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999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999화(999/1002)
제999화
“엄마….”
에블린은 목 안쪽에서 흐르는 핏물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바람이 빠진 목소리로 셀라를 불렀다.
“그래. 우리 딸.”
셀라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다만 그 미소와 달리 그녀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회광반조. 죽음이 그녀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에블린.”
셀라가 손에 묻은 피를 소매에 닦은 후 에블린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처음 마법을 사용했을 때 옆에 있던 아이를 다치게 했단다. 그 충격이 뇌리에 남아 있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거야.”
그녀는 선한 마음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거라며 옅게 웃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도 너는 파라이자, 내 딸이야.”
셀라가 떨리는 손으로 에블린을 품에 안았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너무….”
에블린은 이 모든 게 본인의 탓인 것처럼 자책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단다. 그래도….”
셀라가 고개를 젓다가 손가락을 세웠다.
“좋은 남자와 결혼하려면 조금은 행동이 빨라야 할 거야.”
그녀가 장난을 치듯 에블린의 뺨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겨, 결혼이라니….”
“엄마가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 게. 오늘은 잊으렴. 이곳에서 멀리 떠나서 너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셀라는 본인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달라고 말하며 에블린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어, 엄마! 함께… 아.”
그녀는 고개를 드는 에블린의 뒷목을 찔러서 기절시켰다.
“…….”
셀라는 잠에 빠진 에블린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록타.”
그녀는 에블린을 록타에게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블린을 부탁할게.”
셀라는 에블린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폐하….”
록타는 셀라의 눈동자에 비치는 죽음을 보고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에블린을 안은 채로 서쪽으로 달렸다.
쿠구구구구구!
록타는 길을 막는 수많은 기사들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쿠우웅!
록타가 갑옷을 내던지며 뛰어오르자,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명멸하며 거대한 드래곤의 육체가 드러났다.
쿠구구구구!
록타는 본신의 모습으로 에블린을 안은 채 기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날아올랐다.
“막아라!”
“검기와 강기를 날려!”
“날개를 잘라!”
상급 기사들은 록타를 막기 위해서 검기와 강기를 쏘아냈다.
“어딜!”
셀라는 피를 토하면서도 마나의 벽을 세워서 딸 위협하는 참격들을 모조리 막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
셀라는 어마어마한 풍압으로 기사들을 밀어내며 날아가는 록타를 보며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행복하렴.’
그녀가 에블린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을 때 등 뒤에서 뼈와 살이 이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뿌드드득!
셀라가 뇌전 마법을 담은 주먹으로 얼굴을 부숴버렸던 현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듯 그의 육체와 얼굴이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드래고니안이었군요.”
현인은 말끔하게 돌아온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가늘게 웃었다.
“너는….”
셀라가 현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뭐야.”
현인이라 불리는 남자는 분명 숨이 끊어졌었다. 얼굴을 안쪽까지 뭉개버렸으니, 재생력이 좋은 트롤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뭉개진 살과 뼈를 회복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수많은 마법과 주술을 알고 있지만, 저런 것은 처음 보았다.
“저는 그저 과거를 바꾸고 싶은 범부일 뿐입니다.”
현인은 그게 전부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지금은 우리 불쌍한 폐하를 구하고 싶은 게 전부지만….”
그는 에블린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절대….”
셀라가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려 두 손을 모았다.
“절대로 저 아이는 못 줘!”
그녀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마나를 억지로 응집시키며 찬란한 빛을 일으켰다.
“마지막 발악은 받아주는 게 맞겠죠.”
현인이 웃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쿠와아아아아앙!
셀라와 현인의 마법이 정면에서 격돌하며 발생한 거대한 폭발이 왕도의 중심까지 뻗어나갔다.
“못 간다!”
셀라는 폭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아 10분 넘게 현인과 기사들을 막는 절대의 벽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부상의 여파로 호흡이 끊어지고, 그녀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차디찬 땅으로 가라앉았다.
“당신의 뜻대로 저는 그 아이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현인은 숨이 끊어지고도 투지를 잃지 않은 셀라의 눈을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당신의 딸은 알아서 저를 찾아올 겁니다.”
그는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이한 미소를 그렸다.
*
*
*
에블린은 일주일 동안 울고, 분노하고, 다시 통곡하고, 화를 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복수를….”
에블린은 목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고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복수를 할 거야.”
현인이라 불린 놈만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지시했던 로세르의 국왕과 기사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던 국민들까지 모두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공주님.”
록타가 한쪽 무릎을 꿇어서 에블린과 시선을 맞췄다.
“복수의 길은 너무도 험난합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 뒤는 지옥밖에 남지 않아요.”
그는 에블린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왕님의 마지막 부탁을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록타가 한숨을 내쉬며 셀라의 이름을 꺼냈다.
“그날을 잊고,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말 잊지 않으셨겠죠?”
그는 제발 셀라의 유언을 들어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알아. 다 기억하고 있어.”
에블린은 셀라의 말과 그녀의 숨결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 돼. 나는 그 일을. 엄마를 이대로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는 없어.”
그녀는 절대로 참고 버틸 수 없다며 단호하게 눈동자를 세웠다.
“삼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할 거야.”
에블린은 혼자서라도 로세르 왕국에 복수를 하겠다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하아아….”
록타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폐하께서 바라신 행동력은 이게 아닐 텐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에블린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복수를 하실 건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록타는 그게 중요하다고 말하며 바닥에 앉았다.
“삼촌이 먼저 해줄 일이 있어.”
에블린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을 꺼냈다.
“제가요?”
“외부에서 로세르 왕국을 증오하는 세력들을 모으고, 몬스터들을 결집시켜 줘. 드래고니안의 능력을 이용하면 가능하잖아.”
그녀는 록타의 능력을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세르는 강국이기에 그들에게 피해받은 세력이 많고, 저에게 드래곤처럼 가디언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도 맞습니다. 다만….”
록타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절대 안 됩니다. 로세르 왕국은 남부가 아니라, 대륙 전체로 보아도 강국이니까요.”
그는 이길 수 없다고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당연히 그게 전부가 아니야.”
에블린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로세르 왕국으로 직접 들어갈 거야.”
그녀는 직접 로세르 왕국에 침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무슨….”
“신입 마법사로 로세르에 잠입할 생각이야.”
에블린은 직접 들어가서 복수를 할 길을 열거라면서 탁한 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로 들어가서 공을 세운다면 언젠가 국왕과 현인을 만날 일이 생길 테니,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낼 거야.”
그녀는 이번 사건에 관계된 모든 이들과 로세르 왕국이라는 이름을 지우겠다며 서늘한 살의를 드러냈다.
“위험합니다! 신분에 대한 것도 의심받을 거예요!”
“전문적으로 신분을 세탁해 주는 곳이 있다고 들었어. 돈을 주면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에블린이 당황한 록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복수는 불가능해. 삼촌의 말대로 로세르는 강국이니까.”
그녀는 이 방법이 전부라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드러냈다.
“하아아, 그 눈.”
록타가 에블린의 단호한 눈동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셀라 님과 똑같네요. 남자를 구해서 결혼하라고 했는데, 이런 쪽으로 행동력이 생길 줄이야….”
그는 절망스럽다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제가 막아도 가실 거죠?”
“응. 사지를 묶어 놓아도 어떻게든 뚫고 갈 거야.”
에블린은 무조건 할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록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준비는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 현인이라는 자는 파라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는 그 주술을 먼저 막아야 한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건 이미 끝났어.”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의 눈동자에 손을 올렸다. 연한 빛이 피어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어려 있던 붉은 십자가가 사라졌다.
“그 괴물은 파라의 마나 흐름을 이용해서 나와 엄마를 찾은 거야. 그 기이한 마나 흐름을 사람들과 똑같이 만들면 그만이야.”
에블린은 간단한 마법이라고 말하며 손을 털었다.
“아, 아니….”
록타가 에블린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걸 언제….”
그는 일주일 내내 울기만 했던 에블린을 떠올리며 헛바람을 흘렸다.
“생각나는 대로 만들었어.”
에블린은 말도 안 되는 마법을 만들어 놓고, 빵을 먹은 듯 간단하게 표현했다.
“공주님 천재셨습니까?”
“나도 잘 몰라.”
에블린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그날 이후로….”
그녀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의 흐름이 다 보이고, 느껴져.”
에블린은 마법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현상을 읽게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록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이제 알겠지.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건 아니야.”
에블린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도 봤겠지만, 로세르 왕국에는 마법사들이 많지 않아.”
“확실히 우리를 쫓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였죠.”
록타는 이제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이가 어리니까. 적당한 재능만 보여줘도 분명 신임을 받을 수 있어.”
에블린은 자신이 있다고 말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가능성이 있기는 하군요….”
록타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겠습니다. 헌데 공주님. 너무 사람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는 아예 사람이 달라졌다며 눈매를 좁혔다.
“나는 여전히 소심해. 하지만 엄마가 행동력을 가지라고 했으니까. 앞으로는 생각나는 대로 움직일 거야. 복수를 위해서.”
에블린은 복수라는 말을 하며 소리가 나도록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게 그 뜻이 아니라니까….”
록타가 지친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15번째 생일이 된 날.
에블린은 신입 마법사가 되어 로세르 왕국으로 향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 왕국은 기사들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에 마법사는 꽤 귀한 존재였다.
“로세르….”
에블린은 셀라의 손을 잡고 왔던 로세르 왕국의 정문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 앞은 지옥이야.’
그래도 가야겠지.
전에는 겁나고 떨리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의미로 가슴이 울렸다.
“후우.”
에블린은 탁한 숨을 한 번 내뱉고서 왕국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왕도에 발을 디디자마자, 왕국의 정복을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멀린 님이십니까?”
“네.”
에블린은 셀라가 가장 좋아했던 고대의 대마법사 멀린의 이름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마탑의 3계위 조수 벨린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스스로를 벨린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길을 안내 해주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에블인은 마주 인사를 하고서 벨린을 따라 왕도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사라졌네.’
마을 사람들을 처형하겠다고 만들었던 단상은 사라졌고, 새로 세운 듯 깔끔하게 다져진 성벽만이 보였다.
“그쪽은 왕궁입니다. 왕실 마법사만이 들어갈 수 있지요.”
벨린은 왕궁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탑은 이쪽입니다.”
“네.”
에블린은 손아귀에 깃든 힘을 풀고서 벨린을 따라 마탑으로 향했다.
“탑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외모와 달리 좋은 분이시니….”
벨린이 탑주와 탑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지만,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에블린은 마탑의 창문을 통해 왕궁을 굽어보며 입술을 씹었다.
‘너희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지워줄 테니까.’
*
*
*
10년 후.
에블린은 금빛 사자가 박힌 로브를 두른 채 마탑을 나왔다.
“멀린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왕궁으로 가시는군요.”
“10년 만에 왕실의 대마법사에 오르시다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동료 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여러분들 덕분이에요.”
에블린은 가늘게 웃으며 손을 저어주었다.
“내일 행사에는 저희도 꼭 참여하겠습니다.”
“왕궁으로 가셔도 저희를 잊으시면 안 돼요!”
“나중에 저도 불러주시구요!”
마법사들은 내일 있을 취임식에는 꼭 참여하겠다고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이죠. 가서도 자주 볼 수 있을 거예요.”
에블린은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마탑 근처에 있는 개인 숙소에 들어갔다.
“하아….”
고급스러운 침대에 걸터앉으며 억눌린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벌써 10년인가.’
로세르의 마탑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마법 실력을 키우고, 많은 공을 세웠지만, 국왕과 현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현인은 가끔 외부 활동을 하기라도 했지만, 국왕은 알현실에 박힌 채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일은 나올 수밖에 없겠지.
내일은 자신이 마탑의 연구직을 떠나 왕궁의 대마법사가 되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숨어 있던 국왕도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 모든 것을 끝내야 해.’
다시 국왕이 알현실에 숨는다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와 현인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는 내일 이 왕국을 지워야 했다.
‘가슴이 떨려.’
지금의 자신은 분명 강해졌다. 현인이 사용하는 주술도 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긴다는 확신이 없기에 계속해서 심장이 울렸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에블린이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침대에 누울 때 귀에서 작은 울림이 들려왔다.
[공주님.]록타의 메시지다 그는 자신이 전해준 아티팩트로 연락을 보내왔다.
[내일입니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그래.”
에블린은 푸른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직은 멈출 수 있어요.]록타는 정말 할 거냐는 듯 무거운 물음을 던져왔다.
“…….”
에블린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10년….
길었지.
10년 동안 로세르에 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이곳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자신이 살던 마을처럼 이곳 역시 평범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인간적으로 자신을 대해준 사람도 있었고, 스승이 되어준 사람도 있었으며, 소중한 친구와 동료도 생겼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서 정말 일을 저지를 거냐는 듯한 물음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포기하고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국왕과 현인, 기사들을 비롯한 이 나라의 윗대가리들은 파라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학살을 저지른 괴물들이니까.
“할 거야.”
에블린은 짧지만, 깊은 고뇌를 마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록타는 따르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춘 후 사라졌다.
“할 거야. 아니….”
에블린은 셀라와 함께 있던 어린 시절처럼 이불을 머리 위에 덮으며 입술을 씹었다.
“해야 해.”
*
*
*
우와아아아아아아!
왕궁 앞에 거대한 단상이 세워지고, 그 위로 찬란한 빛을 머금은 휘장이 내려온다.
20년 만에 왕궁의 대마법사가 바뀌는 행사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취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에블린은 성벽만큼이나 높게 솟아오른 단상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죽음과 빛인가….’
동족들을 모욕하고, 목을 잘라냈던 피의 단상이 자신을 환영하는 빛의 단상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 자신에게도 저들에게도 비웃음이 나왔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왕성 안쪽에서 땅을 울리는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들어서 단상 위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죽은 건 아니었군.’
너무 나오지 않아서 죽었나 생각했지만, 국왕은 멀쩡히 살아서 단상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놈도.
에블린은 국왕의 한 발 뒤에서 계단을 오르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현인이라 불리는 괴물. 저놈 역시 오늘 필히 죽여야 했다.
“이렇게 밖에 나오는 건 오랜만이로군.”
국왕이 단상의 끝에 서서 그 아래에 선 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
에블린은 20대의 미남자로 보이는 국왕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역시 인신공양을 했군.’
로세르 왕국에 10년 동안 있으며 그날의 일을 몰래 조사했고, 경악했다.
국왕은 마족과 내통했다는 핑계로 파라를 사로잡아 그들의 피를 이용하여 노화를 일으키는 본인의 병을 치료했다.
저 반들거리는 피부와 말끔한 눈동자는 동족들의 피와 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간 업무가 많아 얼굴을 비치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신경 쓰도록 하겠네.”
국왕은 이제는 많이 볼 수 있을 거라며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시필렌 폐하 만세!
국민들은 저 남자가 어떤 이인지 모르고, 그저 환호성만을 질렀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불러봐야겠지.”
국왕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 프리아레스. 위로 올라오게.”
그가 아래를 보며 자신에게 손짓했다.
“예.”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단상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불타는 마을에서 죽어가던 사람들과 이 자리에서 모욕당했던 동족들 그리고 죽음에 걸쳐 있는 상태에서도 웃어주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 증오와 분노를 심장에 담은 채 단상에 올라가 국왕의 앞에 섰다.
“어서 오게.”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국왕과 현인.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은 웃으며 자신을 환영해 주었다.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국왕이 손짓을 하자, 현인이 앞으로 나왔다.
“뮤란 산맥의 몬스터 토벌, 현한 마법 개발, 마탑의 체계 수정, 왕국 수호 마법의 개선 등의 공적을 높게 사. 멀린 프리아레스를 로세르의 왕실 대마법사로 임명한다.”
그가 말을 끝내자, 국왕이 붉은 망토와 지팡이를 가진 채 앞으로 나왔다.
“고생했네.”
국왕은 많은 공적을 세워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의 등을 망토로 덮어주었다. 순간 혐오감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몸을 일으켰다.
“멀린은 고대의 대마법사의 이름이지, 그 훌륭한 이름답게 앞으로 왕국을 위해 힘을 써주게.”
“알겠습니다.”
에블린은 억지로 입술을 땐 후 몸을 일으켰다.
“그래. 왕실의 마법사가 되었으니, 소원 하나는 들어주어야지. 바라는 게 있는가?”
국왕은 왕실의 대마법사가 되었으니, 원하는 바를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에블린은 이제 복수에 때가 온 것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말끔한 국왕의 피부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10년 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10년 전?”
국왕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서남쪽에 살고 있던 파라라 불리던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아! 기억하고 있네.”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마족과 내통한 이들이었지!”
국왕은 여전히 파라를 사람이 아닌 몬스터라고 취급했다.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에블린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복수를 포기하지 않아서.”
국왕의 눈동자가 가늘 게 흔들렷다. 확신이 없는 의심의 눈. 이 자는 파라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이 살기 위해서 학살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국왕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나는 너희들이 죽인 파라의 마지막 생존자다.”
에블린은 그 말을 하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톱이 손아귀를 파고들며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네놈들의 눈에 이 피는 무슨 색으로 보이지? 악마처럼 검은가?”
손아귀에 모인 붉은 핏물을 국왕과 현인에게 뿌리며 이를 드러냈다.
“마나의 흐름이 다르다고, 눈동자에 십자가가 있다고 마족이라? 네놈들은 그 영혼부터가 마귀다!”
에블린은 10년 동안 쌓았던 울분과 분노를 터트리며 악을 질렀다.
“이, 이년을 잡아라! 악마다!”
“제압해!”
“길을 막아라!”
국왕의 외침에 기사들과 현인이 자신의 옆으로 섰다.
“엄마는 내게 행동력을 지니라고 하셨지. 그래서 준비했다.”
에블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단상과 그 주변에 붉고 푸른 빛이 돋아났다.
“이게 내가 10년 동안 준비한 복수의 길이다.”
그 말과 함께 허공이 비틀어지며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앙!
하늘이 울리고, 땅이 뒤집히는 충격이 폭발하며 모여들었던 기사들과 현인 그리고 귀족들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핏물이 되어 가라앉았다.
기사 중에는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에블린의 마법을 버티지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녹아내렸다.
차박.
에블린은 핏물을 밟으며 무너진 단상의 끝으로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국왕은 그 와중에도 살아남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너는 그냥 죽이지 않겠어.”
에블린이 손아귀에 남아 있는 핏물을 칼날로 조형하여 국왕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컥! 커으아아아아악!”
국왕은 칼날이 그의 생명을 흡수한 것처럼 피부가 검게 말라붙은 채 늙어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그는 지독한 고통에 경악한 듯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이게….”
에블린은 당상 아래에 있는 국민들에게 국왕을 들어 올리며 붉은 시선을 드러냈다.
“이 나라의 왕이다.”
그녀는 파라의 피에 담겨 있던 마나를 모두 회수한 후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의 추악한 왕은 죽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며 악마라 칭했다. 너희는 누구를 악마라고 생각하지?”
에블린은 흔들리는 국민들의 눈을 보며 파라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혔다.
꾸드드드득.
그녀가 국왕의 목줄을 잡고 힘을 줄 때 핏물 속에서 현인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죽지 않는군.”
에블린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되살아난 현인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아….”
현인이 다시 돋아난 목을 풀며 웃었다.
“당신이었군요.”
그는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은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눈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현인이 전부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다만 혼자서 이 모두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그의 손짓에 핏물 속에서 죽었던 기사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단상 아래에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준비한 것들이 다 떨어졌을 텐데.”
현인은 포기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혼자가 아니야.”
에블린이 고개를 젓는 순간 왕국의 성벽이 무너지고, 하늘 위로 푸른 빛을 뿜어내는 드래곤이 떠올랐다.
쿠와아아아아아!
그녀는 땅과 하늘이 뒤집히는 듯한 울림 속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
에블린은 복수를 위해 숨겼던 붉은 십자가를 눈동자에 떠올린 채 턱을 치켜들었다.
“너와 이 왕국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