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790
제790화
“희극제가 왔다고?”
라온이 쩝쩝거리는 도리안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렇다니까요! 조금 전에 정문 앞에 도착했다고 들었어요!”
도리안은 밖에 있는 검사들이 전부 희극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빵부터 처리해.”
라온이 도리안의 턱에 매달려 있는 빵조각을 가리켰다.
“아, 넵!”
도리안이 헤헤 웃으면서 얼굴에 묻어 있던 빵조각들을 모두 입 안에 넣었다.
-무슨 빵인지 몰라도 맛나 보이는구나….
라스는 빵이 고프다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본왕에게도 빵을 가져오거라! 허기가 져서 머리가 팽팽 도느니라! 켈록!
‘나딘빵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좋다면….’
-돼, 됐느니라! 본왕은 저녁까지 입을 다물고 있겠느니라!
녀석은 사양하겠다고 외치며 얼음꽃 팔찌 속으로 도망쳤다.
“희극제 혼자서 온 거야?”
라온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도리안을 보았다.
“아뇨. 이번에는 수하들이랑 함께 왔다고 하더라구요.”
도리안은 예전처럼 대놓고 혼자 온 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께 알현을 신청한 이유는?”
“그건 저도 모르죠.”
그는 희극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왔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외총관님이 가주전에 연락을 보냈으니, 곧 들어올 것 같아요.”
도리안은 정문 쪽을 가리키며 나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신주오령과 사소한 문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적도 아니었기에 방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희극제라….”
렉타르가 턱을 매만지며 지그하르트의 정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 기연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는 이미 희극제의 기운을 느낀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기연이라고 하신다면 설마….”
라온이 렉타르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단기간에 성장한 것을 보니, 큰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다.”
렉타르는 희극제의 기운이 몰라보게 강해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자가 그렇게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초월이라는 영역은 신비롭다. 10년 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10초 만에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도 있지.”
그는 너무나도 불공평한 세계라고 말하며 가느다란 웃음을 그렸다.
“헌데 희극제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신주오령의 몸값이 얼마인지 알아보기 위해서겠죠.”
라온이 검병에 손을 얹은 채 눈썹을 내렸다.
희극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왜 왔는지는 알 수 있었다.
“현재 대륙 전역에서 오황과 오마가 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황오마를 따르는 중소 세력들 사이에서도 전쟁이 터지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렉타르를 따라 지그하르트의 정문 쪽을 보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초월자와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하는 신주오령의 가치는 굉장히 큽니다. 신주오령이 어느 쪽 편을 드냐에 따라서 전쟁의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죠.”
“그렇겠지.”
렉타르가 공감한다는 듯 턱을 주억였다.
“거기다 신주오령은 성검련주의 습격에 의해서 명성과 세력을 크게 잃었습니다. 본인들의 체급을 키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요.”
“이미 다 읽은 모양이구나.”
그는 손자가 대견하다는 듯 잔잔한 웃음을 그렸다.
“뻔하니까요.”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희극제 아리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기에 그녀의 심리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 상황상 희극제의 제안이 너무 버거운 것만 아니면 들어주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라온이 렉타르를 바라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번 일로 상황이 바뀌었죠. 지그하르트와 성검련이 맞닿아 있는 건 그 누구도 모르니까.”
희극제는 오황과 오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본인들의 몸값을 높이려 들 것이고, 원래라면 그 거래에 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검련주인 렉타르가 자신의 친할아버지고, 이름만 오마에 속해 있는 상태였기에 그녀의 계획은 허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
렉타르도 상황이 재밌다고 생각한 듯 픽 웃었다.
“물론 여기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꺼내서는 안 돼요. 아마 가문 내에서도 함구령이 내려질 테고.”
라온이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외부에 아는 사람도 없죠.”
드래곤 로드는 마기를 사용하던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렉타르를 보지 않았고, 타천은 목이 베여서 죽었다.
만약 놈이 살아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테니, 한동안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네 계획에 따라주려면 나도 기척을 감춰야겠구나.”
렉타르가 입맛을 다시며 존재감을 급격히 가라앉혔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렉타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 아니더냐. 그리고….”
렉타르가 라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다.
“가족끼리 감사하다는 말은 쓸 필요 없다.”
그는 익숙해지라는 듯 웃었다.
“예….”
“아, 성검련에 가기 전에 부탁하고 싶다는 건 무엇이냐.”
렉타르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건 희극제가 돌아간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거라.”
그는 별관에서 보자고 말하며 연무장을 떠났다.
“와아….”
도리안이 렉타르의 뒷모습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대주님의 할아버지들은 다 멋지시네요.”
“그렇지.”
라온은 그 말에 적극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분들이야.”
언젠가 글렌과 렉타르의 무력을 따라잡더라도 두 사람의 신념과 의지는 절대 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쿠구구구구!
다시는 무너지지 않겠다는 듯 더 두터워진 지그하르트의 정문이 열리고, 외총관 일리운이 걸어 나왔다.
“지그하르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리운은 손님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지시를 받은 듯 말을 높이며 고개를 숙였다.
“맞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극제 아리엘이 옅은 미소와 함께 허리를 굽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외성의 무인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커흠!”
일리운이 오러를 담아 헛기침을 터트리자, 눈이 흐려졌던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곧게 폈다.
“손님께 무례를 범했군요.”
“괜찮아요.”
아리엘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따라오시지요. 본관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수하들과 함께 일리운의 뒤를 쫓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네요.”
아리엘은 녹음이 무성한 지그하르트 내부를 둘러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아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리운은 칭찬을 들었음에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리엘이 일리운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본관 근처에 도착했을 때 우측에 있던 키가 큰 검사가 눈에 들어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신에게 두 번이나 망신을 주었던 능구렁이 같은 꼬마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고귀한 외모는 여전했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벌써 그랜드 마스터의 극에 올랐다고?’
초월을 눈앞에 둔 한계는 아니었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극에 오른 건 확실해 보였다.
‘말도 안 돼….’
하늘이 내린 재능 소리를 듣던 자신도 저 나이에는 마스터에 불과했다. 라온의 무학적 재능에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그림이 생각나는군.’
큰마음을 먹고 라온의 천기를 그렸을 때 악마 같은 그림이 새겨졌던 것이 떠올랐다.
이해를 벗어난 공포에 바로 책을 덮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진정으로 라온의 무서운 점은 검이 아니라, 심계와 혓바닥이다.
두 번이나 당했기에 오늘만큼은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광풍대주님.”
희극제가 라온을 바라보며 반가운 미소를 그렸다.
“네.”
라온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만 까딱였다.
속에서 짜증이 돋아났지만, 꾹 참은 채 웃음을 유지했다.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네.”
그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이번에도 단답을 꺼냈다.
“전 가주님을 뵈어야 해서, 다음에 또 봬요.”
“…….”
라온은 이제 답도 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건방짐의 극치를 보이는 꼬맹이였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단다.’
희극제는 라온의 시건방진 모습을 보고서도 미소를 유지했다.
두 번이나 당하고서 또 저놈의 심계에 넘어간다면 백경의 수장이 될 자격이 없었다.
“가시죠.”
희극제는 부드러운 안색을 유지한 채로 조금 떨어져 있는 일리운에게 다가갔다.
“아, 예.”
일리운은 본인이 더 당황한 듯 눈동자를 끔벅이다가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래….’
아리엘이 차분히 호흡을 내쉬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 정도에 반응해서는 안 되지.’
라온에게 당한 게 많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이 아려왔지만, 미리 대비해둔 덕분에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지그하르트의 본관이 눈앞에 있었다.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리운은 고급스러운 손님방에 안내해준 뒤 밖으로 나갔다.
“하아….”
수검단주 사칸이 의자에 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북쪽의 맹주가 아니더군요. 하나같이 사자와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다니….”
“그중에서도 아까 본 라온 지그하르트가 발군이었어. 외모도 외모지만, 가늘게 풍겨오는 기세가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고.”
마장단주 베리올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진짜 무기는 기세나 검이 아니라, 혓바닥이야.”
아리엘은 소리가 방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기막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놈의 심계에 넘어가지 마. 그냥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도록.”
“과묵하던데요?”
베리올은 오히려 말이 적었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묵한 척을 하는 거야. 놈의 뱃속에는 능구렁이가 셀 수 없이 들어가 있으니까.”
아리엘은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며 입술을 씹었다.
“헌데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릴지 모르겠네요. 지그하르트에 들어오니까 살이 떨려서….”
“풀릴 수밖에 없어.”
그녀가 긴 다리를 꼬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오황 전체가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싸움이 나고 있으니 지원을 보낼 수가 없지. 반면 오마는 인외의 병력을 만들 수 있으니, 한쪽의 손해가 누적될 수밖에.”
아리엘은 상대의 패가 보이는 도박판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즉,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거래란 말이지.”
그녀는 이미 승리한 듯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방심해서는 안 돼. 너희도 계속 머리를 굴리도록.”
“예!”
아리엘이 수하들에게 주의할 점을 강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들어오라고 말을 하자, 인자한 웃음을 지닌 노집사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살왕이라는 이명을 지녔던 암살자, 로엔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로엔은 조심스러운 예를 갖추며 밖을 가리켰다.
“알현실로 가시지요.”
“알겠습니다.”
아리엘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 로엔을 따라 알현실의 앞에 섰다.
쿠구구구구!
로엔의 가벼운 손짓에 알현실의 묵직한 문이 열리고, 피처럼 붉은 카펫과 산처럼 솟구친 단상이 보였다.
단상에 세워진 금빛 옥좌 위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듯한 글렌이 앉아 있었고, 그 양옆에는 지그하르트의 간부들이 뒷짐을 진 채로 서늘한 기파를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라온 지그하르트 역시 우측 기둥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엘이 라온을 보며 픽 웃었다.
‘이래서 그런 반응이었나?’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이곳에서 만나기에 먼저 시비를 걸려고 했던 것 같았다.
여전히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지만, 오늘은 그때와 달랐다. 아쉬운 쪽은 자신이나 신주오령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와 오황이니까.
“북쪽의 하늘을 뵙습니다.”
아리엘은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눈빛이 속마음과 달리 진중한 색으로 반짝였다.
“일어나시오.”
글렌은 과한 인사는 필요 없다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엘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서 글렌을 바라보았다.
“적도 아닌데, 환대하지 못할 게 없지. 그래서….”
글렌이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아리엘을 굽어보았다.
“무얼 바라고 온 것이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새빨간 눈동자를 번뜩였다.
“바란다라….”
아리엘이 입매를 가늘게 말아 올렸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이렇게 대놓고 목적을 물어오다니, 지그하르트의 정점에 선 수장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아리엘이 앞에 모아두었던 두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가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대륙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비등했지만, 점차 한쪽이 밀리고 있지요.”
오황이 열세라는 말에도 글렌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변화도 없었다.
“지그하르트 측에서도 꽤 큰 피해를 입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봉신가문 역시 마찬가지고.”
아리엘이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글렌이 이 이상은 듣기 불편하다는 듯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황은 강하죠. 하지만 오마를 상대로 대륙 전역을 살필 정도로 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아리엘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시작할 때였다.
“저희 신주오령의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이지적인 빛무리가 깃들었다.
“원하는 것은?”
글렌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받을 수 밖에 없겠지.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최근 아리안 가문이 폭삭 망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철전대와 몇몇 무력대 역시 부상자가 많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금전적인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한 명의 무인이기에 그런 것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더군요.”
아리엘은 스스로를 드높일 수 있는 말을 하며 옅게 웃었다.
“제가. 아니, 저희 신주오령이 원하는 건 세력권의 인정입니다. 지금 보유하는 땅만이 아니라, 지원을 나가는 곳에서도 저희의 세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거야말로 큰 보상이지.
세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을 얻으려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죽거나, 위험한 상황에 도움을 준다면 사람들은 그 구원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따르는 게 당연한 일. 몇 가지 정보 조작을 한다면 그 지역 전체의 호감을 사서 오황을 벗어나게 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오황에 뒤지지 않는 지배력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흠….”
글렌은 고민을 하는 듯 턱을 괸 채로 눈매를 좁혔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리엘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새까만 시선을 드러냈다.
“오마 쪽이 먼저 큰 제안을 보내왔지만, 저는 그걸 받지 않고 가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 말을 하며 두 손을 다시 앞으로 모았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지.’
자신들이 오마에 간다면 오황오마의 균형이 크게 무너지게 된다.
지그하르트로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아줌마. 여전히 욕심이 과하네.”
아리엘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때 뒤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털리고도 배운 게 없나본데요?”
라온 지그하르트다. 놈은 한심하다는 듯 턱을 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판때기에서 털릴 때와 비슷해. 전재산을 날리기 직전의 모습이지.”
리메르가 딱 그 표정이라며 낄낄 웃었다.
“하….”
아리엘이 일그러지는 표정을 억지로 지운 채로 등을 돌렸다.
“광풍대주께서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나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와서 제대로 해보시죠.”
라온은 언제나 저런 조롱 섞인 방식으로 공격을 해서 심리를 헤집었다. 이번에는 당할 생각이 없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말해드리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모로 튼 채로 아리엘을 굽어보았다.
“당신은 이 전쟁이 신주오령의 손에 달린 듯 말했지만, 댁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뿐이야.”
그의 눈동자 위로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홍색의 불길이 타올랐다.
“따르든가, 죽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