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eased pitcher returns as a diamond RAW novel - Chapter (41)
v방출당한 투수가 금강불괴로 돌아옴-41화(41/172)
41화. 좋은 게 좋은 거
지난 삶에서 내가 기억하는 강재호 선배는 좋게 말하면 야구밖에 모르는 수도승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일 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방관주의자였다.
이제 와 생각하면 진산고와 경서고 파벌이 벌이는 세력싸움에 끼지 않으면서 주전 자리를 보존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납득이 가긴 한다. 정치질 없이 라인업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어떻게든 성적을 냈어야 했을 테고, 선수 한 둘이 뭘 하든 바뀔 게 없는 팀 분위기에 좌절했을 수도 있다.
그러던 사람이,
“준우야! 봤냐!”
많이 바뀌었다. 덕아웃에서 후배들을 독려하기도 하고, 먼저 나서서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잘 대지도 못하는 번트를 대고 흙투성이가 되어 그라운드를 뒹군다.
홈런을 치고도 표정에 별 변화가 없던 사람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안다니.
저런 사람이 입 닫고, 귀 닫고 야구만 하게 만들었던 회귀 전 타이탄스라는 팀은 대체 어떤 팀이었던 걸까.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잔재를 떠올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야, 신입. 강재호 저 새끼한테 전해. 너무 나대지 말라고.”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이 새…”
“심판님.”
“왜.”
“야구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흠, 용섭아. 들었지? 그만 입 다물고 야구만 하자. 선후배끼리 할 말 있으면 경기 끝나고 따로 하든지 하고.”
“…이 새끼 봐라?”
광주 재규어스의 주전포수이자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꼰대로 유명한 민용섭의 입을 심판의 권위를 빌려 틀어막았다.
예나 지금이나 시끄러운 놈이다. 입만 산 놈이다. 지금은 저런 놈의 주절거림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가뜩이나 엉망인 내 평판이 떨어지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다른 팀 선후배들과 친목 하려고 야구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지금 이 순간, 오진철 선배와 강재호 선배의 헌신으로 만들어낸 찬스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을 뿐이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노력중인 동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꾸욱
4회 그레고리에게 2루타를 내준 걸 제외하면 시종일관 타이탄스 타선을 압도해온 용병 에이스가 갑작스런 분위기 변화에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다.
투수는 예민한 동물이다. 특히 선발투수는 거의 미친 놈 수준의 예민함을 자랑한다. 그런 놈들이 경기가 잘 안 풀리면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나 역시 투수니까.
그런 의미에서 노아 클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 다저스 마이너 출신 투수의 머릿속에는 나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싶은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삼진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초구 스트라이크가 중요하다.
구속과 구위에 비해 제구력에서는 별다른 장점이 없는 투수.
그렇다면 노린다.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들어올 밋밋한 포심을.
스륵
얼마 전 타격코치가 한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내 타격에는 아직 일관성이 없다. 과감함이 부족하다. 망가진 육체로 억지로 선수생명을 연장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타석에서는 누구보다 과감해져야 한다. 그것이 나와 팀을 위한 길이다.
투수의 손에서 떠난 야구공이 포수 미트에 도착하는 시간이 대략 0.4초. 근육을 움직여 배트를 휘두르는데 필요한 시간이 0.2초.
결국 타자는 투수가 공을 던진 순간으로부터 0.2초 내에 공을 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아주 작은 망설임조차 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으득
이를 악물고 투수의 손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주자에 대한 견제보다는 명백히 나와의 승부에 모든 걸 집중한 투수에게서 하얀 공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나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에 공이 맞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회귀 후 내내 달고 다닌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열망, 일말의 불안감, 성공이라는 목표,
모든 것을 잊은 채 정말 순수하게 스윙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따아아아아아아악!
나도 깜짝 놀랄 만큼 큰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총알같이 날아갔다.
좌익수 머리를 지나, 펜스를 넘어, 관중석 최상단을 스치듯 비행한 타구가 경기장 외벽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커헉!”
“시발! 저거 어디까지 가냐! 미쳤냐!”
“마! 재규어스 촌놈들아! 봤나! 이게 바로 부산사나이의 기백이다!”
“Fucking Great!”
“도주누! 이 괴물 같은 녀석!”
“도준우! 준우! 너 임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여전히 타석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서 베이스를 돌라 소리 지르는 관중들, 당장이라도 덕아웃에서 뛰어나올 것 같은 표정의 감독과 동료들, 그리고 적대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는 재규어스 포수까지.
그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쿵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원정 응원석에서 또 한 번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야구에 미친 인간들이다. 평일 저녁에 부산에서 광주까지 야구 하나 보겠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응원해주는, 내가 못할 때나 잘 할 때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야구선수 도준우를 지지해주는 팬들이다.
꾸벅
헬멧을 벗고 원정응원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수 소리가 멈출 때까지, 심판의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쏟아지는 박수 속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
<한순간에 경기를 뒤집은 거대한 장외 홈런, 5타수 2안타 1홈런 3타점 맹타 도준우, 경기 MVP 선정>
<소감을 묻는 질문에 도준우 “오늘 경기의 진짜 주인공은 1군 무대 첫 안타를 친 오진철 선배, 프로 첫 기습번트를 성공시킨 강재호 선배, 그리고 8이닝을 2점으로 막아낸 최도윤 선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실력과 함께 인성까지 갖춘 KBO의 새로운 슈퍼스타>
<1군 무대에서 첫 안타를 신고한 중고신인 오진철 “현석이의 부상이 크지 않아 다행이다. 팀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실수하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하겠다” 각오>
<승부의 분수령이 됐던 기습번트의 주인공, 타이탄스의 캡틴 강재호 “상대 투수의 공이 너무 좋았기에 그때는 번트가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런 공을 장외로 날린 준우가 너무 기특하고 대견할 뿐”>
<연패 탈출에 성공한 부산 타이탄스, 9승 4패로 다시 단독 2위로 올라서>
<개막 후 13경기에 선발 출장해 63타석 49타수 19안타, 홈런 7개 도루 4개, 13득점, 17타점 기록한 부산 타이탄스 도준우, 홈런, 타점 1위, 타율 2위(0.388), 출루율 1위(0.524), 장타율 1위(0.898), OPS 1위(1.422) 등 타격 전 부문 상위권 질주>
<일각에서 제기된 도준우의 인성에 대한 소문, 신인치고 너무 건방지다? 과연 출처는 어디?>
<사상 최강의 신인을 갖게 된 부산 타이탄스 팬들 “누구든 우리 준우 건들면 다 죽여버릴 것” KBO 10개 구단에 경고>
└ 진심을 담아 말하는 건데 44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으면 도준우 그냥 둬라
└ 홈런 치고 세레모니 좀 했다고 재규어스 민용섭 그 꼰대 새끼가 기자들한테 입 턴 거 같은데 이제부터 타이탄스 갤러리의 주적은 민용섭이다
└ 3일 전에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했다. 알바 면접 보러갔더니 나이 많다고 꺼지라고 하더라,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은 코인에 넣었다 다 날아갔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서 생을 마감할까 하다가 도준우 홈런 보고 간신히 마음 다스렸다. 누구든 나랑 같이 물귀신 되고 싶은 놈 있으면 얼마든지 떠들어봐
└ 워;; 꼴빠 새끼들 겁나 무섭네
└ 민용섭 그 새끼는 우리도 극혐이라 실드쳐줄 생각없음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음? 타이탄스 갤러리? 야, 그런 거 그만 보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
“너 2학년 여름방학 합숙 때 숙소 에어컨 박살낸 거 내가 감독님 앞에서 커버 쳐준 거 기억나지?”
“뭔 소리야, 아… 그거? 생각났다. 야, 그거 누가 고장 내놓은 거 내가 리모컨 한 번 만졌다가 덤터기 쓴 거잖아. 그리고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
“네가 남자의 의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아무튼 기억하는 것 같으니 됐고. 야, 어제 너 훈련 끝나고 경기장 나갈 때 다은이랑 같이 왔던 그 아리따운 여자 분은 누구냐.”
“분은 무슨, 다은이 사촌이잖아. 내가 말 안 했나? 타이탄스에 미친 인간이 하나 있다고. 고등학교 때도 걔네 둘이 가끔 우리 학교 경기 보러 왔잖아. 기억 안나?”
“아아… 맞다! 맞네! 그 분이 그 분이구나! 우와… 대학생 되더니 엄청 이뻐졌구나!”
“됐고, 그런데 걔는 왜?”
“흠, 친구. 우리 관계에 대해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군.”
“뭐…?”
“이제는 친구를 넘어 한 가족이 되 보는 건 어떠할지…”
“싫어. 뭔 소린가 했네. 꺼져, 이 미친놈아.”
호석이 놈의 헛소리를 뒤로 하고 그라운드로 나섰다.
광주 재규어스와의 1차전에서의 승리로 연패를 끊어낸 우리 팀은 이어진 2차전과 3차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하며 위닝 시리즈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시즌 성적 10승 5패, 단독 2위,
예상치도 못한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봄탄스라는 비아냥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 팀에 속한 사람들 모두 느끼고 있다. 지금 성적이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걸,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걸.
그렇게 원정 9연전을 마감한 우리는 다시 홈으로 돌아와 서울 파이터즈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따아악!
따아아악!
원정팀 파이터즈가 먼저 훈련을 끝내고, 우리 팀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컨디션은 최고다. 원래 타격감이란 게 기복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할 정도로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는다.
따악!
따아악!
배팅 연습을 끝내고 덕아웃 난간에 기대있는데 강재호 선배가 다가와 음료수를 건넸다.
“준우야. 이거 하나 마실래?”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 오늘도 컨디션 좋아 보이네.”
“네, 괜찮은 거 같아요.”
“좋아, 다행이네. 그런데 음… 내가 부탁 하나만 하고 싶은데…”
“부탁이요?”
“이번 3연전 동안은 우리 몸 좀 사리는 걸로 하자. 혹시 홈런 치더라도 세레모니도 좀 자제하고, 저쪽 포수들이 말 걸면 그냥 대답하지 말고 무시해버려. 시비 붙어봐야 우리 팀만 손해거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안다. 무슨 말인지.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저 멀리 원정팀 덕아웃에서 쏘아지는 눈길에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니까.
오경식과 이재석, 지난 스프링캠프 도중 파이터즈로 트레이드된, 아니, 쫓겨난 과거 이 팀의 실세이자 내 고등학교 직속 선배들이 저기 서 있다.
방금 전 강재호 선배를 비롯해 몇몇 고참급 선수들이 찾아가 인사를 했지만 아예 못 본 척을 했다더니, 지금은 훈련 시간 내내 저기 서서 우리 선수들을 노려보고 있다.
미친놈들이다. 솔직히 말해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처럼 팀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쓰레기들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건 사양이다.
잘 나가고 있는 2위 팀과 끝도 없이 추락중인 최하위 팀 간의 경기, 여기서 괜히 시비가 붙으면 손해 보는 건 무조건 우리다.
강재호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선배님.”
“그래, 하, 선후배 관계라는 게 참 웃기지? 어쨌든 저 사람들도 한때 우리 팀이었으니까 좀 더 신경 써주는 셈 치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 그래, 참 좋은 얘기다.
상대편도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말이지.
“알겠습니다. 선배님.”
“오냐, 고맙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그렇게 좋게 끝날 거 같지가 않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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