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public of Korea in reverse! RAW novel - Chapter (368)
역천의 대한민국-368화(368/369)
#368. 이제 행복하십니까?
김규식의 부고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애도의 물결로 넘쳐 버렸다.
이 애도의 강도는 불과 몇 달 전의 백범 때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규식은 임시정부 출신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교부 장관으로서 현 정부의 중추를 맡았던 사람이다.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
따라서 국민도 아는 것이다.
김규식이 그의 평생 얼마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는지를 말이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그리고 건국 이후에는 독립한 정부의 핵심으로서 돌아가기 몇 달 전까지도 중임을 맡아서 세계를 누비고 다녔으니.
또한 전 세계 각국에서도 앞을 다투어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국가원수급이 아닌 타국 인물의 부고에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통령 이강철을 제외하면 가장 유명한 대한민국인이 바로 김규식이었으니까.
임시정부 시절부터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문을 두드리고 다녔던 사람이다.
그리고 건국 이후에는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면서 만나지 않았던 국가원수를 찾기 힘들었는데, 특히나 동아시아에서는 해외 순방을 많이 하지 않던 이강철을 대신하여서 사실상 대한민국 그 자체였던 인물이었으니, 각국이 국가원수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예우하여 애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2월 1일 오후 6시 30분.
청와대에서는 이례적으로 김규식 장례를 치르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
“…….”
“…….”
참석한 국무위원 전원은 마치 친인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여성 장관인 장인영 장관은 여전히 훌쩍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서 이강철이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우사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비록 선생님이 국가원수급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지난 평생 임시정부에서, 그리고 우리 정부에서 헌신한 무게를 생각하여 나는 국장으로 치르고 싶습니다. 이례적이고 지나치다는 소릴 들을 수도 있지만, 나는 우사 선생님이 그만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례적이기는 하나, 선생님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과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님과 고석만 총리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사 선생님은 비록 우리 정부에서는 부총리직으로 지내셨지만, 임시정부에서는 엄연히 부주석까지 하셨습니다. 국가원수급 예우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해외에서의 위상도 고려해야 합니다. 해외 각국에서 먼저 국가원수급과 다름없이 애도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선생님을 홀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사 선생님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는 것에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우사 선생님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법무부 장관!”
“네, 대통령님.”
“혹시라도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면 법을 고치는 것으로 합시다.”
“현행법상 전혀 문제없습니다. 현행 국가장법은 우리 시대의 법률을 가져와서 약간 손을 본 것인데, 대상에는 국가원수가 아니라도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도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서 대통령께서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법으로도 전혀 하자가 없겠군.”
“그렇습니다.”
“행안부 장관, 제청하세요.”
“네, 전 임시정부 부주석이자 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부총리로 오랫동안 헌신한 김규식 전 부총리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고자 합니다.”
“이의 없습니다.”
“이제는 대통령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나, 대한민국 대통령 이강철은 국가장법에 의거하여 전 외교부 부총리 김규식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으로 하기로 결정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행정안전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 그리고 국무총리가 상의하여 결정하세요. 물론 유족들과 상의하시고.”
“알겠습니다.”
결국 김규식의 장례는 7일장으로 결정되었고, 전국에 조기 게양 지시가 떨어졌다.
똑똑!
“들어와요.”
“접니다, 형님.”
“어서 와라.”
그날 10시가 넘은 시각에, 이강철은 홀로 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고석만의 방문을 받았다.
“우사 선생님 유족과 협의는 되었나?”
“하아, 간신히 되었습니다.”
“간신히?”
“네, 부인이신 김순애 여사께서 극구 간소하게 치르고 싶다고 하셔서요. 정말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랬군.”
“그리고 미국에서는 트루먼 전 대통령과 조지 마셜 전 국무장관이 조문하러 오겠다고 합니다.”
“그래? 트루먼은 몰라도 조지 마셜 그 양반은 건강이 별로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온다고 합니다. 친구가 가는 마지막을 배웅하고 싶다고 했어요.”
“허, 하긴. 두 분이 무척이나 친했었지. 거의 영혼의 단짝처럼 말이지.”
“하하! 정말 잘 어울렸지요. 어떻게 보면 성격도 비슷하고, 워낙 오랫동안 파트너로 합을 맞추어서 그냥 척하면 척이었지요.”
“뭐, 말도 필요 없을 정도였으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이 직접 온다고 합니다.”
“윈스턴도 대사로 있으면서 아주 친했었지. 거참! 그 양반들 건강을 돌봐 준 것이 이렇게 돌아오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원래 역사에서 트루먼은 제외하고 조지 마셜과 처칠은 이 시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지 마셜은 1959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세상을 떠났고, 처칠은 작년인 1965년에 90세까지 장수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갔었다.
그런데, 이번 역사에서 두 사람은 일찍부터 대한민국 국군 통합병원에서 건강관리를 받아 왔기에 여전히 생존하였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워낙 고령이라 골골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밖에도 대부분 나라에서 정상급 인사를 조문객으로 보낸다고 연락이 오는 중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르클레르가, 독일은 얼마 전에 원래보다 일찍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가 직접 온다고 합니다.”
“아시아는?”
“아시아야 당연히 원수가 직접 온다고 하지요. 그 사람들에게 우사 선생님은 스승이나 다를 바가 없었는데요.”
“하기는…….”
“진짜 제자였던 베트남의 호찌민 대통령은 물론이고, 버마의 아웅 산,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 모두 참석한다고 합니다. 특히나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조기까지 게양했다고 하고요.”
“그거 고맙군.”
“덕분에 행안부하고 외교부 직원들이 죽어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국가원수급만 수십 명을 받아야 하게 생겼으니까요.”
“나중에 별도로 휴가 챙겨 준다고 해.”
“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전선에 있는 고위 장성들도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고위 장성이라니?”
“중장급 이상 장성 중에서는 선생님과 친분이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워낙 오래 일하셨기에 이런저런 인연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뭐, 상관없으려나?”
“네, 이젠 전쟁도 끝나고 했으니, 잠시 자릴 비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참석하게 해 주시지요.”
“그러자.”
“알겠습니다.”
1966년 12월 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전 세계에서 몰려온 각국 정상 등 수많은 조문객과 수백만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사 김규식의 국가장 장례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이어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의 운구 행렬은 그야말로 별들로 가득하였다.
원정군 출신의 고위 장성들이 자청하여 정복을 입고 운구 행렬을 호위하듯이 따랐기 때문이다.
국방부 장관 남병우는 물론이고, 정지운, 김종우, 정선호, 최충헌, 김원식, 이재하 등등.
여기에 미국의 조지 마셜도 노구에 오픈카를 타고서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고,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프랑스의 르클레르 등 동맹국이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우방국의 장성들도 가세하였으니, 운구 행렬은 그야말로 수백 개가 넘는 별들이 반짝였다.
그리고 여의도에 있던 수백만의 국민이 그 뒤를 따랐고, 연도에도 수많은 시민이 나와서 독립투사로서, 그리고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조국에 헌신하였던 애국지사의 마지막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동래부사 김지성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원래는 유복하게 자랐을 것이지만, 김지성이 민씨 일파의 전횡을 보다 못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문제가 되어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연이어 어머니 경주 이씨마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단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심지어 언더우드 목사가 발견했을 때는 벽지를 뜯어먹으면서 울부짖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곤궁한 어린 시절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당시에는 드물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고, 서재필의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가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로어노크 대학에서 마음껏 학업에 열중하였는데, 대학 시절에 그가 발표한 한국어에 대한 논문은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와 비교하면서 쓴 글로, 후대의 학자들로부터도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로어노크 대학을 전체 3등으로 졸업한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를 뛰어난 성적으로 마치고 박사 과정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계속 학업을 이어 나갈 것을 권유받았으나, 당시 발발한 러일 전쟁을 보고서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독립 운동사에는 거의 이름을 올리면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원래 역사에서는 해방 후 귀국하였으나, 조국은 혼란 끝에 다시 분단될 운명이었다.
우익 3영수라 불리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중에서 당대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정확하게 한국의 현실을 바라본 인물로 평가되었고, 그의 합리적이고 냉철한 현실 인식에 감탄한 미군과 소련군 양측에서 장차 한국을 이끌어 갈 최고 적임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다가 결국은 6.25 전쟁 당시에 납북되어서 압록강 근처까지 끌려갔다가 한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토록 위대한 인물을 전쟁 후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어떠한 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원래 정치 파벌이 없었던 데다가, 납북되어서 최후를 마쳤다는 이유로.
그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이 무려 1989년에 이르러서이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가?
하지만 이번 역사에서 그는 건국 후 유일하게 정부 요인으로 합류하여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조국의 번영을 직접 이끌었고, 온 국민의 애도 속에서 행복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우사 선생님, 이제 행복하십니까?”
이강철은 김규식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행복하실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