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938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938화(938/965)
제938화
“가, 가주님…?”
라온이 글렌의 주름진 눈매를 살피며 헛바람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글렌 지그하르트는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몬티로의 통신이 끊어져서 걱정이 되었다고 해도 이런 격한 반응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기절할 것처럼 어지러웠던 머리가 잠시나마 맑아졌다.
“네 모습을 보기만 해도 이곳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 수 있구나.”
글렌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을 안을 팔에 힘을 주었다.
“끝까지 버텨주어서 고맙다. 라온.”
그는 다시 고맙다고 말하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할아버지….”
글렌의 고맙다는 말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울려서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여, 영감탱이가 드디어 노망이 났나?
라스가 글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숨을 콱 들이켰다.
‘노망이 아니라, 감정이 격해지신 것 같아.’
글렌이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더 챙겨준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냉랭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는데, 갑자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단순히 감정적인 게 아니라, 많이 지치신 것 같아.’
글렌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숨을 헐떡였고, 며칠 밤을 새운 듯 피로에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초월자가 이곳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 지칠 리가 없으니, 큰 싸움을 치르고 온 것 같았다.
‘뭐랄까. 할아버지가 좀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피곤해서 그런 건가?‘
글렌은 지그하르트의 옥좌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장대한 기파를 펼쳐내고 있었지만, 태양 앞에서 흩어지는 새벽안개처럼 흐릿한 느낌도 주었다. 공존할 수 없는 감각이 동시에 느껴져서 혼란스러웠다.
-아니, 네놈이 제대로 본 것이니라.
라스는 자신이 느낀 게 맞다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
라온이 라스에게 되물으려고 할 때 땅이 무너진 소리를 듣고, 분수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 가주님?”
“가주님이 어떻게 여기에?”
“응…?”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자신을 안고 있는 글렌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도 이리 오거라.”
글렌이 살짝 고개를 들어서 버렌과 마르타, 루난에게 손짓을 했다.
“예? 아….”
“저, 저희도요?”
“음!”
버렌과 마르타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루난은 머뭇거림 없이 땅을 차고 나가 라온의 옆에 섰다.
“고생했다.”
글렌은 먼저 다가온 루난도 라온처럼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아요….”
루난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반대로 글렌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허억!”
“어…?”
버렌과 마르타는 글렌이 루난을 안아주는 것을 보자마자, 바닥을 부수며 글렌에게 달려갔다.
“모두 힘든 싸움을 이겨내 주어서 고맙구나.”
글렌은 버렌, 마르타, 루난을 한 번에 안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이 살짝 목소리를 떠는 글렌을 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저렇게 감정을 표현하다니, 꼭 사람이 바뀐 것처럼 보였다.
“라온. 이곳에서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음, 작전은 다 알고 계실 테니, 그 이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은 세 조장을 다독여 주는 글렌에게 흑탑과의 전쟁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아, 아버지?”
전쟁의 이야기를 거의 끝냈을 때 부상을 치료한 카룬이 치료소에서 나왔다.
그는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안고 있는 글렌에게 당황한 듯 가주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단어를 먼저 꺼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음….”
글렌은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눈을 너무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낮은 신음을 흘리며 아이들을 안아주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고, 왜 아이들을 안아주는….”
카룬은 본인이 보았던 장면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네 역할이 컸더구나. 고생했다.”
글렌이 천천히 걸어가 카룬의 앞에 섰다. 그는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가 뜬 후 카룬을 가볍게 안아주었다.
“아, 아버지?”
카룬은 눈동자조차 돌리지 못한 채 전신을 떨었다. 흑탑주가 천장을 깨고 나왔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가 포옹하면서 칭찬을 해주신다고?’
글렌 지그하르트의 아들로 살며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그가 오늘 같은 칭찬을 해준 건 처음이었다.
놀라움과 경악이 동시에 찾아와서 머리가 멍해졌다.
“가주님.”
라온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은 채 글렌을 불렀다.
“현재 오황 전체의 통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오마의 짓이 분명하니, 어서 움직여야….”
“괜찮다.”
글렌이 뒤를 돌며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웬은 습격을 받았지만, 다른 곳은 무사하다.”
“음….”
라온이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는 삼왕자 그리어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예상했던 대로 자신들이 흑탑을 치는 동안 오마는 오웬을 공격했던 것 같았다.
“혹시 오웬을 친 놈은….”
“그래. 데루스 로베르트다.”
글렌은 데루스 로베르트와 싸우고 왔다며 턱을 내렸다.
“많이 강해졌더구나. 오황오마의 수장 중에서도 상대할 이가 거의 없을 것 같아.”
그는 데루스의 무력이 오황오마 중에서도 최상위에 서 있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래서 그렇게 지쳐 보였던 건가.’
이제야 글렌이 힘들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웬에 가서 데루스를 막고, 이곳까지 날아왔기에 많은 체력을 소모한 것 같았다.
‘헌데 더 강해졌다고?’
천족의 힘이라도 받은 건가?
데루스가 사라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짧은 기간동안 글렌이 인정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저기 그럼 저희 아버지께서는….”
삼왕자 그리어가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와 글렌의 앞에 섰다.
“상처는 입었지만, 무사하다. 본래 강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글렌은 충분히 회복될 정도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아….”
삼왕자는 긴장이 확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이군.’
라온이 삼왕자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한 명이라도 줄어서는 안 되는데.’
오마와의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 이상 전력이 줄어서는 안 된다.
레크로스가 살아남고, 다른 오황도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흔들리던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음, 그런데 이상한 일이군요. 데루스만 오웬을 치고, 다른 곳은 그대로 놔두다니….”
라온이 데루스 로베르트의 구역질 나는 면상을 떠올리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희의 기습 소식을 듣고, 움직였다면 마탑이나, 발카르, 야수연맹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다른 대비도 해놓았지만, 백혈교와 에덴까지 함께 습격을 해왔다면 대륙 전체가 전장이 되었을 텐데, 그걸 노리지 않은 게 의심스러웠다.
“혹시 모르니, 추가적인 조사를….”
“정보가 없으니, 놈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건 무리다. 지금은….”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젓고서 라온을 다시 안았다.
“쉬거라.”
“예? 하지만… 아.”
그가 등을 어루만지자, 그간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오며 전신에 힘이 빠졌다.
화아아아.
글렌의 부드러운 손길은 불의 고리를 수련하다가 잠이 들던 어린 시절처럼 따스한 수마를 불러왔다.
‘아직인데….’
라온은 정말 오랜만에 실비아의 옆에서 잠이 들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끼익.
글렌이 벽에 금이 간 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귀여운 인상의 소녀 앞에 서서 턱을 까딱였다.
“다행히 일어났군.”
“누군가가 큰 사고를 쳐서 밖이 시끄럽더라? 덕분에 깼지.”
체임버가 사탕을 살짝 깨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가족들에게도 웃음 한 번 보여주지 않던 얼음장 아저씨가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애들을 안아주다니.”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몸은 괜찮나?”
“슈페르의 성녀 덕분에 몸의 상처는 전부 나았어.”
체임버는 성녀 올가가 신기할 정도로 외상에 신경을 써주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상단전의 상태는 좋지 않아.”
그녀는 위험했다고 말하며 본인의 이마를 두드렸다.
“상단전….”
글렌이 체임버의 머리를 훑으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깊게 살펴보지 않아도 그녀의 뇌리에 충격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상처만큼은 내가 치료해야 해. 꽤 시간이 걸리겠지.”
체임버는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무조건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다음 전쟁에는 참여할 수 있다며 사탕을 쥔 손을 흔들었다.
“물론 믿고 있다.”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다정해?”
체임버는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닭살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아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애들을 안아주었냐고 물었지?”
글렌이 체임버의 좁아진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뗐다.
“이곳에 오기 전에 데루스 로베르트를 만났다.”
“뭐…?”
체임버는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결국 왔군! 어디였어!”
“오웬. 레크로스 국왕이 당했다.”
“서, 설마 죽은 건 아니지?”
그녀는 레크로스가 당했다는 말에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너보다는 훨씬 나으니, 걱정 마라. 외상과 내상이 심하지만, 단전 쪽은 무사해.”
글렌은 본인 걱정이나 하라고 말하며 다시 체임버를 침상에 눕혔다.
“하아아….”
체임버는 레크로스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안도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잠깐! 그럼 레크로스가 데루스에게 당한 거야? 이 한심한 놈이!”
“놈은 강했다.”
글렌이 분노하는 체임버에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너와 레크로스 둘이서 덤볐어도 쉽지 않았을 거야.”
“…그 정도라고?”
“그래.”
그는 확신을 하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럼 당신 또 심검을 쓴 거야?”
체임버는 이제야 글렌이 변화를 알아차린 듯 눈매를 찌푸렸다.
“그래.”
글렌이 창밖을 바라보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몬티로와의 연락이 끊겨서 어떠한 소식도 받고 있지 못할 때 데루스 로베르트가 라온과 카룬이 죽었다고 하더군.”
“음….”
체임버는 글렌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너도 알겠지만, 심검은 초월의 경계조차 벗어난 무학이다. 데루스든 그 옆에 있는 천사든 죽일 수 있었어. 하지만 라온과 카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검을 끝까지 휘두를 수가 없었다.”
글렌은 지금도 고민이 된다는 듯 주름이 진 손을 떨었다.
“다만 그 덕에 내가 라온과 카룬 그리고 가문의 아이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줄 깨닫게 되었다. 우습지? 적의 거짓말 때문에 이제야 알았다는 게?”
그는 스스로를 비웃듯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승천은 모든 무인의 꿈이자, 이상. 나 역시 꿈에서도 바라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떠나고 싶지 않다. 이 땅에 남아서 라온과 다른 녀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글렌은 더 약해져도 좋으니, 이 대륙에 남아 있고 싶다며 무겁게 고개를 내렸다.
“그래서 광장 앞에서 라온과 애들을 안아준 거로군. 이제야 알겠어.”
체임버는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며 옅게 웃었다.
“아저씨도 많이 늙었네. 젊어서는 혈육조차 무시하고 피바람을 일으키더니, 말년에는 그냥 정 많은 할아버지가 되었어.”
“음, 뭐라 할 말이 없군….”
글렌은 그 젊은 시절이 후회된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근데 내 생각에 댁은 라온이 손주를 볼 때까지 살 수도 있을 거 같아.”
체임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승천할 때 인간의 오욕칠정을 모두 떼야 한다잖아. 사람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데, 댁은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이 생겼으니, 다르지 않을까?”
그녀는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음….”
“그리고 오늘만 그러지 말고, 앞으로도 애들을 살뜰하게 대해줘.”
체임버는 딱 하루만 변하지 말고, 지금의 마음을 계속 간직하라며 싱긋 웃었다.
“아이들에게는 꾸준한 칭찬이 필요하니까.”
*
*
*
“으음….”
라온이 힘겹게 눈을 떴다.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것을 보니, 아직 몬티로에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게 낫겠지.’
성녀 올가의 의술과 신성력은 넝마의 성자 페드릭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그녀가 몬티로에 남아 있으니, 이곳에서 계속 치료를 받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이제야 깨어났나.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얼마나 잤어?’
-이틀이니라.
녀석이 어두워진 창밖을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경지에 오르고도 이틀이나 쳐 자다니, 본왕의 식사가 열두 끼나 밀렸느니라!
‘…왜 열두 끼야?’
라온이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기본 세 끼에 본왕의 간식 세 끼. 하루 여섯 끼가 맞지 않느냐!
‘…….’
예전에는 하루 네 끼라고 하더니, 이제는 하루 여섯 끼가 되었다. 이게 마왕인가 식충이인가 점점 더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라온이 배가 고프다고 외치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행? 무슨 말이냐?
‘이렇게 위험한 전쟁을 치를 때마다 네가 강림하거나, 힘을 쏟아서 켈록거렸는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
초월자나, 마왕과 만날 때마다 라스가 나선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녀석은 인과율을 무시하고 힘을 사용하여 매번 영혼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체임버와 자신이 끝까지 싸워서 흑탑주를 잡았고, 러스트와 글러트니의 도움 덕분에 그리드도 밀어낼 수 있었다.
큰 싸움이 끝났는데도 라스가 멀쩡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어, 음….
라스는 본인을 그렇게 생각해줄 줄은 몰랐다는 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보, 본왕은 마계의 군주! 네놈 따위가 걱정해줄 필요 없느니라!
녀석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본인을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기분 나쁜 듯이 말했지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라온이 피식 웃으며 라스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러스트와 글러트니는 지금 어디에 있어?’
-러스트는….
라스가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허공을 올려보았다.
-지금도 안개로 변해서 네놈을 지켜보고 있느니라. 무섭고 지겨워서 진짜 죽겠느니라….
녀석은 천장을 올려보지도 못한 채 코를 훌쩍였다.
‘아, 그러네….’
라온이 허공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분홍빛 기류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러스트가 지금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글러트니는 이 마을을 돌며 음식을 다 처먹고 있느니라! 안 일어나면 식량이 다 떨어질 것이니라!
‘역시 돈이 있었나 보군.’
글러트니는 돈이 다 떨어져서 찾아왔다고 했지만, 예상한 대로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계속 느끼지만 천족과 마족은 이 대륙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많이 달랐다.
-네놈 기절하기 전까지 걱정하더니, 지금은 괜찮아진 것이냐?
‘데루스? 물론 걱정은 돼.’
데루스가 왜 오웬을 노렸는지, 다른 오마는 왜 움직이지 않은 건지 지금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놈이라면 분명 의도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알든 모르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회복하고 강해지는 것 뿐이다.
‘더 강해져야 해.’
라온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말아쥘 때 병실의 문이 열리고, 붕대와 약을 챙긴 올가가 들어왔다.
“벌써 일어났어? 무슨 몸이 강철도 아니고.”
올가는 라스와 달리 이틀 만에 일어난 게 놀랍다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상처가 심하지는 않았잖아.”
라온이 붕대에 감긴 몸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육체의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컸지. 체임버 님만큼은 아니지만, 네 상단전도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올가는 대체 무슨 짓을 했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열심히 싸웠지. 밖의 상황은 어때?”
라온이 말을 돌리며 올가에게 턱짓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어. 오웬의 기사들은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도 후발대에게 이곳을 맡기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지. 네가 깨어났으니, 지그하르트도 떠날 거야.”
올가는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라온이 더 진해진 올가의 문신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우리도 복귀해야지. 왕이 왕국을 오래 비울 수는 없잖아?”
올가는 조금 더 머물다가 복귀할 거라면서 손을 내렸다.
“그럼 왕은 보내고, 너는 나랑 가자.”
“뭐? 그게 무슨….”
“너의 그 체질.”
라온이 올가의 팔과 다리에 가득 차오른 검은 문신을 보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고쳐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