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940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940화(940/965)
제940화
발카르 왕도 중심에 세워진 지팡이의 쉼터.
열린 지 백 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찻집은 가지각색의 로브와 예복을 걸친 마법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본래라면 우아한 자태로 차향을 즐기고 있어야 할 마법사들은 뒷거리의 술집에 온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정말 흑탑이 무너질 줄이야.”
붉은 로브를 걸친 중년의 마법사가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안 믿겨. 그 거머리 같은 놈들이 한 번에 사라지다니….”
반대편에 앉은 금발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실 난 이번 원정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어….”
중년의 마법사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쓸어내리며 턱을 저었다.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금발의 기사가 정말이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래. 나는 흑탑주를 실제로 봤으니까.”
중년 마법사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며 찻잔 속에 있던 찻물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흑탑주의 위험함은 그 강함 때문만이 아니야. 놈은 절대 본인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아. 언제나 힘을 숨기고, 물러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지.”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
“체임버 님은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하셨지만, 나는 흑탑을 몰아내기만 해도 이번 원정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어.”
중년 마법사는 본인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눈썹을 깊게 내렸다.
“확실히 흑탑주는 우리에게 피해만 주고, 본인은 아무런 손해도 없이 물러난 적이 많았지.”
금발의 기사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흑탑주라면 흑탑에서도 도망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두었을 거야. 토끼굴보다도 더 많은 탈출구가 있었겠지.”
중년의 마법사는 흑탑주의 음험함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래서 흑탑이 무너진 건 믿어도, 흑탑주가 죽었다는 건 지금도 믿어 지지가 않아.”
“음, 그럼 거짓말인가?”
금발의 기사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눈매를 좁혔다.
“오마에 밀리는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선의의 거짓말일 수도….”
“그건 절대 아니야.”
중년의 마법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흑탑주가 살아 있다는 게 들킨다면 중립 세력들의 신뢰 자체를 잃게 될 거야. 거기다 체임버 님은 흑탑주의 죽음으로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야.”
그는 믿어 지지가 않을 뿐 흑탑주가 죽은 건 확실하다며 찻물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정말로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인가?”
금발의 기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체임버 님이 직접 인정하셨잖아. 흑탑주의 목을 벤 건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우리는 그저 마무리만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크게 활약한 거 아닐까?”
그는 그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며 입맛을 다셨다.
“음, 내 생각에는….”
“그건 아니죠!”
중년의 마법사가 답을 하기 전에 뒤쪽에 있던 테이블에서 젊은 마법사들이 의자를 부술 듯이 거칠게 일어났다.
“체임버 님이 배려해주신 것뿐입니다!”
“초월자 사이에도 큰 격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라온 지그하르트 님이 두 절대자의 싸움에 끼어들겠습니까!”
“전쟁의 영웅이 필요하니, 라온 지그하르트를 띄워주는 거겠죠.”
“흑탑주를 죽인 건 체임버 님입니다!”
젊은 마법사들은 체임버를 믿고 있는 듯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본인들이 믿고 있는 바를 말했다.
“흐음….”
“확실히 그쪽이 논리적이기는 하지.”
“라온 지그하르트의 무력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흑탑주에게 닿을 정도는 아니니까.”
금발의 기사나, 주점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생각은 다 다른 거니까.”
중년의 마법사가 젊은 마법사들을 살피며 옅게 웃었다.
‘젊군.’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하나.
저들은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체임버가 쓰러지고, 마지막 순간을 라온에게 맡긴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저 어린 마법사들은 그 젊음만큼이나 체임버라는 사람을 모른다.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저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알려주어야 했다.
“체임버 님은 대륙 제일의 마법사인 만큼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다. 장난스러운 거짓말은 자주 하시지만, 이런 중요한 사건에서는 죽어도 굽히지 않아.”
중년 마법사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흑탑주의 목을 벤 사람은 라온 지그하르트가 분명하다. 체임버 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혼자서는 흑탑주를 이길 수 없었을 거야.”
그는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 듯 담담하게 턱을 내렸다.
“그걸 선배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체임버 님과 흑탑주의 싸움을 방해만 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나섰을 겁니다!”
“체임버 님이 없었으면 라온 지그하르트는 흑탑주의 손길 하나에 목이 날아갔을 거라구요!”
젊은 마법사들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그쯤 하시죠.”
중년 마법사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쉴 때 안쪽 테이블에서 보랏빛 로브를 걸친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또 누구… 어?”
본인들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던 젊은 마법사들은 보랏빛 로브의 여성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와, 왕녀님?”
“제이나 왕녀님….”
제이나의 등장에 소란스러웠던 찻집 내부가 도서관이 된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궁금하면 내가 말해주지.”
제이나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붉은 로브의 남자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가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니까.”
그가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 모렐 카잔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 설마….”
“모렐 카잔 님?”
찻집 안에 있던 마법사들은 제이나와 모렐 카잔을 번갈아 바라보며 격하게 숨을 들이켰다.
“어, 음….”
“모렐 님과 제이나 님이 왜 여기에….”
마법사들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체임버 님 대신 보고를 하기 위해서 먼저 복귀했다. 차만 마시고 왕성으로 들어가려는데, 참으로 못 봐주겠군.”
모렐 카잔의 냉랭한 눈빛에 젊은 마법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직접 보았냐고 물었지? 그래. 나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흑탑주의 목을 베는 것을 직접 보았다. 체임버 님이 없었다면 흑탑주를 잡을 수 없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라온이 없었다면 체임버 님도 흑탑주를 죽일 수 없었을 거다.”
그는 라온이 이번 전쟁의 주역 중 주역이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그분과 함께 흑탑을 올라갔어요. 흑색왕과 마성뢰를 비롯한 수많은 마인과 마족을 죽이고, 마지막에 흑탑주의 목까지 베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죠.”
제이나는 라온의 뒤를 쫓아 흑탑을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체임버 님을 더 높게 보고 싶은 마음은 알고 있어요. 라온 님에게 공과 명성을 뺏긴 듯한 느낌이 들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와 달라요.”
그녀는 그렇게 싫어하던 라온을 옹호해주며 기이하게도 시원함을 느꼈다. 이제는 미움보다 고마움과 정이 쌓인 것 같았다.
“저 말이 맞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그 그릇이 달라. 현재 대륙을 지배하는 오황오마의 수장. 아니, 그들 이상으로 높은 곳에 오를 게 분명한 무인이니까.”
모렐 카잔은 라온은 위로 보내주는 게 맞는 존재라며 손을 저었다.
“그릇이 다르다….”
“오황오마의 수장보다 더 높은 곳….”
젊은 마법사들은 모렐과 제이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걸 증명하는 게 라온 지그하르트가 얻은 새로운 이명이지. 그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오직 한 명만이 얻을 수 있는 이명.”
모렐 카잔은 찻집에 있는 모두를 바라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검제.”
그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떨었다.
“검제 라온 지그하르트. 왕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제왕의 길에 오른 검사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
*
*
“검제 라온 지그하르트.”
체임버가 씩 웃으며 검제라는 이명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였다.
“검제…?”
라온이 체임버의 말을 들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 검제라구요?”
지금 일어났기에 이명이 바뀌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지만, 그 이름이 검제일 줄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네 나이 때문에 검왕이라고 하려고 했다는데, 네 이전 이명이 찬탈자잖아. 왕을 끌어내린 사람을 검왕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다고, 검제로 바꿨다던데?”
체임버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며 싱긋 웃었다.
“생각해보면 급도 안 맞잖아. 네가 떨어뜨린 왕이 한둘이야? 생사결로 꺾은 부왕이 있고, 슈페르에서는 마족에 먹힌 성왕을 베었고, 이곳에서는 흑색왕까지 죽였지.”
“음….”
“흑색왕을 다루는 황제 흑탑주마저 네 손에 떨어졌으니, 바로 검제로 가는 게 맞아.”
그녀는 누군지 모르지만, 이름 한번 제대로 지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라온이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검이라는 이름 뒤에 황제의 제가 붙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가끔 본인이 본인의 이명을 짓는 이상한 인간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명은 대중이 지어주는 거야. 그 사람의 활약에 따라서.”
체임버가 쯧쯧 혀를 차고서 막대사탕을 입술로 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격의 이명들이 있지. 검황, 전왕, 패왕처럼 검제는 가장 높은 곳에 선 무인만이 받을 수 있는 이름이야.”
그녀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네 할아버지 같은 경우는 북쪽에서 이룬 위업 때문에 북멸왕, 북패왕이라 불렸지만, 결국 지금 불리는 이름은 하나잖아.”
체임버가 라온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검신. 이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존재. 천마가 아니라면 누구도 닿을 수 없지.”
그녀는 입에서 내뱉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 이름이라며 웃었다.
“그럼 저도 할아버지의 이름값 때문에….”
“아니, 그 아저씨와는 상관없어. 너는 네 활약과 미래 때문에 그 이름을 받은 거야.”
체임버가 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얹었다.
“네가 흑탑주의 목을 베었기에 얻은 이름이니, 잃지 않도록 잘 간직하라고.”
그녀는 앞으로도 검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이 뒷머리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검제 라온 지그하르트? 잘 어울리는데?”
버렌은 광풍전의 주인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내 이명도 바뀌었어.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인지 천비성이라고 불리더라.”
그는 본인의 새로운 이명이 마음에 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잘 검제 라온.”
루난도 좋다는 듯 엄지를 치켜들었다.
“루난의 새로운 이명은 만월선녀. 사람을 살리는 달의 선녀라던데.”
버렌은 루난의 새로운 이명을 설명해주며 씩 웃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얻은 이명 같았다.
“그럼 너는?”
라온이 마르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으니, 이명이 변했을 것 같았다.
“끄윽….”
마르타는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어깨를 세운 채 이를 갈았다.
“음?”
“느차너….”
“어? 늪참녀? 무슨 이명이….”
“나찰녀 그대로라고! 아오 쓰벌! 왜 나만 계속 나찰녀인데! 그랜드 마스터를 찍었으면 좀 바꿔 달라고!”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며 붕대가 놓여 있는 철판을 이로 씹었다.
“그으, 저 녀석의 싸움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이명이 나찰녀뿐이라서….”
버렌은 그래서 이명이 그대로라며 눈동자를 슬쩍 내렸다.
“나찰녀 평생 고정.”
루난은 마르타의 이명이 그대로인 게 기쁘다는 듯 가는 미소를 그렸다.
“닥쳐! 이년아! 너 때문에 나찰검도 아니고, 나찰녀가 됐잖아!”
마르타가 악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루난은 혀를 빼꼼 내민 채 도망쳤다.
“하아….”
라온은 병실을 튀어나가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서….”
“아니, 그럴 나이야.”
체임버는 본인도 그랬다는 듯 옅게 웃었다.
“아, 그리고….”
그녀가 손을 내려서 렌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구한 이 녀석. 내가 데리고 가도 될까?”
체임버는 괜찮겠냐는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데리고 가신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렌시아가 마법에 재능이 좀 많더라고. 내가 만든 결계 <어둠을 깨우는 등불>의 핵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그전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
그녀는 본인과 비슷할 정도의 재능이 느껴진다며 입맛을 다셨다.
“정말이에요?”
“그래. 조금 늦기는 했지만, 마법사는 무인과 달리 꼭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되니까.”
체임버는 렌시아가 뛰어난 마법사가 될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왜 그걸 저한테 말씀하시는 거죠?”
라온이 체임버와 렌시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구한 아이이고, 이 녀석이 네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잖아.”
체임버는 누구와 달리 성격도 좋다며 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이 키가 비슷해서 친구를 만져주는 것 같았다.
“음, 그렇군요.”
라온이 체임버를 보며 옅게 웃었다.
‘역시나 다르군.’
체임버 정도의 위치라면 그냥 데리고 간다고 해도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렌시아의 의사를 먼저 생각해 주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지위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렌시아. 너는 어때?”
라온이 렌시아와 눈을 마주친 채 작게 턱을 끄덕여주었다.
“음, 저는….”
렌시아가 눈동자를 살짝 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동생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본인의 선택이 걸린 상황에서도 동생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 네 역할이 컸으니, 나는 그 이상으로 보답해줄 생각이야. 돈으로 따지면 너와 네 동생들이 평생 먹고살아도 남을 정도로.”
“아…”
“그러니 이제는 네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골라.”
라온은 처음으로 너 자신만을 생각해서 선택하라고 말해주었다.
“저는….”
렌시아가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체임버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배워보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을 따라가고 싶지만, 마법을 배워서 강해지고 싶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결정됐네요.”
라온이 렌시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잘 챙겨주세요.”
“그래. 내 상처보다도 더 잘 돌보마.”
체임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원한 웃음을 그렸다.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되구요.”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정말 감사합니다. 라온 님.”
렌시아는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안내인으로 생활하며 보여주던 거짓 웃음이 아닌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과 웃음이었다.
아마도 자신은 저 아이의 사정을 알게 된 후부터 저 미소를. 저 웃음을 보고 싶어서 끝까지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고통을 알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라온이 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흑탑이 무너지고, 흑탑주가 죽은 것을 보고도 이겼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아이의 웃음을 보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직 안 끝났느니라!
라스가 이를 갈며 일어섰다.
-본왕이 밥을 못 먹고 있느니라!
‘다 끝났네. 좀 더 잘까….’
-아니라니깐!
*
*
*
사흘 후.
흑탑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몬티로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대륙 전역에서 모인 물자들 덕분에 축제는 본래 몬티로에서 열렸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화려했다.
“이거 괜찮네.”
라온은 신선한 파와 닭고기가 꽂힌 닭꼬치를 한입에 넣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쁘지는 않다만 본왕은 소금보다 간장이 더 좋으니라.
라스는 소스가 진한 게 좋다며 동그란 손을 까딱였다.
‘그럼 소금 닭꼬치를 더 먹을까?’
-아니, 이번에는 다른 게 끌리느니라. 일단….
녀석이 다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려고 할 때였다.
후우우우욱!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노점상을 스쳐 지나가자, 그곳에 있던 음식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금화 한 닢만 남았다.
-노, 놈이니라!
라스가 턱을 파르르 떨었다.
-그 식충이 놈이 전부 처먹고 있잖느냐!
녀석은 빨리 가서 음식들을 챙기라며 소리를 질렀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뭘 먹고 싶은데?’
-저기 화로 위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소곱창을….
라스가 소곱창을 이야기할 때 후욱 소리가 나더니 구워둔 곱창이 모두 사라졌다.
‘가져간 모양인데?’
-그, 그럼 저쪽에 있는 화덕 피자….
화덕 피자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잘 구운 피자 두 판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판매대에 남아 있는 건 역시나 금화 한 닢뿐이었다.
“오오! 금신이 오셨다!”
“이쪽도! 이쪽에도 와주세요!”
“저희 고기가 제일 맛있습니다!”
아무리 축제라 물가가 비싸다고 해도 금화 하나를 내는 건 큰 사치였기에 상인들은 음식들이 한 번에 사라져도 기뻐하기만 했다.
‘허허….’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글러트니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끄으윽, 그럼 다 뺏기기 전에 디저트로 바로 가자! 구슬 아이스크림으로!
라스는 글러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인지 음식을 포기하고, 바로 디저트를 먹자며 자신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네. 아이스크림은 있겠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점장 혼자 남은 채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벌써 문을 닫나요?”
매장의 문을 닫으려는 점장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 축제가 열리기 전에 작은 여자아이가 와서 아이스크림을 전부 사겠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먹다가 포기할 줄 알고 받아들였는데, 정말 다 먹고 돌아갔습니다.”
점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며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 그놈이니라….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식충이 놈! 먼저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온 것이니라!
녀석은 글러트니의 짓이 분명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 당했어!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는다는 인간계의 흐름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니라!
라스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당장! 당장 본왕을 강림시키거라! 그 식충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으니까!
녀석은 이제 못참겠다며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늘 먹고 싶은 것을 다 사주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라서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일단 참아봐.”
라온이 다른 음식이라도 사주기 위해서 움직이려고 하는데, 눈앞으로 카룬이 다가왔다.
“몸은 다 나은 듯하군.”
카룬도 전부 회복한 듯 평소처럼 잘 다려진 제복을 입은 채 눈동자를 내렸다.
“예. 덕분에.”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서는 카룬이 밑의 전쟁을 맡아주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흑탑주와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싸우는 건 처음이었지만, 꼭 오랜 기간 합을 맞춘 듯이 마음이 편했다.
“이번에 네가 어떤 무인인지를 알게 되었다.”
카룬이 본인과 같은 색을 띤 라온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탑과의 전쟁에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가장 걸맞았던 사람은 너였다. 고생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듯한 말을 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럼.”
카룬은 오직 그 말만을 하고 싶었는지 미련 없이 축제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라온은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해진 카룬의 등을 보며 피식 웃었다.
‘변하는 사람도 있군.’
누군가는 사람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변하는 사람과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더 변해야겠지.’
-변하기는 뭘 변해! 네놈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랄 맞은 얌생이였느니라!
라스는 변한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무력. 앞으로 더 강해져야 하니까.’
다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오황오마의 수장급을 상대하고 싶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가능해질 것이다.
-흥. 네놈은 한참 멀었느니라!
‘알고 있어. 다만 이걸 보면 조금은 가까워질 수도.’
-보기는 뭘 봐! 네놈이 천 번을 봐도… 어?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무시하고, 메시지 창을 불러왔다.
-자, 잠깐… 쿠헥!
대량의 메시지 창이 동시에 떠오르며 눈앞에 있던 라스가 마차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음?’
라온은 날아간 라스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메시지의 끝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여기에도 이게 나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