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697
제697화
“날짜를 미루는 게 아니라, 당긴다고?”
리메르가 라온의 평온한 눈동자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예. 보통 위험한 일이 터지면 일정을 미루지, 당긴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라온이 당황한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노리고 12월 31일에 생사결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쪽지에 12월 31일이라는 일정을 적었다.
“하긴 그렇지….”
리메르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헛바람을 흘렸다.
“가주님도, 오그람 님도, 체임버 님도 다 미루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는 일정을 당기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그 장소와 일시에는 오직 지그하르트와 남북맹 무인만 올 수 있게 비밀을 엄수하라고 할 겁니다.”
“그래. 그러면 죽음의 기운을 쓰는 놈도 올 수 없겠지.”
리메르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시원하게 손뼉을 쳤다.
“너 진짜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구나.”
“아뇨. 올 겁니다.”
라온은 가라앉은 태양이 만들어낸 보랏빛 하늘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부왕 로만은 배신하지 않겠지만, 남북맹 내부에는 분명 데루스의 세작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이 정보는 결국 무조건 풀릴 수밖에 없다.
‘놈은 무조건 와.’
데루스는 이전에도 나와 글렌을 위험인물로 생각했겠지만, 오늘 육황회의를 치르며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으로 점 찍었을 것이다.
‘오그람 님을 구해냈으니까.’
나는 백혈교까지 쫓아가서 오그람을 구해낸 것으로 모자라서 시비를 걸어오는 귀찮은 존재로, 글렌은 죽음의 기운을 무력화시키는 위험한 존재로 생각할 테니, 놈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둘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놈이 나와 가주님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는….’
이번 생사결이겠지.
데루스 로베르트라면 내가 이기든, 부왕이 이기든 상관없이 생사결이 끝나자마자, 그림자를 투입해 난전을 일으킬 것이다.
생사결에서 이긴 승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닐 테니, 기습당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정정당당한 대결이 무너진 순간 지그하르트와 남북맹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 테고, 글렌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데루스는 지그하르트와 남북맹의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글렌을 기습할 게 분명했다.
“죽음의 기운을 쓰는 놈이 온다는 걸 알면서 생사결을 계속할 셈이야?”
리메르가 미간을 구긴 채 다가왔다.
“그놈은 위험해! 그 자존심 강한 야왕이 일대일로 질 수도 있었다고 말했잖아!”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 라온의 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대비를 해야죠.”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가 올 가능성은 9할이 넘으니, 놈이 온다고 생각하고 대비를 해두어야 했다.
“대비? 어떻게?”
“일단 부왕에게 보낼 편지 좀 적구요.”
장소와 요구사항까지 모두 적은 쪽지를 청비응의 다리에 묶어주었다.
“다 됐으니, 네 주인에게 돌아가라.”
청비응은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서 거뭇해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대륙 최강의 검을 한번 빌려보려고 합니다.”
라온은 푸른 섬광이 된 듯 남쪽으로 내려가는 청비응을 보며 제천검의 검병을 말아 쥐었다.
“금패를 모두 바쳐서라도.”
* * *
라온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다시 알현실로 찾아가 글렌에게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되었다.”
고개를 숙이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저었다. 그는 하루에 두 번이나 인사할 필요 없다며 일어나라고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조금 전 부왕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부왕에게?”
“예. 청비응이라는 영물을 보냈더군요.”
“무어라 적혀 있었지?”
“어디서든, 어느 때에서든 싸워줄 테니, 도망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온은 연무장에서 리메르에게 했던 말을 글렌에게도 똑같이 말해주었다.
“12월 31일이라….”
글렌이 턱을 매만지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생각 잘 했는데?”
셰릴이 날짜를 당기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해서는 그날 생사결이 일어나는 걸 모를 거야!”
“허허허, 확실히 일정이 빨라진다는 예측은 쉽지 않지요.”
로엔도 미루는 것보다 당기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아니.”
글렌은 셰릴, 로엔과 달리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그람의 움직임과 성향을 파악한 놈이다. 라온의 계책이 분명 특색은 있다만 간파당할 가능성이 높아.”
그는 이 짧은 순간에 죽음의 기운을 사용하는 검사의 움직임을 예측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맞습니다.”
라온이 글렌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 생사결은 놈을 유혹할 수 있는 최고의 패가 될 겁니다.”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서 지금까지 받았던 금패와 은패를 모조리 꺼냈다.
“제가 미끼가 될 테니, 그놈을 잡아주십시오.”
라온이 금패와 은패를 글렌에게 밀어내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건 기회야.’
글렌이 나서준다면 데루스가 나를 노리듯 나도 데루스를 노릴 수 있다.
최소한 데루스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 하나는 확실하게 새겨두어야 한다.
“라, 라온!”
“라온 도련님?”
셰릴과 로엔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헛바람을 흘렸다.
“아하하하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리메르가 머리를 쓸어 올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최강의 검을 빌린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역시 우리 가문 최고의 미친놈이라니까!”
그는 실망시키질 않는다며 박수까지 쳤다.
라온은 반짝거리는 금패와 은패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어차피 지금은 쓸모없는 것들이야.’
생사결에서 이긴다면 금패와 상관없이 실비아를 직계로 올릴 수 있다.
이 패들은 지금의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나는 용병이 아니다.”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얼음장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크윽….”
라온이 그 섬뜩한 안광을 마주하며 턱을 떨었다.
‘안 되는 건가?’
요즘 글렌과의 관계가 나름 가까워졌고, 그가 오그람에 당한 것에 분노해서 먹힐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주님을 산다는 게 아니라….”
“허나.”
글렌이 손가락을 한번 까딱이자, 밖으로 꺼내두었던 금패들이 다시 아공간 주머니로 들어갔다.
“가문의 일원을 건드리고, 맹우의 결투에 끼어든 쓰레기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지.”
그가 고고한 눈빛으로 턱을 끄덕였다.
“네 계획을 말해보아라.”
라온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말아쥔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 * *
다음날.
라온은 이른 새벽에 5연무장으로 나왔다.
기본 검술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수련에 집중하려고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들어왔다.
“역시 와 있었네. 저 배신자!”
마르타가 라온을 보며 미간을 깊게 구겼다.
“배신자?”
라온이 배신자라는 말을 되뇌이며 눈을 끔벅였다.
“우리 놔두고 너 혼자서 백혈교에 쳐들어갔다고 배신자란다.”
버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라온이 입술을 삐죽 내민 마르타를 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타는 그럴 수 있지.’
마르타에게 백혈교는 원수 그 자체다. 백혈교주까지 관여되어 있기에 그녀는 이번 일에 참여하지 못한 걸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리고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마르타가 함께 갔으면 정말 위험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미안해. 하지만….”
“사과하지 마! 나도 알고 있으니까!”
마르타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백혈교주와 닮았지만, 닮지 않은 흑안이 굳건한 빛을 휘감았다.
“내가 약해서 못 간 거잖아.”
그녀가 입술을 깊게 씹었다.
“너한테 뭐라고 할 생각 없어. 배신자.”
“이미 배신자라고 하고 있는….”
“강해질 거야. 누구보다도 강해져서 다 때려 부수고 엄마를 구해올 거야.”
“…….”
라온은 분노를 누르고, 성장을 말하는 마르타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달라졌군.’
성질이 난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망아지는 더 이상 없다. 마르타는 감정을 감춘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지그하르트의 검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나는 물어보고 싶어. 백혈교주는. 아니, 엄마의 몸은 괜찮아?”
마르타는 백혈교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게 무섭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직은 괜찮아 보였어.”
라온은 산발이 된 머리로 끝까지 따라붙었던 백혈교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
마르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엄마의 몸이 무사한 것과 백혈교주도 멀쩡한 이질적인 가치 사이에서 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라온이 격해무의 기운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희 어머니를 구할 길이 생겼어.”
“뭐…?”
마르타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격해무라는 무학이 있는데….”
오그람은 격해무가 단순히 오러를 꿰뚫는 무학이 아니라, 영혼에도 충격을 줄 수 있는 초월적인 무학임을 말해주었다.
내가 격해무의 극한에 닿는다면 마르타 엄마의 육체는 그대로 둔 채 백혈교주의 영혼만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르타에게 전해주었다.
“전에 말했지. 네 어머니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라온이 마르타의 떨리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약속 꼭 지킨다.”
“…….”
마르타가 황급히 등을 돌렸다.
“고맙다. 그으….”
그녀는 고맙다는 말 외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실비아와 별관의 식구들을 통해서 가족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기에 말없이 어깨를 잡아주었다.
“하아아….”
마르타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등을 돌렸다.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숙인 후 바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르타?”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네가 격해무를 펼치는 동안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 실력을 쌓아놔야지.”
그녀는 다음에는 무조건 따라갈 거라면서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나도 갈 거야.”
루난은 드물게도 진중한 눈빛으로 마르타의 옆에 서서 검을 내리쳤다.
시리아의 일이 있었기에 그녀도 마르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훈련생 시절부터 느꼈는데, 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놈이야.”
버렌이 라온을 바라보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흔히 영웅이라 불리는 기질이지.”
“그 시절의 너는 날 싫어했잖아.”
라온이 버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싫어했었지. 하지만 네 신발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신발?”
“생사결 꼭 이겨라. 너는 해줘야 할 일이 많아.”
버렌은 답을 해주지 않은 채 루난의 옆에 가서 검을 뽑아 들었다.
라온은 검술을 연마하는 세 조장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어.’
각자의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던 저 세 사람이 함께 검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라온은 가벼운 미소를 그리고서 버렌과 마르타, 루난의 옆에 서서 제천검을 들었다.
자신의 검과 마음을 세운 네 사람의 등 뒤로 차가운 새벽 공기를 덥히는 태양이 떠올랐다.
* * *
부왕 로만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항상 그의 눈동자를 휘감고 있던 흉폭함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치는 건 저물어가는 태양.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고고한 노을뿐이었다.
“이제야 보이는군.”
1년 동안 이 강가에서 수없이 많은 노을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같은 하늘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깊고도 곧게 펼쳐진 노을은 내 삶을 담아낸 듯이 하늘과 땅을 양분하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창공과 푸른빛의 강, 그리고 그 사이에 차오른 황혼은 수년간 나를 짓눌렀던 상단전의 바위를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부숴주었다.
쿠우우웅!
새롭게 열린 상단전의 영역 속으로 붉은빛을 띤 강물이 차올랐다.
깨달음. 길고 긴 세월을 고뇌하며 채워진 상승의 영역이 뇌리에 육중한 심상을 그려냈다.
로만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한참 후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때 하늘은 꺼뭇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밤을 불러오는 황혼의 빛은 그의 눈동자를 떠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로만이 적룡부를 쥔 채 몸을 일으켰다. 도낏자루에 걸린 용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기류가 타올랐다.
그는 두 손으로 말아쥔 적룡부를 강물을 향해 내리찍었다.
쿠와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나가며 끝없이 흘러내리는 강물이 반으로 뚝 갈라졌다. 물을 멈춰 세우는 게 아니라, 아예 역류시키는 괴이한 힘이었다.
쿠웅!
로만은 만족했다는 듯 진한 미소를 그리며 적룡부를 땅에 박아넣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는 황혼이 깃든 눈동자로 강물 속에서 라온을 찾았다.
“너라면 따라올 수 있겠지?”
* * *
아스라히 쏟아지던 별빛이 가라앉고, 검은 하늘 위로 화상과 같은 홍조가 떠오른다.
“하아….”
호수 위에 서 있던 라온이 낮은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조금 부족했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육체와 정신 모두를 단련했거만 검술도, 검계도, 오러도 완벽한 가닥을 잡아내지 못했다.
시간 부족이 아니라, 수련 자체가 너무 난해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어.’
지닌 무학만으로 새로운 검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글렌과 라스, 오그람의 심득까지 넣으려 했으니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지만.’
부왕과의 생사결은 큰 언덕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데루스 로베르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했다.
스르르릉!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검을 가볍게 꺾어 호수를 내리쳤다.
기본 검술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내려 베기. 하지만 그 여파는 간단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신을 영접한 듯 호수가 부드럽게 갈라진 채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반으로 나뉘었던 호수가 천천히 달라붙더니, 언제 쪼개졌냐는 듯 본래의 잔잔했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갈 수밖에 없지.
생사결이 바로 오늘이다. 이제는 부왕과의 전투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파아앙.
라온은 물기 하나 없는 제천검을 털어낸 후 검집에 넣었다.
어둑했던 북망산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밤을 지우고, 새벽을 여는 여명의 황금빛이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깃들었다.
“라스. 너 안 일어나면….”
라온은 여명을 담아낸 눈빛으로 얼음꽃팔찌를 툭 쳤다.
“맛있는 건 내가 다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