-됐으니, 당장 몸을 넘겨라.
‘뭐?’
-저 장사치가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해도 본왕이 정당한 계약이라 확신했으니, 책임을 지겠느니라.
녀석은 마족의 계약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던 일을 반성하며 모든 것을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본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네놈에게 피해가 갈 부분을 반 이상 감당해주겠느니라.
‘어….’
-빨리 결정해라! 늦으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라스는 살의를 담은 그리드의 눈동자를 보며 외쳤다.
‘빌어먹을!’
라온이 마나 회로와 장기를 더 크게 찢어버렸다. 긴장 때문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육체와 영혼 사이에 그려진 검진 속으로 라스의 영혼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준비 운동은 필요 없겠지.”
그리드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세웠다.
“장사치 주제에.”
라온은 고통을 참으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입심 하나는 그 녀석보다 낫군.”
그리드가 오른발을 내디뎠다. 산보에 나가듯 뻗은 가벼운 발걸음은 공간을 초월했다. 그는 이미 라온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다.
온 세상이 까맣고, 하얀 흑백의 세계로 뒤덮이며 전생과 현생의 삶이 매듭처럼 이어졌다. 죽음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리드의 손가락이 공기를 가르는 흐름이 느껴지기도 전에 목 부분의 피부가 잘려 나가는 통증이 일었다.
찌지지직!
피부가 갈라지고, 목뼈가 분질러지려는 찰나 내 육체와 영혼이 조개의 껍데기처럼 활짝 벌어졌다.
라스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계 속으로 본인의 영혼을 끝가지 밀어 넣었다.
투우우우웅!
세계의 흐름이 뒤틀리는 굉음이 울린다.
짙푸른 광채가 어둑한 창공을 뚫고 솟구쳤다. 은색의 달무리가 소나기가 된 듯 왕국 전체를 뒤덮은 마기를 씻어냈다.
공간을 길게 찢고 솟구친 서리의 세계수 위로 은은한 휘광이 명멸했다.
흩날리는 청색 이파리 사이에서 푸른 마왕과 금색의 마왕이 손가락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 거만한 눈빛. 이래야 분조장이지.”
그리드가 이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듯 진한 미소를 그렸다. 라스를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 인간은 대체 뭐였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라스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그리드의 금안을 짓눌렀다.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지? 조금 전까지 네놈의 육체를 지배하던 건 인간이었잖아.”
“본왕이다.”
라스는 라온의 허물마저 감싸듯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눈동자가 은빛 결의로 번뜩였다.
“이전의 하찮음도, 지금의 거만함도 그 모든 것이 본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