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811
제811화
고오오오!
라온은 손아귀에 분노를 끌어모은 후 시선을 내렸다. 이곳에서 결투를 지켜보다가 다르칸이 위험해지면 바로 분노를 터트릴 생각이었다.
-아, 안 되느니라!
라스가 동그란 손으로 라온의 손목을 잡았다.
-저 미치광이한테는 네놈의 혓바닥도 먹히지 않는다고!
‘설득이 안 되어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안 된다니까!
라스가 답답하다며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저 스토커한테는 말이 통하질 않느니라! 네놈을 기절시켜서 마계로 끌고 갈 거라고!
녀석이 러스트에게 시선을 돌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불나방과 말하는 꼴만 봐도 알지 않느냐! 그게 지성을 가진 것들의 대화냐고! 그냥 짐승들이지!
라스는 다르칸과 러스트 같은 이들은 통제가 안 된다며 눈썹을 내렸다.
‘괜찮다니까.’
라온이 삐죽 솟은 라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하긴 네놈도 저 둘에 못지않은 또라이지! 갑자기 꽃을 찾길래 미쳤나 했더니, 정말 돌아버렸느니라!
라스는 선조가 심어놓은 붉은 꽃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음, 그런데 이 꽃. 조금 특이하구나.
녀석이 선조의 꽃을 자세히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엘프보다도 긴 삶을 살고 있어. 자신의 생기를 나누어주고, 다른 생물들의 생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인 것 같구나.
라스는 선조의 꽃이 이 땅의 생기를 정화하고 있다며 입맛을 다셨다.
-이 영물을 어떻게 찾은 것이냐?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심은 거라서.’
라온은 라스에게 답을 해주고서 성검련의 하늘을 올려보았다.
러스트가 뚫고 들어온 결계가 아주 천천히 메워지고 있었다. 그것 역시 이 꽃의 효과 같았다.
‘대체 그 사람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거지?
지그하르트의 선조는 이곳이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 꽃을 심었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싸움은 이미 끝난 건가? 아니면….’
라온이 마지막에 보았던 지그하르트 선조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 사이에는 천 년이라는 강이 흐르기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앞으로 큰 사건이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걸 알아볼 방법은….’
-얌마!
라온이 선조의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라스가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무얼 하는 것이냐! 불나방 놈도 쓰러지기 직전이니라! 빨리 튀라고!
라스는 제발 도망치자며 꼬리를 떨었다. 겁을 먹은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러스트에게 잡히면 네놈의 몸에서 본왕이 산채로 뽑혀 나갈 수도 있단 말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내 계획대로 되면 잘 끝날 거야. 아마도.’
-아마도? 아아아아아마도?
라스가 미친 소리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본왕은 목숨이 걸렸느니라!
‘그거 다행이네.’
라온이 씩 웃으며 분노를 끌어모은 손아귀를 들어 올렸다.
‘나도 목숨을 걸었으니까.’
* * *
콰아아아앙!
다르칸이 러스트의 검격에 밀려나며 입술을 씹었다.
‘숨이 막히기 시작하는군.’
육체의 상처는 정신력으로 견딜 수 있지만, 심상의 세계에서 입은 영혼의 상처는 굳건한 의지가 있어도 버틸 수 없었다. 점점 힘이 달리는 게 느껴졌다.
‘아까워.’
눈앞에 있는 여검사는 자신이 만났던 무인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하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검술을 수련했다는 게 느껴져서 제 상태로 싸울 수 없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이제 만족했겠지?”
러스트가 다르칸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말해. 라스는 어디에 있어.”
그녀는 그것만 말해주면 보내주겠다며 푸른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라스. 라스라….”
다르칸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심상 속에서 만났던 푸른 존재를 떠올렸다.
‘그자가 라스겠지.’
라스에 대한 드래곤 로드의 반응, 그리고 오늘 보았던 그 거대한 영혼을 생각해보면 라스라는 존재는 분명 마왕일 것이다.
눈앞의 여검사 역시 비슷한 존재일 것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놀라서 당황하거나, 소문을 퍼뜨리겠지만, 자신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검술이 강한지, 강하지 않은 지만이 중요했다.
마족 놈들이 세상을 망하게 한다고 해도 새로운 검술만 볼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온 지그하르트. 그 아이는 자신이 보았던 그 어떤 무인과도 달랐다.
검신에 가장 가까운 글렌 지그하르트도, 절대의 힘을 드러냈던 천마도, 거대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푸른 마왕도, 그 아이의 한계에는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살리고 싶군.’
저 여검사에게서 느껴지는 건 과한 집착.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검에 대한 열망에 못지않았기에 라온이 잡히게 되면 좋은 결과를 맞이할 것 같지 않았다.
“아직이다.”
다르칸이 턱을 저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영혼의 상처와 내상 때문에 핏물이 울대를 치고 올라왔지만 웃으면서 도로 삼켰다.
“나는 아직 네 검의 끝을 보지 못했어.”
“끈질기구나. 라스의 위치만 말하면 편해질 텐데.”
“편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좋다. 마지막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살려두지. 그 이후에는 확실히 죽게 될 테지만.”
러스트가 길게 늘어난 곡도를 잡은 채 냉랭한 눈빛을 번뜩였다.
쿠와아아아아아!
그녀의 검이 끝도 없이 늘어나며 천지사방을 뒤덮었다. 성검련 전체가 그녀의 칼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좋군!”
다르칸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살과 뼈를 헤집을 듯한 러스트의 검격을 보며 진한 웃음을 터트렸다.
섬뜩한 살의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극에 달한 연검술에 먼저 감탄이 나왔다.
‘환검과 변검의 극치. 얼마나 검을 휘둘렀는지 감도 안 잡히는군.’
저 여자의 검술 재능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노력만큼은 자신이나, 글렌조차도 따라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검술이야. 다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은 그 너머에 있었다.
콰아아아아!
다르칸이 이기어검의 연결을 끊고, 자신의 심상에 집중했다.
마음으로 다져둔 영혼의 검을 뽑으며 쏟아져 내리는 연검의 참격을 향해 나아갔다.
‘똑같군.’
심상 속에서 만났던 푸른 마왕처럼 저 여검사에게서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영혼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대로 저자 역시 마왕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칸은 심검으로 벨 수 없는 두터운 영혼을 마주하고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도전이로구나!’
그는 스스로를 도전자라 생각하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담아 심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
다르칸의 손아귀에서 검은 섬광이 번쩍인다.
한층 더 다듬어진 심검이 러스트의 굳건한 육체와 정신을 뚫고, 그녀의 혼을 향해 매서운 칼날을 드러냈다.
퍼어어어억!
다르칸은 전신이 연검에 썰리고 있음에도 끝까지 심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익!
영혼의 부상을 입은 그의 심검은 마왕의 영혼을 베기에 미약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덕분에 러스트도 큰 충격을 받은 듯 뒤로 튕겨 나갔다.
찌지지지직!
러스트의 육체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었지만, 그녀의 등 뒤에서 분홍빛 안개가 피어 나왔다.
지금까지 그녀가 사용했던 오러의 색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음…?’
다르칸이 러스트의 기이한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본래 분홍색에서는 따스함과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데, 저 여자에게서 피어나는 분홍빛에서는 섬뜩함과 오싹함만이 가득했다.
화아아아악!
러스트의 푸른 머리카락이 연분홍빛으로 물들며 성검련 전체에 거대한 악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인간….”
러스트가 격한 숨을 토하며 허연 송곳니를 드러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구나.”
그녀는 처음으로 라스의 이름을 꺼내지 않은 채 끈적한 음성을 흘렸다. 차디찬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듣고 싶었다.
“죽음조차 벗어날 수 없는 노예로… 어?”
러스트가 로브를 벗어던지려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도시 밖에 있는 산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라스. 라스야!”
러스트는 본인이 화를 냈다는 것도 잊은 채 분홍빛 기운을 지우고, 산을 향해 달려갔다.
“저, 저기는!”
렉타르가 눈을 부릅떴다. 저 괴이한 존재가 움직인 곳은 조금 전 라온이 오른 산이었다.
“젠장!”
그가 러스트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힘겹게 몸을 돌렸다.
“갈 필요 없네.”
다르칸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나, 자네가 가도 도움이 안 돼.”
그는 의미가 없는 일이라며 손을 내렸다.
“자네의 손자는 일부러 저 괴물을 불렀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야.”
다르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며 가늘게 웃었다.
“그렇다고 해도….”
렉타르는 라온이 있는 산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야 하오. 내 손자니까.”
그는 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산을 향해 걸었다.
“라온의 할아버지답게 맞는 말만 하시네요.”
마르타가 렉타르를 뒤에서 부축하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버렌도 함께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루난은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이며 선두에 섰다.
“라, 라온 님은 딱히 우리가 필요하지는 않아 보였는데….”
도리안이 눈동자를 굴렸지만, 결국 그도 렉타르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런가.”
다르칸이 대 자로 누운 채 힘없이 웃었다.
“나는 검말고 모르는 게 너무 많군.”
그는 눈을 감으며 입맛을 다셨다.
“뭐, 그게 편하지만 말이야.”
* * *
후우우욱!
라온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러스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성을 되찾았나?’
조금 전 러스트는 다르칸의 심검에 당해서 본모습을 드러내려 했지만, 라스의 분노를 감지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이곳으로 날아왔다.
지독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라스?”
러스트가 라온을 바라보며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너야…?”
그녀의 눈빛에는 의심과 반가움이 동시에 들어서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라온은 심상의 세계에서 보았던 라스처럼 은은한 분노를 휘감은 채 뒷짐을 졌다.
-그, 그 자세는 또 언제 본 것이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했어. 인간한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러스트는 결투 중에 라온과 눈이 마주쳤던 상황을 말하며 본인의 손등을 꽉 움켜잡았다.
“정말 라스 맞지?
“네가 느끼는 대로 판단하면 되느니라.”
라온은 믿어도,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한 건조한 눈빛으로 라스의 말투를 꺼냈다.
-끄어억….
라스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망할 놈이 또 본왕의 연기를 하다니! 하지만….
녀석이 비틀어진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미치광이한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니라!
라스는 러스트의 집착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며 키득거렸다.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러스트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는다. 라스여도, 라스가 아니어도 일단 잡아챌 듯한 기세였다.
‘위험하군.’
라온이 격하게 약동하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가는 숨을 내쉬었다.
라스의 연기를 하면서 러스트에게 잡히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이 육체는 본왕의 수하이니라.”
라온이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미친놈은 수하로 안 받아!
라스가 절대 싫다는 듯 턱을 흔들었다.
“수하? 그런 어린 인간을 위해서 인간계까지 왔다고?”
러스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왕이 수하를 챙기는데, 종족과 나이가 중요한가?”
라온은 진지할 때의 라스를 떠올리며 냉랭한 눈빛을 세웠다.
“그래. 넌 그런 왕이었지….”
러스트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작게 웃었다. 조금이지만 라스라고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욕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
라스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이, 이걸 속는다고?
녀석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니, 잠깐! 속으면 안 되는데?
라스는 저러면 결국 잡힐 거라며 턱을 떨었다.
“라스. 나는….”
러스트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내린다. 비를 맞은 어린 동물을 보는 듯한 느낌. 전신에서 기이한 열기가 일어나며 그녀를 손으로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색욕인가.’
라스는 러스트가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니, 본인도 모르게 아주 약한 권능이 발동된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웅!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자, 몸을 옥죄이던 열기가 가라앉고, 다시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제대로 색욕을 뿌리지도 않았는데 그 꼴이라니! 정신 차리거라!
녀석은 끌려가면 다 죽는 거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응원 고맙다.’
-응원이 아니니라! 잡히면 다 끝나지 않느냐!
‘어쨌든.’
라온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본왕을 따라서 이곳까지 온 것인가?”
“그래. 오직 널 찾기 위해서.”
러스트는 그게 전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를 전부 뒤지다 보니, 어느새 인간계까지 올라오게 됐어. 우연히 던전 속에서 네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있다고 확신했지. 역시 우리는 운명으로 묶여 있나 봐.”
그녀는 긴 문장을 한 호흡에 뱉으며 환희에 찬 눈동자를 반짝였다.
‘음….’
라온은 러스트의 말을 되새기며 눈매를 좁혔다.
‘진짜 길치가 맞나 보네.’
러스트는 라스가 인간계에 있는 걸 알고 쫓아온 게 아니라, 우연히 올라온 것처럼 말했다.
정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던전이면….’
로엔그린의 던전인가.
그곳에는 과거의 라스와 현재의 라스의 분노가 모두 남아 있으니, 그 안에서 흔적을 찾아낸 것 같았다.
“라스. 함께 돌아가자.”
러스트가 라온을 향해 새하얀 손을 뻗었다.
“나는 너만 있다면….”
“본왕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라온이 다시 라스의 모습을 연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돌아갈 테니, 재촉하지 말거라.”
“모든 것? 그게 뭔데?”
러스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색이 탁해진 눈동자를 보니, 무슨 말을 해도 힘으로 제압할 것만 같았다.
-본왕이 말했지 않느냐!
라스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저 미치광이한테는 말이 안 통한다니까! 저건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게 아니니라!
녀석은 다 끝났다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네가 본왕을 쫓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온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턱을 내렸다.
“그건….”
러스트는 달려들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본왕이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겠지.”
라온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답은 이미 나와 있어.’
라스는 러스트가 본인의 힘을 싫어한다고 했고. 어떤 말을 해줘서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그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두 마왕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맞아….”
러스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색욕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되라고 해주었으니까.”
그녀는 라스의 말이 본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함께 가자는 거야! 네가 나한테 위로를 해줬듯이 이번에는 내가 널 위로해줄게! 마계 전체를 내어줄 수도 있어!”
러스트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며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소용돌이처럼 팽팽 돌아간다.
과하게 흥분하여 몸부터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또 이성을 잃기 시작했어.’
러스트의 눈빛을 보니 조금만 지나면 말이 안 통할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본왕이 말했지 않느냐! 네놈도 안 된다니까! 오히려 자극했잖느냐!
라스는 어떻게 할 거냐면서 자신의 소매를 흔들었다.
“너는 본왕이 그런 사소한 일로 만족하리라 생각하느냐.”
라온은 라스를 밀어내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마계를 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으니까!”
러스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이제는 참고 싶어도 참을 수가 없어. 억지로라도 데리고 가겠어!”
그녀가 한계라고 외치며 목을 부르르 떨었다.
화아아아아아!
러스트의 눈동자와 머리색이 분홍색으로 변해간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워야 할 연분홍빛 눈동자에서 자신의 영혼이 떨릴 정도의 욕망이 느껴졌다.
색욕의 군주의 진정한 권능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이 꽃이 언제 심어진 것 같으냐.”
라온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휘돌렸다. 심장을 터트리려는 듯한 러스트의 기파를 견디며 선조가 심었던 꽃을 가리켰다.
“…….”
러스트의 눈빛이 처음으로 라온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붉은 꽃잎을 보며 고개를 틀었다.
“몰라. 굉장히 오래된 것 같지만, 관심 없어.”
러스트도 선조의 꽃이 평범한 식물과는 다른 것은 알아차렸지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본왕이 너와 처음 만났던 해에 이 꽃을 심었느니라.”
라온이 다정한 눈빛으로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아….”
러스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서 피어나던 색욕의 권능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눈망울이 다시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저, 정말이야?”
“보면 알지 않느냐.”
라온은 대놓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그마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진실을 말하는 듯 눈빛도, 입꼬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 날 위해서….”
러스트는 감격한 듯 공격하려던 손으로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 무슨 미친 소리더냐!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볼살을 푸르르 떨었다.
-너희 선조가 심었다며!
‘선조님도 용서해주실 거야.’
라온은 하늘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마왕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니, 그라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 선조를 팔아? 네놈은 언젠가 천벌을. 아니, 악벌을 받을 것이니라!
라스는 미치고 팔짝 뛰겠다며 본인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처음 이곳은 네 마음처럼 황폐했고, 어두웠다. 이런 생기를 되찾는 데까지는 정말 긴 시간이 걸렸지.”
선조의 기억에서 보았던 새까만 산을 떠올리며 눈썹을 내렸다.
“네게도, 그리고 본왕에게도 아직 시간이 필요하느니라.”
라온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눈동자를 내렸다.
“그 날이 오면 본왕이 먼저 너를 찾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기다리라고 하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야아아아아아!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절대 안 갈 것이니라! 차라리 죽을 거야!
녀석은 왜 그런 약속을 하냐며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
러스트는 붉은 꽃과 생기로 가득한 산을 보며 어깨를 떨었다. 여러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너는 항상 도망만 쳤는데!”
그녀는 이런 기회가 다시는 안 올 것 같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뢰가 필요한가….”
라온이 옅은 웃음을 그리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지.”
러스트를 향해 라스의 얼음꽃 팔찌가 있는 손목을 내밀었다.
“네 권능을 본왕에게 다오. 약속의 증표로 삼겠느니라.”
권능을 달라고 말하며 당당히 턱을 들어 올렸다.
“아….”
러스트는 권능을 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야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먹혔어.’
라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라스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막고, 색욕의 권능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계획 이상으로 완벽한 결과였다.
-이, 이게 이렇게 된다고?
라스가 담담한 라온의 얼굴을 보며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무, 무서우니라! 러스트보다 더한 또라이가 여기에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