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eased pitcher returns as a diamond RAW novel - Chapter (101)
방출당한 투수가 금강불괴로 돌아옴-132화(101/172)
132화. 리더의 책임
신기하게 생긴 야구장이 많은 메이저리그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오라클 파크는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측펜스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짧은 데, 대신 우중간은 엄청나게 깊다.
이에 처음 개장한 오라클 파크를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건 배리본즈를 위한 구장인가?
당시 메이저리그를 박살내고 있던 좌타 거포, 그 타자를 위해 우측 펜스를 저렇게 당겨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상당히 합리적인 추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의도한 대로 배리 본즈는 오라클 파크에서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한 후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7.3m 높이의 펜스를 뚫고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배리 본즈 뿐이라는 걸, 정확히는 약을 빤 배리 본즈 뿐이라는 걸.
그냥 홈런을 때리기도 힘든데 당연히 장외홈런은 더 힘들다. 그런 악조건을 뚫고 오라클 파크 외벽을 넘어 맥코비만까지 날아간 타구를 사람들은 스플래시 히트라 부르며 특별하게 취급했다. 그리고 여러 타자들이 스플래시 히트를 때려낸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좌타자였다. 세상에 그 어떤 힘 좋은 우타 거포도 바깥 쪽 공을 밀어 쳐 맥코비만까지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 기록이 깨졌다.
한국에서 온 열아홉 루키에 의해.
“이런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
“이게 진짜 스무 살도 안 된 놈이라고?”
“어어, 머리는 때리지 말아요.”
“흐흐흐, 어디서 이런 괴물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기록될 첫 번째 우타자 스플래시 히트를 때려낸 도준우가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른 표정에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걱정하던 동료들이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 팀의 베테랑들은 도준우에게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류상의 나이나 외모로 봐서는 분명 열아홉이 맞는데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베테랑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방금 전 타석에서도 그랬다. 머리로 날아드는 공에 눈 하나 꿈쩍 않더니 갑자기 포수와 말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말도 안 되는 홈런을 날리고, 다시 열아홉 애송이의 얼굴로 돌아와 싱글거린다.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상관없다. 좀 이상하긴 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니까.
그건 도준우가 자이언츠의 선수라는 거였다.
파앙
“스트라이크!”
관중석의 흥분이 가라앉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다.
말도 안 되는 홈런에 반쯤 넋이 나간 레드삭스 투수가 다음 타자와의 승부를 시작했다. 앞선 타자의 스플래시 히트에 잔뜩 고양된 호세 마르티네스와 말이다.
파앙
“볼.”
대기 타석에서 도준우가 때려낸 거대한 타구를 보며 호세는 기뻐했고, 또 절망했다. 지금까지 이 구장에서 적지 않은 수의 홈런을 때려냈지만 스플래시 히트는 단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다.
거포의 씨가 말라버린 자이언츠에 있어 스플래시 히트는 예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걸 알기에 호세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은 자신이 때려낸 타구가 맥코비만까지 날아가길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성공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진짜 괴물같은 놈’
처음 도준우와 만났을 때만 해도 한 수 아래로 봤다. 메이저리그 팀의 중심타자로 한 시즌을 풀로 치른 자신과 고작 KBO에서 뛴 애송이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도준우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그리고 시범경기에서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좋은 라이벌, 혹은 동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녀석은 자신이 라이벌로 삼기에는 너무 거대한 선수였다. 정말 웃긴 소리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치욕스럽기는 하지만,
‘두고 봐라. 내가 꼭 따라 잡는다’
어느 순간부터 호세는 도준우를 목표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잡아야 할 목표.
딱!
“파울!”
앞선 타자가 큰 타구를 날리면 자연스럽게 뒤 타자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호세는 바보가 아니다. 피지컬 적인 능력 외에도 야구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지식을 갖춘 진짜배기 유망주다.
오히려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그냥 가볍게 안타를 친다는 생각으로, 출루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그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욕심 부리지 않고 부드럽게 잡아당긴 타구가 우중간을 향해 날아갔다.
홈런이 잘 안 나오는 오라클 파크의 또 다른 특징 하나, 기형적인 우중간 펜스의 구조 때문에 3루타가 쏟아지는 구장이라는 것.
“고! 고! 고!”
“조금만 더!”
관중들의 함성 속에 호세가 힘차게 달려 나갔다. 우측 담장 모서리에 맞은 타구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는 사이 전력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결국,
“세이프!”
“그렇지! 이게 바로 야구지!”
“빌어먹을! 자이언츠! 너희를 사랑해!”
3루타를 친 호세가 베이스 위에서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경기 초반의 분위기가 완전히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투수가 다음 타자 카일 뱅크스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볼, 베이스 온 볼스.”
1사 주자 1, 3루, 관중들의 시선이 타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하지만 이제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자이언츠의 캡틴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
38세 시즌을 맞이한 로베르토 보니야의 전성기는 빅리그 콜업 첫해인 2010년부터 2015년까지였다. 빅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중심타선 한 자리를 꿰찬 그는 그 5년의 전성기 동안 매년 0.9 이상의 OPS와 100개가 넘는 타점을 올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당시 자이언츠에는 팀 린스컴과 맷 케인, 배리 지토, 매디슨 범가너로 이어지는 막강 선발진이 존재했다. 리그를 대표할 만한 거포는 없었지만 로베르토를 중심으로 한 끈끈한 타선은 상대 투수의 실투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5년 간 자이언츠는 무려 세 번의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등 구단 역사에 남을 황금기를 보냈다.
선수의 전성기와 팀의 황금기가 맞물리는 건 정말 바람직하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한 가지 문제는 팀의 황금기가 끝나며 로베르토의 짧은 전성기도 함께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세 번의 우승 후 자이언츠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장타력 부재로 인한 득점력 저하, 에이스들의 잇단 부상과 은퇴,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그건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추락하는 팀과 함께 로베르토도 천천히 무너졌다.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에서 평범한 타자로 격하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은퇴를 앞둔 노장이 되었다.
파앙
“볼.”
어제 저녁,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도준우를 데리고 단골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기특한 신입을 칭찬해주고도 싶었고, 무엇보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봐, 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봐요’
‘한국 인터넷 기사를 번역해서 읽어봤는데 거기 그렇게 써있더라고, 만년 최하위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게 바로 너라고 말이야’
‘그런가요’
‘젠장, 이런 말을 너같은 애송이한테 하는 게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와인만 계속 들이키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말해봐요. 뭔데요?’
‘난 이 팀이 망해가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아니, 정확히는 이것저것 해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지. 선수단이 두 쪽 나서 힘겨루기를 시작할 즈음에는 완전히 포기했지. 빌어먹을,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말이야’
‘그런데요?’
‘솔직히 난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 안 해. 이 팀은 그 정도로 엉망이었거든. 하지만 내가 인터넷에서 본 너희 팀, 그래, 전 팀이라고 표현해야겠지. 어쨌든 그 타이탄스라는 팀은 자이언츠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게 없는 막장이었더군. 넌 대체 그런 팀을 데리고 어떻게 우승까지 간 거지?’
‘캡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은퇴를 앞둔 놈이 술에 취해서 헛소리 하는 거라 생각해도 괜찮아’
‘진지하게 대답하자면 타이탄스가 팀을 재건하기까지 필요한 몇 가지가 있었어요. 일단 개혁 의지를 가진 돈 많은 구단주가 있었죠. 다행이 자이언츠에도 그건 있네요. 다음으로 분란의 씨앗이 되는 선수들을 과감하게 쳐냈죠. 어라? 얼마 전에 자이언츠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팀을 앞에서 이끌 에이스와 뒤에서 밀어줄 훌륭한 리더가 존재했죠. 리더라는 단어와 뒤에서 민다는 표현이 좀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그래요. 타이탄스에는 아주 좋은 리더가 있었죠’
‘뒤에서 밀어줄 리더’
‘네, 미국과 한국의 문화는 많이 다르죠. 그래서 전 메이저리그 기준 훌륭한 리더가 어떤 건지 솔직히 잘 몰라요. 그건 캡틴이 더 잘 알겠죠. 어쨌든 내가 자이언츠에 입단한 건 이 팀 유니폼을 입고 정상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전 그때까지 달려갈 거예요. 그럴 때 캡틴은 뭘 하고 있을까요?’
도준우의 마지막 말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다.
잊고 있던 우승에 대한 꿈,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리더로서의 책임,
중요한 건 하나였다. 이 팀이 우승으로 향하는 궤도에 올라탔을 때 캡틴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해야 하는가.
꾸욱
도준우의 말이 맞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 메이저리그에서 진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지나간 커리어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증명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뒷짐을 진 채 과거의 영광만을 내세우는 리더 따위, 누가 따르겠는가.
3승 1패, 상승기류에 올라탄 팀, 여기까지 팀을 끌고 온 건 도준우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차례다.
그새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온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그가 던진 고속 슬라이더가 빠르고 강한 궤적을 그리며 존안으로 말려들어왔다.
“흡!”
숨을 한껏 들이 킨 로베르토가 있는 힘을 다해 그 공을 밀어쳤다.
따아악!
공이 맞는 순간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억지로 버텼다. 여기서 손에 힘을 빼면 파울이 될 뿐이다. 끝까지 밀어줘야 한다.
문득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성기 때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동작들이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구현 가능하다는 게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인가,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던 동료들은 다 어디로 가고 혼자 이곳에 남겨진 것인가. 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일까.
로베르토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때려낸 타구가 우측 펜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텅
– 맙소사! 또 넘어갔습니다! 도준우의 스플래시 히트에 이어 이번에는 자이언츠의 캡틴 로베르토 보니야가 친 타구가 우측 펜스를 넘어갔습니다! 쓰리런 홈런!
자신은 도준우가 아니다. 바깥쪽 공을 밀어 쳐 경기장 밖으로 날릴 힘 같은 건 없다. 애초에 전성기 시절에도 불가능하던 일이 이제 와서 가능해질 리 없다.
하지만 외야 펜스를 살짝 넘기는 일 정도는 아직 가능했다. 기선제압에 선공한 자이언츠의 캡틴이 잔주름 가득한 눈가를 찡그리며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자이언츠가 레드삭스를 4대 0으로 리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