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eased pitcher returns as a diamond RAW novel - Chapter (73)
방출당한 투수가 금강불괴로 돌아옴-74화(73/172)
75화. 부끄럽지 않게
–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왜 선발이 도준우가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저 역시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오판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급 타선을 자랑하는 푸에르토리코를 4이닝 1실점으로 막아낸 이용훈 선수가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한국 응원석, 그리고 여기 필라델피아 현지 팬들까지 모두 일어나 큰 박수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정말 잘 던졌습니다!
– 대단한 호투였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이용훈 선수의 투구 중 오늘이 베스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 구 한 구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습니다. 수비수들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저런 플레이가 가능했나, 제 눈을 의심할 정도의 플레이들이 계속 터져 나온 게임이었습니다
– 자, 이렇게 되면 고영배 감독의 노림수가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습니다. 4회 초까지 단 한 점만을 내준 상황에서 이제 4회 말 대한민국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 네, 역시 프로팀 감독 시절 수없이 많은 큰 경기를 치렀던 승부사답습니다. 한 점 뒤진 상태지만 경기 분위기는 팽팽한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이번 이닝 공격이 도준우 선수부터 시작되니 더더욱 기대해볼 만합니다
– 그간 리드오프로 출전하던 도준우 선수가 오늘 3번 자리로 온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죠. 자, 그럼 4회 말 한국의 공격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도준우 파이팅!”
“한 번 해보자!”
운동선수에게는 가끔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플레이가 가능해지는 그런 순간.
어쩌면 우리 팀 선수들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날일지도 몰랐다.
푸에르토리코는 강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이용훈 선배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투구를 선보였다. 공 하나만 삐끗해도 바로 장타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한 구, 한 구,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선의 공을 던졌다.
수비수들도 도왔다. 팬들로부터 라면수비라는 비아냥을 받던 선수가 흙투성이가 되어 그라운드를 굴렀고, 행여 부상을 입을까 몸을 사리던 선수가 타구를 잡기 위해 펜스에 몸을 던졌다.
그 결과 우리는 4회 초까지 단 한 점만을 뒤진 채 경기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오늘 우리 팀을 상대로 완벽한 호투를 선보였던 푸에르토리코의 에이스가 한계투구 수에 걸려 마운드를 내려갔다.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그 투수를 상대로 점수를 내는 게 아니었다. 지난 시즌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투표 3위에 빛나는 선수를 상대로 승부를 거는 건 여러모로 어리석은 일이었으니까.
대신 우리는 투구 수를 늘리는데 집중했다. 최대한 볼을 골라내고, 존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커트해내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결국 3회 말까지 8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게 하는데 성공했다.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투수의 투구 수라고는 믿기 힘든 숫자였다.
“플레이!”
물론 투수가 바뀌었다고 해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해야 할까.
마르코 알바레스, 올 시즌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1선발로서 전반기까지 평균자책점 3.56에 9승을 올린 투수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단 하나, 우리가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건 저 투수의 최고 구속이 152km/h 내외라는 거다. 160 가까운 공을 펑펑 뿌리던 전 투수보다는 그나마 눈에 익은 공을 던진다는 것이다.
파앙
“스트라이크!”
초구를 그냥 흘려보냈다. 94마일, 151.3km/h. 역시나 공 자체는 아주 빠르진 않다. 다만 문제는 저 특유의 테일링이다.
포심에 테일링이 걸리는 게 좋다 나쁘다가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면 투심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역회전이 걸린다. 그냥 포심이라 생각하고 휘두르다가는 백이면 백 범타가 나올 것이다.
배터 박스에서 반 보 뒤로 물러나본다. 이러면 바깥 쪽 공에 대응하기 어려워지겠지만 저 공을 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투수의 눈빛이 상당히 흉흉하다. 아마 저건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팀 전체에 대한 경계심, 혹은 전력상으로 한수 아래인 팀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에 대한 짜증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 짜증이 어쩌면 제구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테니까.
파앙
“볼.”
투심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포심과 함께 마르코 알바레스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에이스로 만들어준 공,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고속 슬라이더가 볼 판정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몸 안쪽으로 말려들어오는 포심과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고속 슬라이더의 조합은 사기에 가깝다. 다만 한 가지 다행인 건 저 공의 제구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거다. 즉, 볼이 될 확률이 높기에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그 어떤 대단한 타자도 그라운드에 서면 팀의 1/9일 뿐이다. 동료들은 짐이 아니다. 내가 믿고 의지해야 할 존재다.
스륵
마음을 비우니 몸이 한층 가벼워진 것 같다. 회귀 후 새롭게 얻은 이 육체는 내구성 외에도 컨디션 유지라는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나 최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축복받은 존재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차례다.
목표는 출루다.
어차피 폼만 봐서는 구종을 예측하는 게 힘든 투수다. 간혹 던지는 체인지업은 그나마 구분이 되긴 하지만 포심과 고속 슬라이더의 릴리스 포인트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둘 중 어느 쪽일까, 포심, 슬라이더, 포심, 슬라이더,
그래, 포심으로 하자.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들어주길 빌며,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탓
곧바로 스윙을 시작했다. 몸 쪽으로 말려 들어올 포심의 궤적을 떠올리며,
그리고,
따아아아아악!
내 예상이 맞았다. 투수는 포심을 선택했고, 나는 그 공을 제대로 받아쳤다.
다만 내 예상이 하나 빗나간 것은
터엉
안타를 노리고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갔다는 거였다.
– 어, 어, 어, 공이 계속! 계속! 뻗어! 넘어! 갔습니다! 으아아아! 홈런! 홈런입니다! 도준우 선수의 동점 솔로 홈런! 대한민국 대표팀이 4회 말 공격에서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 아, 진짜, 이건 정말, 이렇게 되면 분위기도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푸에르토리코는 에이스를 선발로 냈고, 우리는 4선발이 나섰죠? 그런 경기에서 경기 중반까지 앞서지 못했다는 건 푸에르토리코로서는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요
– 대단합니다!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돈 도준우 선수가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갑니다. 1대 1 동점! 이제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
“병관아,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쯧, 방금 너무 가식적이었지?”
“네, 코치님. 엄청요.”
“흐흐, 그래. 그냥 솔직히 말하마. 최선을 다해 던져다오. 힘에 부친다 싶으면 바로 다음 투수 올려 보낼 테니까 전력 피칭으로, 내 말 이해했지?”
“해보겠습니다.”
코치의 농담에 조금이나마 어깨가 가벼워진 박병관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나갔다.
도준우의 솔로 홈런으로 1대 1 동점이 되었지만 더 이상의 추가점은 없었다. 큰 것 한 방이 오히려 자극제가 된 것인지 푸에르토리코의 투수는 무지막지한 무브먼트를 가진 포심과 슬라이더로 뒤 타자 세 명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결국 경기는 이제부터라는 뜻이고, 4회이긴 하지만 선발이라는 마음으로 던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가자! 파이팅!”
“파이팅!”
내외야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격려, 그 안에 섞인 도준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박병관은 생각했다.
그는 이재석과 친구다. 아니, 솔직히 말해 친구라 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같은 해 프로에 입단한 동기로서 비시즌에 모임이 있을 때 한두 번 얼굴을 보는, 딱 그 정도 사이다.
그런 이재석이 새까만 후배에게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조금 황당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도 아니고, 다른 걸 다 떠나 유교 사상이 지배하는 이 KBO 판에서 어떤 놈이 대선배의 턱을 박살냈는지 궁금했다. 물론 괘씸한 마음은 기본이었고.
하지만 문제의 영상을 본 후에는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맞을 짓을 했네’
그날 이재석과 오경식이 한 짓은 그야말로 추접한, 그러다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비열한 짓거리였다. 그라운드가 아니라 밖에서 그 짓을 했다가는 더 크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다만 도준우에 대한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녀석이 대선배에게 주먹을 날렸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되도록 상관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직접 만난 도준우는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의젓한 탓에 싹싹한 맛은 하나도 없지만, 아니, 가끔은 오히려 동년배, 혹은 선배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박병관이 본 도준우는 그냥 야구를 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동료들과 함께 야구하는 법을 아는 좋은 선수였다. 그리고 비록 후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투수였다.
파앙
파아앙
이번 대표팀에서 도준우 다음으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바로 박병관이다. 최고 구속 157km/h에 달하는 포심과 제법 쓸 만한 싱커는 그를 대표팀 투수로 만들어주었다.
다만 제구력과 구위 면에서 여러 단점들이 있었다. 이에 박병관은 이번 대표팀 합류 기간 내내 도준우의 투구를 관찰했다.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완숙한 녀석의 투구를 말이다.
그러는 사이, 도준우와도 많이 친해졌고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님! 파이팅!”
아마도 지금 이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선수들 중 가장 부담이 되는 건 도준우일 것이다. 오늘 경기에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을 포함해 대부분의 선수들은 오늘만 이기면 된다는 마음으로 뛰는 중이다.
하지만 준우는, 저 막내 동생같은 녀석은,
오늘 이긴다 해도 그 다음 경기를 책임져야 한다. 저 녀석은 지금 4강전이라는 엄청난 무게의 짐을 어깨에 얹은 채 경기를 치르는 중이다.
그런 후배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믿을 수 있는 건 구속 하나뿐이지만, 그마저도 저 메이저리거들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던져본다.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공을,
팀을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저 기특한 막내 녀석을 위해,
뻐엉!
“스트라이크!”
박병관의 초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묵직하게 박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