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91
제691화
“허억….”
라온은 넓고도 곧은 글렌의 등을 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글렌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격하게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바로 뒤에서 백혈교주가 쫓아오고, 수많은 혈귀들이 몰려오는 게 보여도 불안하지 않았다. 진짜 할아버지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찾아온 듯한 기분이라 코끝이 시려왔다.
“글렌 지그하르트!”
백혈교주가 뇌기에 닿았던 손가락을 털어내며 붉은 입꼬리를 길쭉하게 말아 올렸다.
“알아서 죽여달라고 찾아오다니, 여전히 성격이 급하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뒤틀린다.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희열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해냈구나.”
글렌은 백혈교주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라온을 돌아보았다.
“믿고 있었다.”
그는 라온의 등에 업혀 있는 오그람을 보며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주님….”
라온은 글렌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으며 입술을 떨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믿고 있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가주전에서 칭찬을 들었을 때보다 가슴이 진하게 울렸다.
“하….”
백혈교주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녀는 글렌에게 무시당한 게 분한 듯 손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움직일 준비를 해라. 진법 때문에 혈령통로가 빠르게 닫히고 있다.]글렌은 이번에도 백혈교주를 무시한 채 뇌리에 울리는 음성을 보내왔다. 오러 메시지보다 한층 더 수준 높은 기예였다.
“글렌 지그하르트!”
두 번이나 무시당한 백혈교주가 참지 못하고, 혈기를 일으켰다. 너풀거리는 그녀의 백색 드레스의 사이로 막대한 혈기의 파도가 치솟았다.
“아무리 네놈이라고 해도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신이다!”
“오그람의 피를 마셨군.”
글렌은 백혈교주의 거대한 기파를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달콤했지. 늙은이 피 같지 않았어.”
백혈교주가 혀로 붉은 입술을 축이며 사이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 네 피도 궁금해지더구나. 어떤 맛이 날지.”
“너 따위가?”
글렌이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하긴 멍청한 모기들은 제 배가 터질 때까지 피를 빠는 법이니까.”
그는 백혈교주가 오그람의 기운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고 비웃음을 그렸다.
“허세가 심하구나.”
백혈교주가 악귀처럼 인상을 쓰다가 코웃음을 쳤다.
“네 상태도 정상이 아니잖아. 노쇠한 육체로 버티기 힘들 텐데?”
그녀는 글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백혈교주의 뒤편으로 순백의 여신이 일어선다. 마라혈식관음.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거대한 혈기를 휘감았으며, 팔의 갯수도 10개 이상 많았다.
그녀의 성장에 따라 마라혈식관음도 강해지는 것 같았다.
화아아아아아!
마라혈식관음이 손에 쥐고 있던 백색의 무기를 혈기로 바꾼 채 손을 모았다.
장대한 혈기가 압축되더니 태양과 같은 광구를 피워냈다. 어마어마한 혈기의 파동이 천지를 뒤덮는다.
백혈교주는 단숨에 결착을 낼 생각인 것 같았다.
“크윽….”
라온이 입술을 덜덜 떨었다. 거대한 혈기에 짓눌려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새로운 검계를 만들 생각을 했더구나.”
글렌은 대기를 찌부러뜨리는 혈기의 광구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차분히 뒤를 돌아보았다.
“예…?”
라온이 잔잔한 글렌의 눈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검에 한계를 두지 않는 것. 좋은 생각이다.”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끝까지 지켜보거라. 네 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그가 담담하게 진천검을 들어 올린다. 새하얗게 물든 혈기의 하늘이 그의 검을 중심으로 붉은빛을 토해낸다.
“천의무봉 천검.”
천지가 단 한 자루 검에 의해 갈라진다. 도화지에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 듯 새하얀 세계가 적광으로 번져간다.
혈기의 광구도, 마라혈식관음도, 백혈교주마저 하늘의 검이 세운 규율 아래 무릎을 꿇었다.
콰르르르릉!
고고한 적광 뒤를 따르는 건 웅대한 천둥소리였다.
라온은 황혼으로 물드는 하얀 세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달라.’
내가 성장했기에 알 수 있다. 라스의 말대로 글렌의 검은 한층 더 높은 수준에 올라서 있었다.
“가지.”
글렌이 진천검을 내리며 등을 돌렸다.
“백혈교주는….”
라온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눈앞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처먹은 게 너무 많더구나. 배를 터트렸어도 살아 있어.”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글렌에게 듣는 농담이 처음이었기에 상황이 상황임에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터어엉!
글렌은 돌아가자는 눈짓을 보낸 후 먼저 태화보를 밟았다.
“태화보를 대성했다면 백혈교주에게서도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다.”
그는 처음 태화보를 가르칠 때처럼 정확하면서도 현묘한 흐름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금도 내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 같았다.
글렌의 걸음을 뇌리에 새기며 달리고 있을 때 좁아지는 혈령통로 앞에 선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보였다.
셰릴과 로엔은 끝없이 밀려오는 혈귀들을 막고 있었고, 리메르는 쪼그라드는 혈령통로를 가루누아의 바람과 뇌기로 잡아두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죽는 줄 알았다고!”
리메르가 혈령통로를 부여잡은 채 빽 소리를 질렀다.
“망할 사도 놈들 다 여기 있잖아!”
“이게 어디다 대고!”
셰릴이 사도로 보이는 자의 공세를 막아낸 후 리메르를 걷어찼다.
“허허허.”
로엔은 인자한 웃음을 흘리면서 누구보다도 살기 짙은 검격을 쏘아냈다. 그의 칼날에 닿은 혈귀들이 오래된 장작처럼 쪼개졌다.
파지지지직!
글렌이 혈령통로에 손을 얹자, 뇌기가 번쩍이면 통로가 길게 찢어졌다. 다만 수명이 한계에 달한 듯 백색 물결이 거칠게 흔들렸다.
쿠와아아아앙!
천검을 얻어맞고 도망쳤던 백혈교주가 거대한 포효와 함께 쇄도해오는 게 느껴졌다.
“먼저 가거라.”
“예.”
라온이 혈령통로로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도망치는 것이냐!”
백혈교주는 하얀 피로 범벅이 된 채 달려온다. 글렌의 말대로 죽지는 않았지만, 오그람의 피를 마셔서 얻었던 혈기의 상당 부분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살을 떨리게 만드는 분노가 느껴졌다.
‘저쪽이 1사도인가.’
백혈교주의 우측에서 움직이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보인다. 그 역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만, 아리스에 맞먹는 강대한 기파가 느껴졌다.
‘그럼 저게… 음?’
라온이 마지막으로 백혈교주의 좌측에 붙어 있는 구릿빛 피부의 여성을 살피다가 눈을 부릅떴다.
‘뭐야. 저건….’
여성의 기파는 마스터에서 초월자까지 제멋대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어떻게 되먹은 무력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라온! 안 가고 뭐 해!”
리메르가 빨리 가라면서 라온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 예.”
라온은 하얀 벽에 진혼검으로 검흔을 새겨 놓고서 혈령통로에 들어갔다.
파지지직!
작은 뇌전이 몇 번 번쩍이자, 혈령통로에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치란 부족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리메르와 셰릴, 로엔도 차례로 혈령통로를 벗어나 땅에 발을 디뎠다.
“가주님은?”
라온이 되물으려고 할 때 혈령통로가 크게 출렁이고서 글렌이 걸어 나왔다. 통로는 그가 나오자마자, 쪼그라들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흠….”
글렌이 가늘게 떨리는 손을 털어낸 후 진천검을 집어넣었다. 백혈교의 본부가 아니라, 해변가에서 놀다가 모래를 터는 듯한 모습에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가주님. 괜찮으십….”
라온이 글렌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쿠우우웅!
반쯤 타버린 담벼락이 부서지고, 야수연맹의 전사와 주술사들이 돌진해왔다. 맹주를 잃은 전사들의 눈동자에는 푸른 귀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지키고 있기를 잘했군. 범인은 다시 현장에 나타나는 법… 어?”
전사들의 뒤에 서 있던 문사 차림의 청년이 글렌을 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머, 멈춰라! 당장 멈춰!”
그의 지시에 글렌에게 달려들던 야수연맹의 전사들이 굳어버린 듯 멈춰 섰다.
“뇌신을 뵙습니다!”
문사 차림의 청년이 땅을 접은 듯 달려와 글렌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로군. 부맹주.”
글렌이 문사 차림의 청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문사 차림의 청년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 사람이 야수연맹의 부맹주인가.’
야수연맹의 부맹주는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맹주 대신 연맹의 일을 모두 처리하는 지낭이라고 들었다.
듣던 대로 연맹 사람들과 달리 똑 부러지는 외모의 남성이었다.
다만 차분하고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에게서도 야수연맹 특유의 강인한 투지가 느껴졌다.
“가주님께서 왜 이곳에….”
“짐승 놈이 모기에게 당했다고 해서 와보았네.”
글렌이 그 말을 하며 라온의 등에 업혀 있는 오그람을 가리켰다.
“매, 맹주님!”
“맹주!”
부맹주가 다급히 라온에게 다가가서 오그람을 받았다. 전사들과 주술사들 역시 오그람에게 달려들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맹주님을 본부로 모셔라! 당장!”
“예!”
전사들은 오그람을 신줏단지 대하듯 조심스럽게 업고, 본부를 향해 달려갔다.
“어, 어떻게 맹주님을 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부맹주는 글렌에게 무릎을 꿇은 채 입술을 떨었다.
“그런 인사는 내가 아니라….”
글렌이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서 라온을 가리켰다.
“저쪽에 하게.”
“예?”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 멧돼지 같은 놈을 찾지도 못했을 테니까.”
“아!”
라온을 바라보는 부맹주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 * *
야수연맹 본부.
“은인을 뵙습니다!”
부맹주와 본부에 있던 전사, 주술사들이 라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맹주님을 구해주신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라온이 어떻게 오그람을 구했는지 듣고서 더욱 감격하여 무릎까지 꿇었다.
“저도 맹주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라온이 붉어진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 은혜를 갚았을 뿐이니,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가로나의 말을 듣고, 진정한 전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십니다. 이 벨러튼 감복했습니다!”
부맹주는 전사의 인사로도 모자란 듯 아예 머리를 땅에 박았다.
“에헤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리메르가 라온의 어깨를 잡으며 씩 웃었다.
“그래도 성의를 보인다면 받아줄 의향은 조금은 있거든. 일단 금….”
“닥쳐.”
그가 손가락으로 동그란 원을 그리려고 할 때 셰릴이 그 손을 꺾어버렸다.
“아아아악!”
리메르가 꺾인 팔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너 때문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망가지니까. 이야기 끝날 때까지는 숨도 쉬지 마.”
“그러면 주, 죽는데?”
“죽으라고.”
셰릴은 그 말을 하며 리메르의 목젖을 후려쳤다.
“허허허.”
“케헥! 웃지만 말고 말리라고요!”
“허허허!”
리메르가 도와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로엔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부맹주를 바라보았다.
“가주님과 천검대주님 그리고 로엔 님이 계셨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야. 난 왜 빼!”
리메르가 본인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거기다 저 역시 맹주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위기에서 구해주셨고, 무학도 전수해주셨죠.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맹주님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말 그대로 포기였습니다.”
부맹주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하지만 라온 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맹주님의 흔적을 찾아서 백혈교 본부까지 다녀오셨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감사드린다는 말뿐입니다.”
그가 재차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외모와 달리 맹주만큼이나 야수연맹에 걸맞은 성격인 것 같았다.
“커흠!”
글렌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말로 끝낼 생각도 없습니다. 저희 연맹에서는 라온 님이 원하시는….”
“혀, 형제!”
부맹주가 글렌 때문에 끊어진 말을 이어서 하려고 할 때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열리고 가로나가 들어왔다.
부상이 심한지 전신에 피가 맺힌 붕대를 감고 있었다.
“네가! 네가 스승님을 구해왔다고 들었다! 고맙다! 형제!”
그는 붉어진 눈으로 다가와 라온을 꽉 끌어안았다.
“…너도 고생했어.”
라온은 떨리는 가로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직도 부어있는 상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가 느껴졌다.
“크허험!”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가린 손목을 떨었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일로 글렌과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멀리 떠나간 느낌이었다.
‘정말 뭐지….’
* * *
라온이 조금씩 밝아지는 새벽하늘을 올려보며 픽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힘드네.’
야수연맹의 전사와 주술사들이 모조리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특히 목소리들이 너무 커서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다만….’
기분은 좋네.
감사의 인사나 칭찬보다,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오그람을 살려서 데리고 왔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라온이 가슴에 차오른 충만함을 느끼고 있을 때 뒤편에서 글렌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뒤를 돌아서 고개를 숙이려는데, 글렌이 손을 휘휘 저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내상을 입었지만, 심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가벼운 내상은 아니었지만, 글렌이 걱정할까 봐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글렌은 그 생각을 읽은 듯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옆으로 다가와 시선을 들었다.
“오그람을 구하기는 했지만, 이미 무너진 균형은 되돌릴 수 없다.”
그는 은은한 보라빛을 띤 새벽하늘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백혈교주는 단순히 오러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무인의 생기와 무력 자체를 흡수한다. 오그람이 깨어난다고 해도 본래의 실력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글렌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생사결.”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부왕과의 생사결은 이제 터지기 직전의 화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네가 이기더라도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다른 오마가 끼어들 가능성도 있지.”
그는 다른 것보다도 내 생사결을 먼저 생각한 듯 목소리에 조급함을 담고 있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생각했던 일이었기에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글렌은 본인이 지시를 내리기보다 먼저 라온의 의사를 알고 싶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라온은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