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851
제851화
라온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눈빛을 가라앉히는 데니어를 보며 볼 안쪽을 씹었다.
‘역시 저 사람은 이상해.’
지그하르트의 주요 인물 중 가장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저 데니어 지그하르트다.
카룬은 예민하고 냉정하지만, 그만큼 지그하르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고, 발데르는 무식하고 귀가 얇지만, 그 이상으로 의리가 넘치는 남자다.
하지만 데니어는 그 둘과 다르다.
선하면서도, 정의로운 듯 보이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나서지 않고, 오히려 무능한 모습을 드러낸다.
‘백혈교의 습격 때가 절정이었지.’
백혈교가 지그하르트에 쳐들어 왔을 때도 데니어는 가주전 쪽을 수비하다가 원로원과 상당수의 검사를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전주로서의 무력과 평소에 보여주는 그의 이지적인 사고방식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지그하르트에 세작이 있다면 데니어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시프는 아리스 다음으로 글렌을 노린다고 했지만, 자신의 생각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의 차이가 극명하니까.’
시프가 아무리 아리스의 힘을 흡수해서 초월에 올랐다고 해도 글렌과는 그 격 자체가 다르다.
아리스처럼 글렌의 힘과 정신을 소모시킨 이후에 기습하면 극히 드문 확률로 글렌에게 검을 휘두를 수는 있겠지만, 로엔이나 셰릴이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다.
사실 글렌의 힘을 빼는 거나, 방심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가 광풍대와 아리스를 모두 잃고 홀로 돌아온 시프를 신뢰할 가능성도 낮으니까.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시프를 미끼로 던지고, 지그하르트에 있는 세작 중 하나가 그 빈틈을 노리는 것. 다른 사람이라면 시프의 능력이 아까워서 하지 않을 일이지만, 데루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럼 저 허여멀건한 놈이 세작이라는 것이냐?
라스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데니어를 노려보았다.
‘아니, 아직은 내 감일 뿐이야.’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데루스 로베르트와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모습이 겹쳐 보일 때가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화를 내야 할 때 오히려 웃으며 인내하는 모습은 그놈의 더러운 면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별일이로구나.
라스가 고개를 돌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평소의 네놈이라면 정보를 모으고, 상황을 파악한 후에 느릿느릿 움직였을 텐데 말이야.
‘이 이상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거든.’
라온이 입술을 씹었다. 라스의 말대로 본래의 자신은 상대의 정보를 충분히 모은 후에 움직였다.
하지만 리메르의 죽음을 겪으며 확신이 없어도 먼저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흑검은 아리스를 회복시키고, 데루스의 계획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물건이다.
속을 알 수 없는 데니어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데니어가 본인의 손을 바라보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광풍대주?”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채갔음에도 화는커녕 당황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라온이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흑검에는 저주가 씌여 있기에 모두가 잡을 수 없습니다.”
“초월에 올랐다고 벌써 날 무시하는 건가?”
데니어가 농담을 하듯 가볍게 말을 던졌다. 지금도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라, 라온?”
“라온 도련님….”
오히려 발칸과 로엔이 낮은 목소리로 라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온이 흑검을 뒤로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흑검에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위험한 저주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기에 가주님께서 만질 수 있는 인원을 한정시켜두었습니다.”
그는 그 인원에 현무전주의 이름은 없다고 말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현무전주께서는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시니, 다른 업무에 집중해주셨으면 합니다.”
라온은 이 검에 관한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영감탱이가 그런 말 안 했잖느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데니어는 가주님의 말에 번복하지 않아. 언제나 가만히 듣기만 하지.’
-그러다가 영감에게 따지면?
‘안 따져.’
글렌에게도 불평하거나, 따질 때가 있는 카룬, 발데르와 달리 데니어는 절대 앞에 나서지 않는다.
가주의 이름을 팔면 먹힐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따지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빠져나가면 돼.’
데니어가 글렌에게 물어보았을 때의 방법도 생각해두었으니, 그가 어떻게 움직여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 검이 그의 손에 들리지 않게 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만졌는데?”
데니어는 흑검을 손에 쥐었다고 말하며 옅게 웃었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3초 안에 주우면 먹을 수 있죠. 제가 바로 빼앗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라온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괜찮나?”
“저는 이 검을 든 시프와 싸우기까지 했으니까. 저주에 걸려도 이미 늦었을 겁니다.”
데니어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 그럼 그걸 알려주려고 이곳까지 온 건가?”
데니어가 가볍게 말아쥔 주먹을 슬쩍 내렸다.
“아뇨.”
라온이 뒤에 있는 로엔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님이 깨어나셔서 다른 분들께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누님이….”
데니어가 탁한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아리스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로엔이 걱정이 된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몸은… 괜찮습니다. 다시 잠이 드셨어요.”
“아….”
“…….”
몸은 괜찮다는 말에 담긴 뜻을 알았는지 로엔은 신음을 흘렸고, 데니어는 무거운 시선을 돌렸다.
“다시 주무신다고 하니, 나중에 가봐야겠군.”
데니어는 짧게 혀를 차고서 몸을 돌렸다.
“광풍대주. 나를 걱정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전주시니, 누구보다 몸 관리를 잘하셔야죠.”
“그래? 이제는 나보다 자네가 더 관리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서 응접실의 문 앞에 섰다.
“사실 제가 그 검을 보았어도 해결책을 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모두 고생해주시길.”
데니어는 로엔과 발칸, 야수연맹의 주술사 파시론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서 응접실을 나섰다.
그는 가주전의 복도를 걸어 나가며 흑검을 잡았던 손아귀를 펼쳤다.
우우우웅.
데니어는 손아귀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흑검의 조각을 보며 짧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기쁜 것 같기도, 씁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되는 건가….”
* * *
“도련님. 이게 대체….”
로엔은 이 상황이 이해 안 된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온은 묻지 말아달라고 마하며 고개를 저었다.
“또 요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발칸이 속을 알 수가 없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네. 이해해주십시오.”
라온이 발칸을 바라보며 가늘게 웃었다.
‘말씀드릴 수가 없지.’
아직은 감일 뿐이니까.
지금까지 데니어가 무언가를 하거나, 정보를 빼냈다는 증거는 없다.
그를 의심하는 이유는 감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라온 지그하르트로군.”
야수연맹의 주술사가 라온에게 다가가서 두 손을 모았다.
“연맹의 파시론이 은인을 뵙습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자세로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혈교에 들어가서 야왕 오그람을 구해왔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언제적인데요. 이러지 마세요.”
한참 전의 일이었기에 민망해서 두 손을 저었다.
“은인께 무례하게 굴었다가는 야왕께서 제 목을 뽑으실 겁니다.”
파시론은 인사를 거절하지 말아 달라며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 그건 그렇겠네요.”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파시론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고맙습니다.”
파시론은 고맙다는 듯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 검의 저주를 푸는 건 불가능한가요?”
라온은 파시론이 또 민망한 소리를 하지 않도록 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그하르트로 돌아오면서 이 검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이 아는 주술로는 풀 수 없었다. 던전의 주술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누구의 말씀인데 거절하겠습니까.”
파시론이 흑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힘과 시간이 들겠지만, 풀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인력과 시간 소모가 심하지만 푸는 건 가능하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부탁이기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모님의 힘도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
“저주가 풀린다면 자연스럽게 돌아갈 겁니다. 물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본능이니까요.”
파시론은 저주만 풀면 가능하다고 말하며 턱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파시론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력이라도 돌아온다면 아리스도 조금은 힘이 날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고맙다 뿐이었다.
“다만 주술사들을 더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저 혼자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파시론은 이 저주의 출처도 알아봐야 하니, 많은 주술사의 힘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렸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마 돈은 별로 필요 없을 겁니다.”
그는 돈은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들도 은인을 뵈면 좋아할 테니까요.”
“저를요…?”
“예. 20대 초반의 나이에 초월에 오른 검사. 라온 지그하르트를 보기를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초월?”
라온이 씩 웃는 파시론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파시론이 라온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턱을 틀었다.
“지금 라온 님에 관한 소문이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 * *
글렌은 알현실로 돌아와 옥좌에 등을 깊게 파묻었다.
“후우우….”
로엔조차 없기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피곤하군.’
정신적으로 이렇게 힘든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동료가 죽은 적은 많았지만, 가족이 가족을 찌른 적은 처음이니까.
시프가 아리스를 찌르고, 리메르를 죽였으며, 결국 라온의 손에 죽었다.
과정을 제외하고 보면 친우가 죽었고, 손자가 손자를 죽였으며, 그 어미는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였으니, 자신까지 우울해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간신히 깨어난 아리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안타까워서 가슴이 무너질 듯이 아려왔다.
“하아아….”
글렌이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옥좌에 머리를 기댄 채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침대까지 갈 힘도 없기에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지려고 할 때였다.
치지지지지직!
글렌은 가주전 기둥 앞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푸른 창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 창은 체임버와 마탑주가 함께 만든 화상 회의용 마법이다.
화상을 열어달라는 허락을 구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계속해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인지….”
글렌이 짧게 혀를 차고서 손가락을 튕기자, 억누려 있던 창 네 개가 동시에 솟구쳤다.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
“아재!”
“그, 그거 진짜에요…?”
야왕 오그람, 묵검존 레크로스,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 마탑주 라리안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무, 무슨 말이냐.”
글렌은 초월자 네 명이. 그것도 저렇게 화면에 달라붙어서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눈빛으로 턱을 떨었다.
“라온! 그 녀석이 정말 초월에 오른 거냐고!”
오그람이 어서 말을 해보라며 손을 내리쳤다.
“저도 그것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정말 광풍대주가 초월에 닿은 겁니까? 대륙 전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레크로스 국왕이 궁금하다고 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할배! 왜 입을 꽁꽁 싸매고 있어! 우리 라온이 정말 초월자가 된 거야?”
체임버가 라온 앞에 우리라는 단어를 붙인 채 길게 입맛을 다셨다.
“저, 저희 쪽에서도 하루종일 떠들고 있어요. 마법사들이 검사의 이름을 읊조리는 건 처음이라….”
라리안은 마탑에도 라온의 이야기만 계속 돌아가고 있다며 눈을 연달아 끔벅였다.
“20대 초반에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도 대륙 역사상 최초일 텐데, 초월이라니! 아무리 라온이라도 믿기가 힘들어.”
체임버는 어서 좀 말해보라며 푸른 화면을 연달아 두드렸다.
“아니지! 라온은 가능하다! 그 녀석은 우리와도 재능이 달라!”
오그람은 확신을 가진 채 기대감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후.”
글렌은 화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네 명의 초월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소문이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리메르의 죽음과 아리스의 상실을 제외하고 라온이 초월에 올랐다는 이야기만 퍼진 것 같았다.
“웃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고 영감!”
체임버가 말 좀 하라며 손으로 입 모양을 만들어서 여닫았다.
“그래. 사실이다.”
글렌은 네 사람을 차례로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초월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우오오오오오!”
오그람이 짐승으로 돌아간 것처럼 두 주먹을 들고 포효를 터트렸다.
“허, 대륙의 역사가. 아니, 전 차원의 역사가 새로 쓰였군요.”
레크로스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우리 라온이야! 해낼 줄 알았어!”
체임버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잊은 듯 헤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 연구하고 싶어….”
라리안은 불가능한 업적을 이룬 라온을 연구해보고 싶다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후….”
글렌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여주는 네 사람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렇게 좋은 건가?’
보통 초월에 오르게 되면 세상일의 대부분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저들이 저렇게 흥분하여 난리를 떠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 사실 저렇게 반응해야 하는 게 맞지.’
라온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만 올라가도 대륙 전체가 떠들썩해져야 하는 일인데, 녀석은 초월에 닿았다.
리메르의 죽음 때문에 제대로 축하의 말도 보내지 못했지만, 그건 분명 대단한 일이고, 대륙 전체에 소문을 내고 축제를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정도면 전면전을 치러도 우리가 유리한 거 아니야?”
오그람은 이제 전력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며 웃었다.
“댁이 회복되어야 유리해지지. 저쪽에 숨어 있는 초월자가 몇인지 알 게 뭐냐고. 뭐, 그래도 라온이 초월에 오른 건 경사지. 경사.”
체임버가 좋은 일이라고 외치며 막대사탕을 씹었다.
“큼, 라온 녀석 여자친구는 있나? 라만 부족에 참한 녀석이 있는데, 황소 두 마리를 한 손에 든단 말이지.”
오그람은 정말 참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무슨 헛소리야! 라온과 인연이 있는 아이가 우리 쪽에 있다고!”
“걔는 싸가지가 없잖아!”
“지금은 달라! 사람이 아예 바뀌었다고!”
체임버는 라온의 배필은 발카르에 있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검사한테는 마법사가 어울리는데….”
라리안은 마탑에도 좋은 여자가 많다며 눈동자를 굴렸다.
“하하하!”
글렌은 라온의 배필을 가지고 싸우는 오그람, 체임버, 라리안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라온의 칭찬을 듣자, 심장을 억죄던 우울함과 피곤함이 조금은 가신 기분이다. 언제나 자신을 웃게 만드는 건 그 아이였다.
“왜 웃어?”
“라온한테 여자친구 있는지나 말해 보라니깐.”
체임버와 오그람이 말을 하라며 눈매를 찌푸렸다.
“아직은….”
글렌이 가늘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턱을 저었다.
“그 누구한테도 못 준다!”
* * *
밤을 밀어내는 바람이 불어오는 새벽.
라온은 5 연무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다 꺼져 있네.’
예전에는 새벽에 와도 연무장의 조명이 켜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리메르가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것 같았다.
‘참 생색을 안 내는 사람이었어.’
리메르는 사소한 부분은 제발 알아달라고 발버둥 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람이 떠나니 그 빈틈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양이로구나.
라스가 하품을 길게 내뱉고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편해졌어.’
슬퍼하면 할수록 리메르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에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좋은 마음가짐이니라. 검을 들고 싸우는 자에게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 남겨진 자는 떠난 자의 의지를 잇고 나아가는 것에 집중하는 게 옳으니라.
‘알고 있어.’
-본왕은 마계의 군주로서 많은 수하들의….
“냥!”
라스가 본인의 허리를 쭉 편 채로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담장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내렸다.
-하찮은 고양이 따위가 본왕의 말을 막아? 사료를 뜯어버릴….
“라온!”
고양이는 입을 가늘게 벌린 채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끼아아아아악!
라스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놀란 듯 눈을 흘기다가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멀린?”
라온이 고양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 근처에 고양이는 없었기에 처음부터 멀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주문이 완성됐어.”
멀린이 깃든 고양이가 앞발을 내밀었다.
“누님을 깨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