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granddaughter of the Namgoong family RAW novel - Chapter 3
3화
* * *
흑두건의 남자가 뒤로 돌아서며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빽빽하게 길을 막고 있던 흑운방도들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졌다.
일화는 남자를 따라 갈라진 길로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빛에 두렵거나 망설이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그녀의 기세에 오히려 흑운방도들이 긴장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일화를 흑운방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전각으로 데려갔다.
전각의 문은 그녀를 맞이하기라도 하는 듯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남자가 한쪽으로 물러서며 허리를 숙였다.
마치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일화는 그를 뒤로한 채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흑운방의 수하들이 계단 아래에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대청 안에 들어서니 흑운방의 방주와 장로들이 전부 둘러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청의 가장 안쪽에 흑운방주가 앉아 있었다.
대청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 일화는 흑운방주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화오루의 소루주 일화가 흑운방의 방주를 뵙습니다.”
흑운방주가 귀여운 아이를 보듯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 유명한 화오루의 소루주가 이렇게 어린 여협일 줄은 몰랐소.”
“흑운방주님의 기백이 소문을 뛰어넘으시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허허, 화오루의 소루주는 이리 예를 아는데….”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루주께선 어찌 그리 막무가내신가?”
“….”
일화는 기감을 이용해 몰려든 흑운방도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흑운방주와 장로 여덟, 떨거지들은 대략 백오십가량.
이전 생에도 그랬다.
혈마의 협박 탓에 화산과 소림의 공적이 된 흑운방은 일화가 찾아왔을 때 그녀를 죽이고자 이를 갈고 있었다.
물건을 넘기더라도 소루주 정도는 죽여야 분이 풀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이전 생에선 실제로 피가 튀기는 전투가 일어났고, 일화는 이들의 반을 죽였다.
“루주님의 무례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한 번 이긴 전투, 또 이기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일화는 한 걸음 물러났다.
쓸데없는 희생과 소모는 피하고 싶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지요.”
“그런 쓸데없는 말뿐인 사과는 필요 없네.”
“훗날 화오루를 들르시면 섭섭지 않으시도록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를 가진 것도 없는 거지새끼들로 보시는가?”
일화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흑운방주에게 어느새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흑운방주는 좋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흑운방주께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린 소루주께서 겁을 먹은 모양이구려?”
“많은 부하들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소루주 또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네.”
스릉, 스르릉, 스릉.
방주를 제외한 장로들과 흑운방도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기어이 이전 생의 일을 반복할 모양이었다.
“저는 분명 기회를 드렸습니다.”
스릉―
일화가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조금 전의 화기애애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흘렀다.
일화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필요한 목숨만 취하는 게 좋겠지.’
“제게 불리한 듯하니 첫수는 양보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뭐라?”
휘릭― 촤악―!
“크허억!”
일화의 검이 순식간에 흑운방 장로 하나의 상반신을 베었다. 흑운방의 장로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일화는 곧장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막아!”
흑운방주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일화의 검이 한 발 더 빨랐다.
“크아악!”
날카로운 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장로 하나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장로의 뒤편에서 검을 고쳐 쥐는 일화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이전 생에선 흑운방에게 첫수를 내어 주었지.’
그래도 자신이 이겼지만.
이번 생에 먼저 들어가 본 것은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려나. 흑운방주는.’
흑운방주는 두 명의 장로가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당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 놓고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던 그는 일화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주, 죽여라! 어서!”
“으아아아!”
“죽어어어!”
흑운방주의 외침에 흑운방도들이 일제히 일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화의 신형은 달려드는 그들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크헉―!”
“커흑!”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무슨…!’
흑운방주는 당황했다.
아이라고 방심하였나? 아니다.
방주와 장로들 그리고 방도들 전부 기감을 끌어 올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로, 단주 할 것 없이 전부 단칼에 고꾸라지고 있다. 일개 수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괴물이다…!’
설마,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그게 아니라면 저리도 어린아이가 어찌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화오루의 악명이 극히 높다는 것은 알았지만, 소루주의 무위가 이리 높다니. 이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소루주 하나 죽이기는커녕 흑운방이 하루아침에 이름조차 지워질 지경이었다.
“그만!”
흑운방주의 외침에 흑운방도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흑운방도의 목을 베려던 일화 역시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방주의 판단이 이전 생보다 빨랐어.’
그 덕에 이전 생에서보다 많은 흑운방도들이 목숨을 건졌다.
일화는 검에 묻은 피를 무심히 털며 흑운방주를 바라보았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는 그 모습에 흑운방주는 기겁했다.
‘진정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필시 반로환동한 고수렷다…!
“소루주!”
흑운방주가 일화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부디 검을 거두어 주시오!”
동시에 흑운방도들이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그 중심에는 일화가 서 있었다.
병장기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전각의 내부를 울리기를 잠시. 그 소리가 멎어 갈 즈음, 흑운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이 어리석은 노부의 실수를 용서해 주시오. 물건을… 드리겠소.”
* * *
어두운 달빛 아래, 일화는 제 손안에 들어온 작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몇 겹이나 싸여 있음에도 주머니 안에선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나 소림의 자랑이라 불리는 영약다운 기운이었다.
‘이거면 내가 가진 혈기를 몰아낼 수 있을 거야.’
주머니를 품 안에 넣은 일화는 다시 빠르게 이동했다.
혈기를 몰아낼 운기조식을 하려면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적당한 장소를 골라야 했다.
운기조식 중 잘못하다가는 기혈이 뒤틀려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으니 신중하게 주위를 탐색하며 이동하던 때였다.
‘….’
일화가 시선을 내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사삭― 사사삭―
누군가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흑운방의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노골적으로 기척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벗어나자 달빛이 스며드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일화는 그곳에서 멈춰 섰다.
은은한 달빛 아래 일화의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빛이 번득였다.
일화는 나무들 사이, 그림자의 한곳을 응시했다.
그곳에선 일화의 무위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지?’
일화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이전 생에서는 자신의 뒤를 쫓았던 이는 없었기에 긴장은 극에 달했다.
기감을 끌어 올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던 그 순간.
“어이쿠야!”
나무 등치에 발이 걸려 우당탕거리며 한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검은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장포의 깃 부분이 푸른색의 화려한 수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충 다듬은 수염은 거뭇거뭇했고, 입고 있는 장포 역시 한껏 풀어 헤쳐져 어딘가 모르게 허술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러나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일화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허술함 뒤에 감추어진 그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풍뢰신…?’
남자는 놀랍게도 남궁의 사람이었다.
남궁인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이자 가주 직속 무력대인 비풍검대(秘風劍黨)의 대주 섭무광.
바람처럼 빠르고 우레처럼 파괴적이라 하여 풍뢰신이라는 별호를 가진 그는 남궁의 수뇌부 중 유일하게 남궁의 핏줄이 아닌 자였다.
“크큭. 검을 뽑지 않다니. 꽤 영리한 꼬맹이구나.”
섭무광이 웃음을 흘리며 제 턱을 긁적였다.
웃는 낯이어서 다행이라기에는 그가 노골적으로 뿜어내고 있는 방대한 기운에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네 녀석, 정체가 뭐냐?”
섭무광이 가벼운 턱짓으로 일화를 가리켰다.
“잘 생각하고 답하거라, 꼬맹아. 네 대답에 따라 널 죽일지 살릴지 고민 중이니.”
웃으며 뱉는 말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검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화는 대답을 고심했다.
섭무광은 남궁의 비밀 조직 수장이다.
대외적으로는 풍뢰신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남궁가에 몸을 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함부로 남궁의 이야기를 꺼냈다간 첩자로 의심받을 상황.
‘그렇다면….’
일화가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림 말학 설화가 지고하신 대선배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