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eased pitcher returns as a diamond RAW novel - Chapter (28)
방출당한 투수가 금강불괴로 돌아옴-28화(28/172)
28화. 두번째 데뷔타석
내가 기억하는 이 팀의 개막전 풍경은 그랬다.
매년 바닥을 기는 순위였기에 장소는 언제나 홈구장이 아닌 원정 구장이었고, 선수들의 얼굴에는 의욕이 아닌 체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패배의 기운이 가득한 덕아웃, 타이탄스 유니폼을 입은 누군가가 말했다.
‘후딱 끝내고 뽈찜에 소주 한 잔 하러 가시죠, 형님. 제가 손님 거의 없는 맛집 하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누군가는 이렇게 받아쳤다.
‘야, 대충대충 해.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주냐? 오늘부터 144경기나 해야 하는데 개막전이라고 특별히 신경 쓸 거 없어.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팬? 시발, 팬이 우리 밥 먹여주냐?’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배달 가능한 짱깨 집 아는 사람? 쯧, 경기 전에 덕아웃에서 먹는 짬뽕이 지대론데. 야! 막내야. 너 나가서 주변에 중국집 있나 찾아봐’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선수 1’에 불과했다.
년차를 따지기엔 같은 학교 선배들이 너무 많았고, 내세울 커리어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난 그저 방관자였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패배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도준우! 도준우! 도준우!”
“마! 준우야! 너 공 죽이드라! 아재가 너 격하게 사랑한다!”
“부산 사나이의 기백을 보여줘! 창원 놈들을 박살내라고!”
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내 이름을 외친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다은이, 거기에 다은이의 부모님까지,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거운 표정으로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삶에서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이 여기 다 있었다.
그렇기에 난 오늘 경기를 꼭 이기고 싶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야, 최호석.”
“응?”
“어금니 꽉 깨물고, 정신 바싹 차리고.”
선배들을 쫄 수는 없으니 만만한 호석이 놈부터 정신 차리게 만들고,
나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흠, 우리 막내. 굳어있을 줄 알았는데 선배들보다 낫네.”
“내 말이, 우리만 걱정하면 되겠는데?”
“야, 준우야. 나한테는 뭐 해줄 말 없냐?”
눈이 마주친 선배들이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들을 던져온다.
해줄 말이라… 솔직히 말하면 아주 많다.
제발 몸이 나가기 전에 다음 플레이를 어떻게 이어갈지 생각 좀 하라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지 말고,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하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별 말씀을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경기 전 감독이 팀 분위기를 제대로 끌어올리긴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은 창원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앞서는 건 단 하나,
“타-이-탄-스-!”
“타이탄스! 타이탄스! 타이탄스!”
앞뒤 가리지 않고 우리를 응원하는 홈팬들의 열기뿐.
그 열기를 등에 업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2027 개막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
한 야구팬이 말했다.
야구가 대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만드냐고,
그 말을 들은 부산 야구팬이 대답했다.
진짜 미친 사람들을 보고 싶으면 사직구장으로 찾아오라고.
언제부터 부산 사람들이 이렇게 야구에 미치게 되었는지는 확인불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누군가의 말처럼 사직 구장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여기,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직구장에만 오면 미쳐 날뛰는 사람이 있었다.
창원 랩터스의 주전 유격수이자 리드오프인 황재용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타이탄스의 내야를 지키던 핵심선수였다.
하지만 FA 자격을 얻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원으로 이적한 탓에 부산 팬들에게는 배신자로 불리고 있다.
중요한 건 그가 배신자라는 게 아니었다. 부산 유니폼을 입고 있던 시절부터 사직 구장에서만큼은 그 어떤 타자도 부럽지 않을 만큼 엄청난 성적을 거두던 황재용은 창원으로 팀을 옮긴 후에도 사직 구장만 오면 훨훨 날아다녔다.
지난 시즌 사직에서 치른 8번의 경기에서 그는 타율 0.489, 홈런 6개를 쏘아 올리며 창원이 부산을 14승 2패로 누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사직에서 날린 6개의 홈런은 그의 시즌 전체 홈런 9개의 2/3에 달하는 것이었다.
그런 황재용이 타석에 들어서며 타이탄스 포수 김종배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요즘 분위기 뒤숭숭하다면서요? 경식 형님은 서울 가서 잘 지내신대요?”
“몰라. 이 새끼야. 입 닫고 야구나 해.”
“어이쿠, 우리 형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왜요? 저 외국인 감독이 뭐라고 해요? 아니면 신인 애들이 겁 없이 기어오르기라도 해요?”
“닥치라고.”
“넵, 죄송합니다. 형님. 그럼 야구만 하겠습니다.”
“시발…”
멀쩡하던 포수의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찼다. 반대로 황재용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타이탄스에서 함께 뛰었기에 누구보다 저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한 팀의 주전포수를 맡기엔 너무 단순하고 무식한 인간이다. 감독과 코치, 프런트의 밀어주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주전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사람이다.
황재용이 사직구장에서 강한 모습을 보인 데는 저 단순무식한 선배 포수의 공이 상당히 컸다.
오늘도 첫 타석부터 상대 주전포수의 심기를 잔뜩 어지럽히는데 성공한 황재용이 자세를 잔뜩 낮추고 투수를 노려보았다.
‘투심하고 커터가 꽤 쓸 만 했지. 어쨌든 빠른 공이다 이거군’
지난 시범경기에서 확인한 타이탄스의 새로운 용병 투수는 빠른 공을 무기로 타자를 밀어붙이는 그런 타입의 투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선구안 하나 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있는 황재용이 공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파앙
“볼.”
파앙
“볼.”
따악!
“파울!”
파앙
“볼.”
“Fuck!”
벗어나는 공은 골라내고, 존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가볍게 걷어내다 보니 투수의 입에서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 나왔다.
극성스러운 홈팬들의 아우성, 흥분한 배터리,
다음 공이 뭐가 들어올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삼진을 잡기 위한 빠른 공, 혹은 제구에 실패해 엄한 곳으로 날아가는 공.
‘좋아’
배트를 가볍게 잡은 황재용이 포심에 타이밍을 맞추고 공을 기다렸다.
이윽고 투수의 손끝에서 발사된 공이 존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살짝 빠진 코스를 향해 맹렬히 빨려 들어왔다.
치기 딱 좋은 코스다.
“흡!”
반 박자 타이밍을 늦추며 2루수 쪽을 향해 가볍게 밀어쳤다.
따악!
성공이다. 2루수 키를 넘어 우익수 앞에 살짝 떨어지는 타구가 만들어졌다.
안타임을 확신한 황재용이 가벼운 걸음으로 1루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도 역시 손쉬운 승리가 될 거라 생각하며.
그런데,
슈우우우웅
“어어어어?”
“뭐야?”
파앙
“아우웃!”
“우아아아! 이게 대체 뭐야!”
“미친! 우익수 앞 땅볼로 만든 거야?”
“크크크, 크하하하, 봤나! 마 다들 봤나! 이게 바로 도준우다!”
“도준우! 도준우! 도준우!”
미리 전진수비를 해 있던 도준우가 자신의 앞에 떨어진 타구를 원바운드로 잡았다. 그리고 잡자마자 1루를 향해 전력으로 송구해 타자주자를 아웃시켜버렸다.
순식간에 안타 하나를 도둑맞은 황재용이 멍한 표정으로 도준우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자신이 발보다는 선구안으로 리드오프를 꿰찼다고 해도, 안타임을 확신한 나머지 아주 약간 설렁설렁 뛰었다 해도.
그 타구를 치고 1루에서 아웃됐다고?
똥 씹은 표정이 된 황재용이 전광판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전 도준우가 보여준 슈퍼 플레이와 함께 송구의 속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169.5km/h, 아무리 도움닫기를 했다 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숫자가 전광판에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야… 시발, 진짜 미친 새끼인가.”
**
– 아아아! 이게 대체 뭔가요! 정말 대단합니다! 안 그런가요, 김상식 위원님?
– 감탄 밖에 안 나옵니다. 전진수비를 했던 도준우 선수가 안타를 아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몇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엄청난 플레이를 도준우 선수가 보여줬습니다!
– 네, 이런 광경은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에서나… 사실 전력질주를 안 한 타자의 잘못도 있지만 지금 플레이는 도준우 선수를 칭찬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부산 팬들이 정말 좋아하시네요. 아직까지도 자리에 앉지 않고 기립박수를 치고 계시는군요
– 그럴 수밖에 없죠. 그간 황재용 선수에게 당했던 기억들이 오늘 저 플레이 한 번에 다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요. 아무튼 엄청납니다! 대단해요!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있어 운이 7, 노력이 3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잘난 놈도 운 좋은 놈은 못 이긴다는 말도 있다. 결론적으로 성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운이라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정식 해설위원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사직 구장 개막전 경기 중계를 맡게 된 김상식은 여러모로 운이 따르는 인물이었다.
이런저런 행운이 겹치며 난생 처음 지상파 개막전 중계를 맡게 되어 기분이 한껏 들뜬 김상식이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도준우를 칭찬했다.
– 솔직히 말하면 오늘 경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야구팬들, 그리고 전문가들이 창원 랩터스의 일방적인 우세를 점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 시즌 14승 2패라는 처참한 상대전적도 그렇고, 스토브리그 동안 전력보강 역시 랩터스 쪽이 훨씬 충실했죠. 솔직한 말로 타이탄스는 오히려 약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요
– 음, 그런 면이 좀 있긴 하죠
–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걸 한 가지 잊고 있었네요. 타이탄스에는 도준우 선수가 있다는 걸 말이죠. LA 다저스 전의 영웅! 부산, 아니, 대한민국 야구의 미래, 도준우 선수 말입니다!
– 저기 위원님, 일단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시고…
중계불가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김상식을 아나운서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오늘 경기 전 아나운서국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김상식? 걔랑 개막전 중계를 한다고? 야, 마취총이라도 하나 준비해. 그 인간, 잠깐 눈 떼면 이상한 소리 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1회부터 이럴 줄은 몰랐다.
다행이 심판의 경기속행 명령과 함께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며 김상식의 주접 역시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따악!
“아웃!”
– 이야, 라이언 선수 공 방금 공 정말 좋네요
– 네, 156km/h가 찍혔네요. 제구도 아주 좋았고요. 저 정도면 KBO 타자들에게는 거의 마구나 마찬가지죠. 타이탄스가 정말 좋은 투수를 데려왔습니다
도준우의 플레이에 힘을 얻은 것인지 라이언이 다음 타자를 공 하나 만에 깔끔한 범타로 잡아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들어선 랩터스의 3번 타자마저 삼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순식간에 이닝 종료.
자칫 선취점을 내줄 뻔한 상황이 도준우의 활약에 힘입어 삼자 범퇴로 끝났다.
오늘 경기도 쉽게 풀릴 거라 예상했던 랩터스 선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수비 위치로 달려 나갔고, 타이탄스의 리드오프 신현석이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선두타자가 반드시 출루해야 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신현석이 몸 쪽으로 날아든 공을 강하게 받아쳤다.
잘 맞은 타구가 좌측 펜스를 향해 쭉쭉 날아갔다. 하지만 펜스를 넘기기에는 힘이 조금 부족했다.
“아웃!”
전력을 다해 질주한 좌익수 글러브에 공이 빨려 들어갔고, 신현석이 입술을 꽉 깨물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2번 타자 중견수 강재호>
오늘 따라 눈에 승부욕이 이글거리는 베테랑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선 후배에게 기회를 넘겨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부웅
“스윙! 아웃!”
벌써 3년 째 랩터스의 에이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병 1선발 제레미 콜린스의 벽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삼구 삼진.
야구는 기세 싸움이며 분위기 싸움이다. 잠시나마 타이탄스 쪽으로 기울던 경기 분위기가 급격하게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부산 팬들은 더욱 더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준우야! 한 방 날려라! 너만 믿는다!”
“도준우! 제발!”
“창원 놈들 한 번만 잡아보자! 딱 한 번만!”
관중들의 애탄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3번 타자 우익수 도준우>
기나긴 시간을 건너 뛰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도준우의 두 번째 데뷔 타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