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781
제781화
라온은 헬렌에게 부탁 하나를 한 뒤 페드릭의 저택으로 향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이틀이니라.
라스가 한심하다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젊다 못해서 어린 놈이 왜 그리 체력이 약한 건지 모르겠구나. 본왕이 네놈의 나이일 때는 용암을 이불 삼아서 잠이 들었거늘.
‘아니, 심상의 세계에서는 좀 쉬라며….’
심상의 세계에서 만났을 때는 죽을 수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해놓고, 현실에서는 늦게 일어났다고 화를 낸다. 어처구니가 없는 마왕이었다.
-하, 하루면 알아서 일어나야지! 본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아려올 지경이니라! 켈록!
라스는 음식 냄새만 맡느라 너무 힘들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또 기침하네. 너는 괜찮아?’
-짧게라도 잠을 자서 좀 나아졌느니라. 켈록!
녀석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마른기침을 했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너한테 드는 약 같은 건 없나?’
-흥! 애송이 주제에 본왕을 걱정하는 것이냐? 머리에 피나 말리고 다시 오거… 켈록!
라스는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미간을 구겼다.
‘보상받을 때는 아주 난리를 치면서….’
-그, 그거랑 이거는 다르잖느냐! 본왕의 능력이 네놈의 주둥이에만 들어가는데 좋겠냐고!
녀석은 어쨌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변덕이 심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밥이나 가져와!
‘알겠다. 알겠어.’
라스와 짧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페드릭의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똑똑.
“들어오거라.”
노크를 하니, 저택 안에서 페드릭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페드릭이 보였다.
“라온. 이제야 일어난 모양이구….”
“라온!”
페드릭이 웃으며 손을 흔들 때 진료실 안쪽에서 멀린이 튀어나왔다.
-히이익! 켈록! 이이익! 켈록!
라스는 진심으로 놀란 듯 비명과 기침을 연달아 뿜어냈다.
“잘 잤어? 내가 너 업어서 별관까지 데리고 갔는데!”
멀린은 기억 안 나냐는 듯 손을 까딱였다.
“뒤에서 할아버님이 눈매를 부리부리하게 뜬 채 계속 따라오시더라고. 스토커인 줄 알았다니까!”
그녀는 간 크게도 글렌을 농담 대상으로 삼은 채 키득거렸다.
“가주님이? 아니, 그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라온도 멀린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어머님이랑 아버님, 할아버님이 전부 여기 계시니까. 내가 모셔야지.”
멀린은 당연한 일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호칭을 좀 바꿔야 하지 않나….”
라온이 멀린을 보며 턱을 떨었다. 전쟁 중에는 다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지금까지 저 호칭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정말 감당이 안 되는 여자였다.
“야! 왔으면 얘 좀 치워!”
마르타가 멀린의 뒤편에서 나오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치료하는데, 옆에 와서 자꾸 방해한다고!”
“어머님이랑, 아버님의 붕대는 내가 갈아드리는 게 맞는데?”
멀린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방해라는 거야! 제대로 감지도 못하잖아!”
마르카가 멀린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너는 또 왜 여기에 있는데?”
라온이 얼굴이 붉어진 마르타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환자가 너무 많아서 도와드리고 있었어.”
마르타는 보면 알지 않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도 의술을 배우고 있는 거야?”
“가르치는 대로 아주 쏙쏙 받아들이더구나. 곧 나를 뛰어넘을 것 같아.”
페드릭은 마르타의 재능은 검이 아니라, 의술에 있는 것 같다며 허허 웃었다.
“너 아직도 그때의 일을 생각해서….”
마르타가 의술을 배우게 된 계기는 창염마군에게 습격당한 광풍대가 죽어갈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있지만, 엄마를 구하고 싶어서야.”
마르타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씹었다.
“음….”
“너한테는 꼭 엄마를 구하겠다고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반 이상 포기한 상태였어.”
그녀가 낮은 숨을 내쉬며 피가 묻은 붕대를 내려놓았다.
“아직 마스터에 머물러 있는 내가 초월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는 백혈교주를 이기는 건 절대 무리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마르타가 라온의 눈을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네가 가족들을 구해낸 것을 보고. 아니, 가족 모두가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가 났어.”
그녀는 본인도 엄마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온이 고개를 살짝 내린 채로 웃었다.
아직 모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마르타가 용기를 얻었다고 하니, 자신 역시 시아를 구할 수 있을 거란 의지가 피어났다.
“그날을 위해서 뭐든 다 해볼 거야.”
마르타는 너도 꼭 도와달라고 말하며 강직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래. 끝까지 도와줄게.”
라온은 마르타의 의지를 느끼고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후후.”
페드릭은 라온과 마르타의 대화가 기껍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
멀린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떠는 걸 보면 끼어들고 싶지만, 가족의 이야기였기에 그녀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 같았다.
-크으! 소고기 소녀가 한층 더 성장했구나.
라스는 탄성을 흘리며 마르타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매번 그 소리네.’
-이번에는 진심이니라! 초식동물이 털을 세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발톱을 드러냈으니까!
녀석은 앞으로가 기대된다는 듯 웃었다.
-저런 변화를 이루는 데는 네놈의 역할이 컸겠지.
‘이제는 내 칭찬까지 해주는 거야?
-소고기 소녀는 본왕의 수하니까. 켈록!
라스는 수하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며 기침을 하면서도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그게 맞지. 가족이고, 수하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해.’
라온은 라스의 진심을 되새긴 후 페드릭을 보았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요?”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회복세에 들어갔다.”
페드릭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렸다.
“잠시 봐도 될까요?”
“내가 안내해줄게!”
멀린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서 우측 병실의 문을 열었다.
“후우….”
라온이 낮은 숨을 내쉬고서 병실로 들어갔다.
“내가 계속 살펴드렸어. 붕대도 감아드리고, 약도 먹여드리고. 안마도 해드렸지!”
멀린은 본인을 칭찬해달라는 듯 머리를 살짝 숙인 채 방실거렸다.
“음….”
멀린의 말대로 실비아와 렉타르, 에드가의 혈색이 좋아졌다.
호흡도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어날 것 같았다.
-엄마! 켈록!
라스가 실비아의 이마에 붙은 채로 훌쩍였다.
-요놈이 계속 밥을 안 주고 잠만 자고 있느니라! 엄마가 그립느니라!
녀석은 어서 일어나라고 말하며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정말로.”
라온이 멀린에게 허리를 굽혔다. 전쟁에서의 일, 그리고 그 이후에서의 일 모두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다.
“우리 사이에 왜 머리를 숙여.”
멀린은 일어나라며 허리를 세워준 후 두 손을 꼭 잡았다.
“가족들 앞에서 벌써? 좀 이른 거 아니야?”
그녀는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손은 네가 잡았는데?”
라온이 멀린의 손을 놓고서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시아. 아니, 누나는 어디에 있어?”
이 병실에 있는 건 에드가와 렉타르, 실비아뿐이었고, 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폭주할 가능성도 있어서 할아버님이 막고 계셔.”
멀린은 글렌이 시아를 보호하고 있다며 본관 쪽을 가리켰다.
“멀린. 다시 누나의 심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바로? 힘들 텐데?”
“괜찮아.”
아직 몸과 정신이 찌뿌둥하지만, 무르카의 과거를 보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알겠어.”
멀린은 시간이 필요하니, 먼저 가서 준비해놓겠다며 가주전으로 떠났다.
그녀는 직계들도 무서워하는 알현실 입장을 산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보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놈은 바로 따라가지 않는 것이냐?
‘그 전에 할 일이 있으니까.’
라온은 페드릭의 저택을 나와서 다시 별관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사이에 별관의 식탁에는 헬렌과 시녀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실비아 님을 지키려면 도련님이라도 잘 드셔야해요!”
헬렌은 다행이라고 말하며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들을 자신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허억! 뭐, 뭐냐! 이 음식들은! 켈록!
라스는 이런 일을 생각지도 못한 듯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네가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동안 헬렌에게 부탁했어. 식사를 좀 차려달라고.’
라온이 식탁 앞에 앉으며 손을 저었다.
‘지금은 때가 좀 그러니까. 모두가 깨어나면 네가 좋아하는 요리로 파티라도 열어 줄게.’
-이 정도면 충분히 거하느니라!
라스는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며 헤죽거렸다.
‘그럼 첫 번째는….’
-당연히 파인애플 피자이니라!
녀석은 말해서 무얼 하냐는 듯 파인애플이 한쪽이 통째로 올라간 피자를 가리켰다.
‘아….’
* * *
라온은 알현실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던 글렌과 멀린에게 심상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과 무르카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음, 들어본 적 없는 사건이다. 아니, 너무 많아서 찾기 힘들다고 해야겠지.”
글렌은 조용히 살고 있는 몬스터나, 영물을 잡아서 실적을 올리는 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며 미간을 좁혔다.
“오크 부족 전체가 현기를 지니고 있었다면 고대 종족이겠네.”
멀린이 노파의 가면을 매만지며 낮은 숨을 내뱉었다.
“고대 종족?”
“에덴의 궁극적인 목표. 멸망의 마룡이 지배하던 시기에 살아가던 특별한 이들이야. 인간 이상의 지혜와 무력을 지니고 있었지.”
그녀는 지금은 거의 남지 않았을 거라며 혀를 찼다.
“그 에시안이라는 인간이 다시 숲에 찾아간 이유도 녹색의 왕을 비롯한 오크들이 고대 종족이라는 것을 알고, 큰 실적을 얻으려고 한 걸 거야.”
멀린은 지독한 일이라고 말하며 주먹을 떨었다. 그녀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았다.
-흐윽….
라스가 갑자기 훌쩍이며 고개를 떨궜다.
-본왕은 거기까지는 몰랐는데, 불쌍한 놈이니라!
녀석은 무르카의 분노와 절망에 공감한 듯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니까. 성불을 시켜줘야겠지.’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멀린을 바라보았다.
“다시 들어갈게.”
“응. 알겠어.”
멀린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서 양손에 마나를 응축시켰다.
“괜찮겠느냐?”
글렌이 걱정이 된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타인의 심상에 연달아 들어가는 건 좋지 않을 텐데.”
“지금은 저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깨어나기 전에 누나를 일으켜 세우고 싶으니까요.”
“그래….”
글렌은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안 듯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무리만 하지 말거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멀린을 볼 때 라스가 손을 까딱였다.
-본왕은 이번에 따라가지 않겠느니라.
라스는 배가 부르니 팔찌 속에서 잠이나 자야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에게 할 말도 다 했고.
‘할 말?’
-그런 게 있느니라!
녀석은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하고선 팔찌 속으로 들어갔다.
‘싱겁기는.’
옅게 웃고서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라온이 숨을 한 번 고르고서 멀린이 세워준 푸른 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아아아아악!
글렌과 멀린이 비치던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고 검게 죽어버린 숲이 보인다. 녹색의 왕, 무르카의 심상이었다.
무르카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숲의 중앙에 선 채로 반 토막 난 석검을 들고 있었다.
“왜 다시 온 거지?”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다시 온다고 했잖아.”
라온이 무르카에게 다가가며 제천검을 뽑았다.
쿠구구구구!
무르카는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 석검 위로 진한 투기를 일으켰다.
“대련을 하자.”
라온은 무르카와 달리 정심한 기파를 일으킨 채로 제천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
무르카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내가 속한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대련을 통해서 우애와 실력을 기르지. 살기를 담지 않은 검으로 서로의 검술을 공부하는 수련이다.”
“…….”
무르카는 라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터억.
라온은 당황한 무르카에게 한 발 다가가서 제천검으로 석검의 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검을 맞댔으니, 받아들인 걸로 하겠어.”
옅게 웃으며 무르카의 석검을 거세게 쳐냈다. 쩌어엉 소리가 울리며 무르카의 팔이 날아갈 듯 휘청였다.
“으음!”
무르카가 눈썹을 깊게 내린 채로 석검을 거칠게 휘둘러왔다.
쿠우우웅!
라온은 무르카의 검격을 막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도 인간에게 목줄이 잡혔던 적이 있다.”
“뭐? 너 지금 무슨….”
“너처럼 속은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그자의 손에 내 영혼이 잡혔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어.”
턱을 떠는 무르카에게 자신의 과거를 꺼냈다. 물론 환생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 적당히 각색해서 어린 시절에 겪은 일처럼 말해주었다.
“…그렇게 하분 성을 구해낼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하나하나가 살얼음 길이나 마찬가지였어. 어린 시절의 치기와 날 좋게 봐준 성주님 덕분에 얻은 행운이랄까. 아, 거기서 데리고 온 아이와 선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 그 아이는… 음? 시간이 다 된 모양이네.”
라온이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지는 손을 보며 픽 웃었다.
워낙에 겪었던 일이 많았기에 하분 성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심상의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곧 돌아오지.”
라온은 아직 얼떨떨해하는 무르카에게 손을 흔들고서 심상의 세계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래서….”
무르카가 라온이 사라진 곳을 보며 입술을 깊게 앂었다.
“그 아이가 누구고, 선물은 뭔데….”
* * *
우우우웅!
투구 속에서 솟구친 빛이 사라지고, 라온이 축 늘어졌다.
“끝난 모양이네요.”
멀린이 라온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렇군.”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먼저 시아를 침대에 옮겼다.
“읏차.”
멀린은 그 사이에 라온을 등에 업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라온은 제가 별관에 놔둘….”
“거기까지.”
글렌이 멀린의 앞을 막아선 채로 눈매를 찌푸렸다.
“오늘은 내가 업고 가겠다.”
“네? 왜요?”
“어제는 네가 업었으니, 오늘은 내가 데리고 가는 게 맞지 않느냐.”
그는 거절은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멀린은 안 된다는 듯 라온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저도 이런 때가 아니면 라온 냄새를 못 맡는다구요!”
“냄새는 무슨 냄새!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거라!”
글렌이 절대 안 된다고 말하며 손을 까딱이자, 어느새 멀린의 등에 업혀 있던 라온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할아버님이라고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멀린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며 글렌의 장포에 달라붙었다.
“끄응….”
글렌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멀린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은 게냐.”
“네? 할아버님을 왜 무서워해요?”
멀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대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고, 할아버님이라 부르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험하게 쳐내고 싶지만, 라온과 시아의 은인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게 답답했다.
“다 됐고! 오늘은 내가 데리고 갈 것이다!”
글렌은 그 말을 남기고서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안 돼요!”
멀린이 고개를 저으며 손뼉을 치자, 글렌의 손에 잡혀 있던 라온이 다시 멀린의 등으로 돌아갔다.
“먼저 갈게요!”
“어딜!”
글렌이 다시 손을 뻗자, 라온이 쑥 흘러나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는 멀린에게 농락당하지 않겠다는 듯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으으!”
멀린이 악을 지르며 글렌의 뒤를 따라붙었다.
“할아버님이라고 해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두 사람은 술래잡기를 하며 사이좋게 별관까지 이동했다.
* * *
라온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알현실을 찾아가서 무르카의 심상으로 들어갔다.
그와 대련을 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그렇게 에덴의 귀신들을 물리치고, 넝마의 성자님을 구해낼 수 있었지. 어린 시절의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 에덴이라는 놈들은 끼지 않는 곳이 없구나.”
“내가 임무 수행 중에 에덴에 납치된 적이 있었는데,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가주님과 다른 사람들이 와서 구해주셨지.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인연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느끼게 된 날이었으니까.”
“인연은 우리 부족에서도 귀히 여기는 가치다. 널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도와주었다니, 가문은 부족과도 같은 거로군.”
“이번에 우리가 싸웠던 아리안 가문은 본래 죽음의 늪이라 불리는 공간이었어. 에덴의 망혼귀라는 놈이 그곳에서….”
“생을 농락하고, 죽은 자를 모욕하는 짓을 그렇게까지 하다니, 영혼조차 소멸시켜야 할 놈이구나. 네가 처리해서 다행이다.”
처음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던 무르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기뻐해 주고, 놀라주고, 당황도 해주었다.
그도 대련과 함께 하는 이야기에 흠뻑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이번에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어.”
라온이 탁한 숨과 함께 검을 내렸다.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끝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말해주었다.
이제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로군.”
무르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석검을 땅으로 내렸다.
“내 선조가 그러했듯 나는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너 같은 인간과.”
회백색 하늘을 올려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라온에게 떨어졌다.
“그게 이제야 이루어진 것 같구나. 마지막이라고 해도 기쁘기 그지없어.”
무르카는 투지가 아닌, 따스함이 담긴 눈동자로 웃음을 그려냈다.
“너….”
“내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세운 맹약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 그리고 마음이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석검을 역수로 잡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온이 무르카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고맙구나.”
무르카는 더 진한 미소를 그리고서 부러진 석검으로 본인의 가슴을 찔렀다.
퍼어어억!
석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무르카!”
“내가 세운 맹약이다. 내가 이곳에서 타인에게 죽는다면 시아라는 아이는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 악귀 같은 놈들에게 살인 기계로 이용당하느니,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무르카는 입가에서 검은 피를 토하면서 본인이 세운 맹약을 이야기해주었다.
“허나 네가 있다면 다르겠지. 나는 너를 믿고, 그 아이를 다시 살리고 싶다.”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심장을 찌르고 있는 석검을 뽑았다.
푸카아아악!
인간과 다르지 않은 붉은 피가 뿜어져 검게 죽은 숲을 적셨다.
“대체 왜…?”
라온이 무르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에게 속았는데, 왜 인간을 보호해준 거지?”
인간에게 당했던 무르카가 맹약을 걸고 시아를 보호해줬다는 게 믿어 지지가 않았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짐승이 깨문다고 나까지 짐승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무르카는 오크의 모습으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말을 하며 웃었다.
“이 아이의 눈을 통해 네 삶을 끝까지 지켜보겠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른 오크들과 함께 검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후우우욱!
무르카가 끝까지 밟고 있던 땅속에서 연한 빛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