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eased pitcher returns as a diamond RAW novel - Chapter (138)
방출당한 투수가 금강불괴로 돌아옴-80화(138/172)
80화. 잘 했다
“준우는?”
“좀 지치기는 했지만, 아직 괜찮은 것 같습니다. 쉬라고 해도 바로 불펜으로 가버려서 깊게 얘기는 못 해봤는데… 따라가 볼까요?”
“그래, 가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체크해봐.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바로 교체해야 할 테니까. 가서 준우 상태 체크하고, 승부치기로 갈 수 있으니 재욱이랑 다른 투수들 상태도 봐두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자신이 가장 믿는 투수 코치를 불펜으로 보낸 고영배 감독이 이번에는 수석 코치를 옆으로 불러들였다.
오늘 경기에서 한국은 다섯 명의 대타를 사용했다. 30명 엔트리 중 절반이 투수임을 감안하면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카드를 꺼내 쓴 셈이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대타 작전으로 인해 빠진 수비 자리에 다른 선수를 채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수석 코치와 함께 선수들의 수비 위치를 조정한 고영배 감독이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5번 타자 3루수 지채민>
겉보기에는 0대 0,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불리한 건 한국이었다.
WBC에는 연장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9회까지 승패를 가리지 못하면 무조건 승부치기로 간다.
무사 2루에 주자를 두고 시작되는 승부치기, 당연한 말이지만 그 주자를 불러들일 확실한 대타 감, 그리고 다음 이닝을 막아낼 수 있는 투수를 보유한 팀이 유리하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 팀에는 그런 선수가 없다. 쓸 만한 야수들은 모두 대타와 대주자, 대수비로 소비되었고, 무사 2루에서 일본에서 내세울 대타를 막아낼 투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영배는 예감했다. 생각하기는 싫지만 연장 승부치기로 가면 백이면 백, 한국의 패배로 끝날 거라는 걸, 18년 만의 기적을 향해 전진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항해가 여기서 끝날 거라는 걸.
파앙
“스트라이크!”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아웃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8회까지 도준우는 88개의 공을 던졌다. 결과와 상관없이 9회가 끝나면 제한투구 수에 걸려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를 수 없다. 아니, 설사 그런 규칙이 없다 해도 더 이상 녀석에게 공을 던지게 할 생각은 없다. 도준우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파앙
“볼.”
5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공격,
선발로 나섰던 타자들이 빠지고 대신 대수비와 대주자로 들어갔던 선수들이 타석을 준비하고 있다.
나름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이니 단순한 백업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선발로 나섰던 선수들보다는 확실히 한 수 처진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대타 작전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부족한 타자들에게 9회 마지막 공격을 맡겨야 한다.
물론 여기서 결과가 잘못된다 해도 선수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저 녀석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아니, 오히려 기량을 넘어선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이렇게 아쉬운 건, 마지막까지 포기하기 싫어지는 건,
지금쯤 불펜에서 투수 코치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도준우 때문이다. 이 팀에서 가장 나이 어린 그 막내 때문이다.
녀석의 어깨에 기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녀석은 오늘 막강 일본 팀을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이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딱 한 점만, 딱 한 점만 내면 되는데, 그러면 그 기특한 막내에게 WBC 결승전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돌려줄 수 있는데, 자신의 투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데,
‘젠장…’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선두타자 지채민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수비로 나섰던 이세원이 초구를 건드려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격보다는 내외야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수비력을 인정받아 대표팀에 뽑힌 신태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안 되는 건가, 기적은 없는 건가. 결국 이 상태로 9회 말로 들어가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거나, 혹은 꿈도 희망도 없는 승부치기로 돌입해야 하는 건가.
감독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던 그때,
따악!
“앜!”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신태영이 친 타구가 자신의 발목을 강타했고, 벌겋게 부어오른 복사뼈에 트레이너의 고개가 좌우로 저어졌다.
덕아웃을 돌아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신 내보낼 타자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배트를 들고 그라운드로 올라가고 싶을 정도였다.
남는 투수 중 아무에게나 헬멧을 씌워 올려보내야 하나,
고영배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오려던 그때,
부웅
부우웅
누군가 보란 듯이 배트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력시위를 하듯, 있는 힘을 다해 배트를 돌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음, 강시원!”
“네! 감독님!”
그건 바로 강시원이었다. 이번 대회 중간계투 요원으로 선발되었지만 선배들에게 밀려 일본전 딱 한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한, 심지어 그 경기에서 역전타를 허용하며 고개를 떨궜던 1년차 신인, 도준우의 동기이자 친구.
그런 강시원이 감독의 앞에 섰다.
“할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독님.”
“좋아, 나가봐. 결과가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네 스윙을 하고 돌아와.”
“알겠습니다!”
0대 0 동점, 9회 초 한국 팀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고등학교 시절,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도준우보다 오히려 한수 위라 평가받던 강시원이 타석에 들어섰다.
**
└ 내가 강시원 이놈 뽑아갈 때부터 뭔가 쌔하더니 진짜 좆 될 뻔했네
└ 시발 도준우 없었으면 바로 게임 터지고 또 1라운드 탈락이었음
└ 애초에 저런 놈을 뽑은 감독이 문제임. 좌타자 막으라고 올려보냈는데 바로 적시타를 쳐맞는다? 개쓰레기임
└ 저런 새끼 대표팀에 꼭 뽑아야한다고 국민청원 올렸던 대전 놈들 진심 반성해라. 너희들이 대한민국 야구를 좆 되게 만들 뻔 했으니까
└ 강시원 저거 꼴에 또 도준우랑 친하다며? 정신 차려라. 친구 발목 잡지 말고
일본과의 1라운드전이 끝난 후 강시원은 자신의 SNS 계정을 폐쇄했다.
다른 욕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도준우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에 제대로 긁혀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건 욕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많이 아프고 쓰라리긴 하지만 냉정한 현실일 수도 있었다.
도준우에게는 한참 못 미치지만 올 시즌 전반기 투타 겸업을 하며 0.271, 0.334, 0.388의 슬래시 라인에 7홈런 40타점, 11도루, 거기에 4.01의 평균자책점에 5승 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나름 뿌듯했다. 이 정도면 1년차 신인으로서는 자랑스러워해도 될 성적이라 생각했다. 도준우라는 규격 외의 동기에 묻히긴 했지만 분명 좋은 성적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표팀에도 합류했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안고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패망했다. 또한 깨달았다.
일본과의 1라운드 예선전, 마운드에 올라보니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동기와 선배들이 어떤 상대와 싸우고 있는지, 어떤 압박감 속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역전 적시타를 맞았고 그대로 강판 당했다. 도준우의 역전 끝내기 홈런이 없었다면 자신은 1라운드 탈락의 원흉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플레이!”
무엇보다 강시원이 실망한 건, 스스로가 정말 싫어진 건,
저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을, 이번 대회 한국 팀을 이끌고 있는, 혼자 힘으로 이 팀을 떠받들고 있는 동기, 혹은 친구,
녀석을 도와주지 못해서다. 아니, 도와주기는커녕 자꾸 발목을 잡아대서다.
오늘 경기에서 녀석은 일본 팀 투수가 두 번 바뀌는 동안 혼자서 마운드를 지켜내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일이었다는 듯,
그런데 나는?
일본전에서의 실패 이후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채 쓸쓸히 벤치를 지키고 있다. 이 상태라면 오늘 경기에 이기든 지든, 더 이상 자신이 마운드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치고 싶다. 어떻게든 여기서 한 방을 때려내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다.
뻐어엉
“스트라이크!”
마운드에는 일본 대표팀이 자랑하는 마무리 투수 3인방 중 하나인 좌완 와타나베 켄이 올라와 있다. 원래대로라면 164km/h의 구속을 자랑하는 모리 타쿠야가 먼저 올라와야겠지만 지난 1라운드 경기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인 탓인지 전력에서 제외된 것 같다.
모리 타쿠야의 공보다는 덜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155km/h를 넘나드는 포심과 135km 체인지업, 거기에 파워 커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수호신이다. 어쩌면 강시원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그런 투수일 수도 있다.
뻐어엉
“볼.”
좌투수가 좌타자에게 던지는 몸 쪽 155km/h 포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끔찍하다. 솔직히 말해 이걸 어떻게 쳐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딱!
“파울!”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파워커브에 배트를 대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각이 얼마나 큰지 배트에 맞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관중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저기 멀리 덕아웃에 앉은 감독과 코치, 동료들의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린다.
다들 내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겠지, 이대로 경기가 끝날 거라 생각할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 나는 강시원이다.
한때 저 대단한 도준우마저 발아래 두던, 타격에 있어서 역대급 재능을 가졌다 평가받던 천재타자다.
때린다, 때려낸다.
드륵
그립을 짧게 잡고 투수와 눈을 맞췄다. 이번 공이 얼마나 중요한지 투수도 알고, 타자도 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강시원은 생각했다.
과연 어떤 공이 들어올 것인가. 닳고 닳은 마무리 투수가 바싹 얼어붙은 1년차 신인 타자를 상대로 어떤 승부구를 고를 것인가.
‘체인지업’
그냥 직감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했기에 확률이 가장 높은 쪽을 골랐을 뿐이다.
좋다. 일단 구종을 선택했으니 나머지 공에 대한 생각은 버린다. 포심, 커브, 그 공은 없는 공이다.
강시원의 타격 매커니즘이 체인지업에 맞춰 변경되었다. 공을 맞추는 능력만큼은 한국 고교야구 역대급이라 불리던 어린 천재가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 체인지업을 치기 위한 모드에 돌입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7월에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바람이 강시원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와타나베 켄의 발이 힘차게 솟구쳤다. 일본 야구를 상징하는 좌완 마무리 투수의 손끝에서 하얀 공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강시원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숨을 들이킨 강시원이 체인지업의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발사시켰다. 어차피 도박이었다. 만약 이 공이 포심이나 커브라면 배트는 허공에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따아아악!
강시원의 도박이 성공했다. 1/3이라는 확률을 뚫었다. 배트 한 가운데 정확히 맞은 타구가 우중간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뛰어! 강시원! 뛰라고!”
“뭐해! 임마!”
아주 잠깐 얼어붙었던 강시원이 동료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한 질주를 시작했다. 가속이 붙은 강시원이 1루를 돌아 2루, 다시 3루로 질주했다.
“우아아아!”
“빌어먹을! 끝내주는군!”
“달려! 꼬마! 달리라고!”
외야 우측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시원은 직감했다. 타구가 날아간 곳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강시원은 보았다. 저 멀리 3루 베이스 코치의 얼굴에 떠오른 망설임을.
탓
“어어어!”
“강시원!”
강시원의 판단은 정확했다. 기형적인 구조를 가진 깊고 울퉁불퉁한 시티필드의 우측 외야가 한 건을 해냈다. 우익수가 달려간 반대방향으로 타구가 튀었고, 스탭이 꼬인 우익수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막아! 막으라고!”
“뚫어! 강시원! 강시원!”
양 팀 덕아웃의 선수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고함을 질러댔다. 한 점 차 승부가 예상되는 경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선수들을 흥분시켰다.
타앗
공이 내야로 중계되었다. 송구를 받은 포수가 곧바로 태그를 시도하고, 그와 동시에 강시원의 손이 홈플레이트를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경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판정이 내려졌다.
“세이프! 세이프!”
“우아아아아!”
“됐어! 됐다고!”
인사이드파크 더 홈런,
길고 지루하던 0의 행렬이 마침내 끝났다. 정말 필요한 순간, 가장 필요한 홈런이 터졌다.
경기장에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자신이 뭘 해냈는지 실감하지 못한 강시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안겼다.
그런 강시원을 보며 최진수가 씨익 미소지었다.
“저길 봐, 인마. 네가 한 짓을 보라고.”
“네?”
선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것을 본 강시원이 비로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전광판 디스플레이에서 방금 전 자신이 한 플레이가 재연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엄청난 전율이 밀려왔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님, 이, 이거 꿈 아니죠? 진짜 제가 홈런 친 거 맞죠?”
“그래, 인마! 맞아! 그러니까 웃어! 나가서 팬들한테 인사도 다시 하고.”
“우아! 우아! 우아아! 네! 그럼 전 잠시! 여러분! 접니다! 제가 홈런 맞았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쳤어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심판이 제지할 때까지 폴짝폴짝 난리법석을 떨던 강시원이 마침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전광판에 새겨진 ‘1’이라는 숫자가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그 순간을 음미하는 강시원, 그런 강시원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응?”
도준우였다. 마지막 투구를 앞둔 친구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했다.”
“그게 다야? 좀 더 찬양해주면 안 되나?”
“됐고, 너, 중견수로 들어가야 하는데, 수비는 가능하냐?”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안 될 거 같으면 말해. 내가 중견수로 들어가고, 네가 대신 던지면 되겠네.”
“싫어, 이 미친놈아! 누굴 대역죄인으로 만들려고! 중견수 쪽으로 오는 공은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아낼 테니까 빨리 마운드로 꺼져! 저 망할 놈들을 박살내라고!”
“그래? 알았어. 불안하긴 한데 한 번 믿어보지.”
대표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두 막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WBC 결승으로 향하는 길목,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지막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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