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granddaughter of the Namgoong family RAW novel - Chapter 76
76화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호숫가.
무천은 낮에 나누었던 설화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얼마 전, 아이가 암시에 대해 밝히며 처음으로 제게 손을 뻗었던 순간, 남궁무천은 그때의 감각을 생생히 기억한다.
암시의 존재에 대한 분노 다음으로, 아이가 자신을 의지해 준다는 벅차오르는 감격에 손끝이 떨릴 정도로 기뻤었다.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아이는 달랐다.
그런 아이가 무엇이든 혼자 해결하려는 고집을 처음으로 꺾고 도와 달라 한 것이 기적이라 느껴졌을진대.
‘이제는 부탁하는 것이 썩, 자연스럽군.’
손녀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처럼 기쁠 일일까.
이제야 자신이 진정한 할아버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대견한 마음에 입꼬리가 저절로 휘어졌다.
“가주님.”
그런 무천의 뒤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비풍검대주 섭무광이었다.
“소문의 근원은 알아보았느냐?”
“적룡대주 쪽인 듯싶은데, 적룡대주의 뒤에 있는 이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알아내 가주님 앞에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설화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지.”
“그래야죠. 망할 놈들.”
아무리 권력다툼 때문이라지만, 도가 지나쳤다. 가주의 손녀, 그것도 8년 만에 돌아온 손녀를 건드리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멍청한 놈이군.’
가문이 잠잠하니 가주께서 인자하신 분이라 여기는 모양이지만,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다.
제가 아는 검황은 불의에 있어선 결코 인자함을 베푸는 사람이 아닌 것을.
‘목숨을 부지하면 다행….’
“아이가 네게 검을 배우고 싶다더군.”
섭무광의 표정이 일순, 당혹으로 물들었다.
잠시 당황하던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형님, 그것이….”
“그러라고 했다.”
섭무광이 고개를 들어 남궁무천을 바라보았다. 남궁무천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광.”
“….”
“내 손녀를 잘 부탁한다.”
섭무광의 시선이 흔들렸다.
언제나 자신 있고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며 흔들림 없던 모습을 보이던 그가 아주 오랜만에 내비친 동요였다.
“정말, 허락하시는 겁니까?”
“너라면 내 손녀를 믿고 맡길 수 있지.”
“어째섭니까? 꼬맹이의 성취는 그 나이 또래의 어떤 아이보다도 높을 겁니다. 아니, 10대 고수들조차도 그 나이에 그 정도 성과를 이룬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제대로 키워야….”
“설화에겐 남궁의 검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형님.”
섭무광의 목소리가 짐짓 진지해졌다. 말투 역시 달라졌다.
“아무리 8년이나 가문을 떠나 있었다곤 하지만 남궁의 핏줄이오. 설마, 꼬맹이가 가문 외에서 무공을 익혔다 하여 남궁의 검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것이오?”
남궁무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그 아이는 남궁의 검을 이미 전부 알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고 보니 무강이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더냐?”
“…천무제 전엔 도착하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형님 말은 듣는 분이시니. 아니 그것보다,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꼬맹이가 남궁의 검을 전부 알고 있다니?
“이 남궁에서 그 아이에게 남궁의 검으로 이길 수 있는 이는 나와 무강을 제외하곤 없을 터다.”
“…!”
“무강도 첫 합은 내어 줄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라고?”
물론 내공을 쓰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남궁엔 남궁무천과 남궁무강이라는 두 명의 절세 고수가 있다.
남궁무천은 천하 10대 고수 중 하나이고 남궁무강은 10대 고수까진 아니더라도 천하 30인 안에는 들어갈 정도다.
그 남궁무강이 첫 합을 내어 준다고?
“솔직히 안 믿기오.”
“하하하!”
남궁무천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후에 무강이 돌아오면 보거라.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형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믿기 힘든 것이 의심이 아니고 무어냐?”
“음….”
그래. 인정한다. 믿을 수 없다.
남궁무강이 첫 합에서 밀린다는 거나 무력대의 대주들이 꼬맹이에게 진다는 거나.
이번만큼은 무천의 뜻에 동의할 수 없다.
“뭐… 어쨌든 그럼 괜찮다는 거요? 내가 꼬맹이에게 검을 가르쳐도.”
“그래. 그 녀석이라면 어떠한 검을 배우고 익히든 본질만은 하늘의 검을 추구할 테니.”
하늘의 검은 곧 남궁의 검.
남궁무천은 손녀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녀의 성취를 더욱 높일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네 검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위력적이다. 괜히 풍뢰신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지. 본디 뇌전은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이처럼 어울리는 검술도 없지 않겠느냐?”
“흠….”
섭무광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무공이 뇌전의 모습을 띠게 된 데에는 남궁무천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꼬맹이가 변검과 쾌검 중심의 검술에 능하다 하였지.’
꼬맹이의 검은 확실히 남궁의 검과 자신의 검에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꼬맹이가 자신의 검을 배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아이는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하였으니.
‘역시 괜히 검황이 아니구먼.’
섭무광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이 모든 것을 그 짧은 시간에 판단하고 제 손녀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 주는 할아버지라니. 이처럼 든든한 아군도 없을 터다.
섭무광이 그를 향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믿어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가르쳐 보겠습니다.”
“기대되는군.”
남궁무천이 멀거니 별이 가득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가 보여 줄 하늘은 과연 어떠할꼬.”
그의 입가엔 어느새 선선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 * *
일룡, 이뫼, 삼봉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저녁쯤이었다.
설화는 령과 함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외당으로 나가 외당 뒤편에서 몰래 그들을 만났다.
세 사람이 알아 온 자료는 훌륭했다.
“알아보니 단주라는 놈들이 꽤나 해 처먹었더군요? 우리가 상인들 몇 번 등쳐 먹은 건 먹은 것도 아니더이다.”
삼봉이 비소했다.
“돈 받고 내당 무사로 승급시켜 준 건 다반사고, 흑도 놈들도 무사로 받아 주고, 심지어 남궁의 정보도 팔아먹었던데요. 이건 뭐. 흑도 놈들보다 더하던데.”
외당 검대의 단주들이 가문의 눈을 피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벌이고 다닌 것인지, 증거들도 넘쳐났다.
“도둑질도 안 걸리고 계속하면 재능인 줄 아는 미친놈들이 있지. 이놈들 이젠 대놓고 흑도 방파 방주들이랑 술자리도 갖는다고 하더이다.”
삼봉은 제가 더 황당하다는 듯 놈들의 죄목을 읊었다.
그의 말대로 흑도가 어느 쪽인지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수고했어. 령.”
령이 품에 가져온 주머니를 꺼내 세 사람에게 하나씩 던져 주었다.
금자 주머니를 받아 든 세 사람의 얼굴이 반짝이는 금만큼이나 환해졌다.
“또 시키실 일 없소이까?”
삼봉이 주머니를 챙겨 넣으며 슬쩍 물어왔다.
보상도 짭짤하겠다, 신분도 든든하겠다. 시키는 일이 이런 식이라면 이참에 한탕 제대로 챙겨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연히 있지.”
설화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령에게 손짓하자, 령이 또 다른 주머니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앞선 주머니보다도 더 두둑한 크기였다.
“이번에는 선금이야. 액수는 두 배.”
“두, 두 배…!”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머니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설화가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할 거야?”
* * *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비척이며 거리를 걸어갔다.
그의 입술 새로는 흥을 참지 못한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큭… 이리도 순조로울 수가 있나.”
외당 무력대 적룡단의 단주 남궁수학.
그는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가주께서 아끼는 아이라더니만, 별것 없지 않소? 난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진화될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르오.’
‘껄껄! 가주께서 언제 대놓고 자식 밀어준 적 있었소? 벌모세수를 해 줬다더니만! 그게 끝이었나 보지!’
‘돌아오자마자 우리 무력단을 건드리기에 긴장했더니만. 이제 맘 편히 천무제 구경이나 하면 되겠습니다.’
‘벌써 기대되지 않소? 제 딸이 가문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당하면, 일 공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내일이면 내당 무사 1차 선발전이 열릴 것이다.
그 축제에 남궁설화가 길러 놓은 적룡 11단은 없다.
적룡 11단은 뒷배가 없어 고여 버린 이들이 머무는 조. 힘도 능력도 없는 것들이 ‘그분’의 뜻에 훼방 놓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남궁의 아가씨가 뒤를 봐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크큭….’
하나, 이제 막 가문으로 돌아온 열세 살짜리 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고맙게도 멍청한 11단 놈들은 남궁설화를 가지고 한 도발에 곧장 반응해 왔다.
덕분에 걱정거리를 하나 덜었고 말이야.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한 걸 알면 ‘그분’께서 제게 어떤 상을 주시려나?
“으흐흐, 후. 정말 기대되는군. 기대돼.”
“뭐가 그렇게 기대돼?”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적룡단주가 화들짝 놀라며 벽에 달라붙었다.
“누, 누구냐!”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어둠 속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아니, 한 아이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