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술게임 (1)
“사, 살려 줘. 비키르. 제발! 한 번만!”
대영웅을 꿈꾸는 새싹 튜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가 지금 비참한 자세로 애원하고 있다.
“으윽. 이대로 죽는 건가. ……그래, 죽여라. 어차피 비키르, 네 녀석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북방의 지존을 노리는 차기 용병왕 산쵸, 불굴의 투지를 가진 그 역시도 전의를 상실한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비키르! 배신을 하다니!?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피기는 그냥 피기다. 하지만 비키르를 누구보다 믿었던 그이니만큼 마지막 순간 등판에 칼이 꽂혔을 때 좌절하는 폭도 가장 깊었다.
……하지만. 비키르는 가차 없이 친구들을 죽였다.
“못하면 죽어야지.”
비키르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려 퍼짐과 동시에.
차라락-
패(牌)가 움직였다.
널찍한 종이판 위로 알록달록 색색의 말들이 이동했다.
비키르의 검은 말은 튜더의 청색 말, 산쵸의 붉은 말, 피기의 노란 말을 모조리 잡아먹어 버렸다.
동시에 튜더와 산쵸, 피기는 원래의 출발선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벌주 석 잔과 함께 말이다.
“아아, 또 졌어! 이 자식 보드게임 왜 이렇게 잘해!?”
“벌써 벌주만 1L는 마신 것 같다.”
“……토할 것 같애.”
튜더와 산쵸, 피기는 지금까지 열심히 패를 굴리며 이동해 온 거리가 단숨에 초기화되는 것을 보며, 그리고 눈앞에 마셔야 할 술잔들이 쌓이는 것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한편, 여학생들은 웃고 떠들며 난리가 났다.
“얘 비키르~ 너 보드게임 진짜 잘한다.”
“패를 던지는 비결이라도 있는 거야?”
“밥 먹고 게임만 한 사람 같애! 호호호~”
츄리닝에 옅은 화장, 향수 대신 은은한 비누 냄새.
평소 정숙한 모습의 아카데미 여학생들의 이런 일상적인 복장이라니.
밤늦게 여학생들의 방에 놀러 온 남학생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늦은 밤. 튜더가 이끄는 사랑꾼(?) 들은 몰래 남자 기숙사를 탈출해 이곳 여자 기숙사로 잠입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미리 약조한 대로 1층 화장실의 창문 한쪽 구석의 걸쇠를 파괴해 두었고 1층을 통해 잠입한 남학생들은 배수관을 타고 올라와 2층, 그리고 비상구를 통해 올라와 3층, 그리고 드디어 금남의 구역인 4층 여학생 층으로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인가 당직사관에게 들킬 위기도 있었지만 사감들의 감시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허술했다.
아마 풋풋한 청춘남녀들의 밀회를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단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뭐,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은 한 방에 모여 보드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의 종목은 ‘윷’, 벌칙은 대부분 벌주를 마시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나 칸 곳곳에는 말이 이동해 안착했을 때의 벌칙들이 개별적으로 적혀 있기도 했다.
가령 ‘가장 마음에 드는 이성의 손 5초간 잡기’, ‘옷에 빨간색이 있는 사람의 이마에 10초간 키스’, ‘정면에 있는 사람과 30초간 포옹’ 등등이다.
거의 모든 칸마다 벌칙 아닌 벌칙들이 존재했으며 골인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수위는 점점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건 뭐, 술 게임이 아니라 썸 게임인데.”
윷판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비앙카였다.
그러자 튜더가 이죽였다.
“자기랑 썸 타고 싶은 사람 없다고 너무 찡찡거리는 것 아냐?”
“자기가 썸 타고 싶은 사람 없다고를 잘못 말한 것이겠지, 얼간이?”
또다시 튜더와 비앙카 간의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싱클레어가 둘을 말렸다.
“에이, 왜 그래 다들~ 재밌는 술자리에서.”
순한 강아지처럼 헤헤 웃는 싱클레어.
모범생답게 평소 늘 단아한 교복 차림에 빈틈없는 이미지였던 그녀가 느슨한 나시티에 돌핀팬츠를 입고 있자 상당히 친숙해 보인다.
그러자 남학생들은 저희들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흠. 우리도 옷에 좀 신경 덜 쓸걸 그랬나?’
‘바보냐? 쟤네가 옷에 신경을 안 썼을 것 같애? 저게 쟤네의 전투복이야 인마.’
산쵸와 튜더가 숙덕거리는 그 순간.
“윷.”
비키르가 또다시 말을 움직였다.
튜더와 산쵸의 말이 또 한 번 잡아먹혔다.
그리고.
“윷.”
“모.”
“윷.”
“모.”
“윷.”
“모.”
“빽도.”
전진과 후퇴를 전략적으로 반복하며 연쇄 학살을 자행하는 비키르의 흑마.
“으아아! 또 죽었어! 야! 우리도 다른 벌칙 좀 걸려 보자!”
“……술만 죽어라고 마시는구나.”
튜더와 산쵸는 비키르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며 벌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저, 저기…… 얘들아. 아무리 그래도 학생들이 술은 좀.”
성녀 돌로레스였다.
그녀 역시도 늘어진 티셔츠에 수면바지를 입고 편한 복장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는 혼자 복잡한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다.
‘황금연휴에 통으로 봉사활동을 온 아이들이야. 한 번쯤 일탈을 해도 문제없지. 이쯤 되면 나는 꼰대 아니겠지? 그, 그래도 혹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술은 좀. 으음…… 역시 좀 고루해 보이려나? 꼰대 같을까?’
돌로레스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튜더가 씩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걱정 마세요 회장님! 이거 술이 아니라 탄산음료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돌로레스 역시 안심한 기색이다.
물론 그녀는 탄산음료들 중에도 알콜이 미량이지만 함유된 것들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한편, 비키르는 여전히 보드게임에서 혼자 질주 중이었다.
평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비키르가 왜 이렇게 게임에서 성적을 내고 있느냐?
‘……옛날 생각 나는군.’
그것은 바로 추억 때문이었다.
윷놀이.
4개의 패를 던져서 엎어지고 젖혀진 상황에 따라 도(돼지), 개(개), 걸(양), 윷(소), 모(말)을 정해 앞, 혹은 옆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상대방의 말을 만나면 잡아먹어서 출발선으로 보내 버릴 수도 있다.
이 보드게임은 멸망의 시대 당시 야전에 나가서 매복, 혹은 대기 중이던 군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딱히 재미있어서는 아니고, 군대 내무반에 이거 외에는 할 보드게임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서부전선 제 7고지의 참호 속에서 5분 대기조로 죽치고 있을 때 이 게임을 질리도록 플레이했었지.’
길어지는 전쟁, 장기화 되는 적과의 대치 속에서 병사들은 무료한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남자들끼리 모여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오락 중에 이 윷놀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최전선의 군인들 외에는 플레이하지 않는 낡을 대로 낡은 고전게임이었고 그래서 온갖 기상천외한 기술을 익힌 고인물, 타짜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나름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 유행 보드게임이지.’
그래서 그런가 숙련자가 딱히 없었다.
당장 보드게임을 두 번째로 잘하는 피기만 봐도 패 던지는 솜씨가 형편없을 지경.
‘……쯧쯧, 저렇게 던져서야 얼마 안 되는 군인 월급 동기들에게 다 털어먹히지.’
멸망의 시대, 최전선에 나가 있었던 군인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도락에는 도가 텄다.
비키르 역시 도박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상관들에게 자주 끌려가 배웠기에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탁!
윷, 그리고 사리 받고 빽도.
비키르의 흑마가 앞으로 이동해 5칸 앞에 있었던 싱클레어의 백마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턴에서 한 칸 뒤로 후진해서 싱클레어의 백마 한 마리를 더 잡아먹는다.
졸지에 출발선으로 롤백되는 두 마리 백마.
말 두 필을 잃은 싱클레어가 울먹이듯 말했다.
“형! 프로게이머야? 왜 이렇게 잘하냐구! 공부에서 지는 것도 서러운데 게임에서까지…….”
오빠라고 부르지 말랬더니 형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녀이다.
비키르에게 말 다섯 마리를 털린 튜더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비키르에게 물었다.
“아니, 윷도 잘하고 주사위도 잘하고 카드도 잘하고…… 너 못 하는 게임이 있냐?”
“없다.”
비키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압도적인 자신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비키르! 비키르! 나 네 말 위에 태워 주면 안 돼?”
“저기, 나 너 얼굴 보고 싶은데. 헤헤, 앞머리 한 번만 까 주면 안 돼?”
“안경두 좀 벗고 하자, 응?”
“답답하지 않아? 내가 머리카락 좀 잘라 줄까? 특히 그 앞머리 좀…….”
몇몇 여학생들은 슬쩍 비키르의 옆으로 다가와 팔이나 무릎 등을 톡톡 건들고 있었다.
그리고, 비키르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이 또 한 명.
“……보드게임을 잘 한다고?”
바로 학생회장 돌로레스였다.
“그럼 혹시 ‘바둑’도 둘 줄 아니?”
그녀는 다른 게임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이윽고, 비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둡니다.”
“그래? 기력(棋力)이 어느 정도나 되지?”
“……2급 정도.”
그러자 돌로레스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2급이라, 어디 가서 자만할 실력 정도는 되네.’
참고로 그녀는 아마추어 5단의 실력자였다.
어려서부터 가문 내에 바둑으로는 당할 사람이 없어서 외부에서 강사를 모 셔와야 했을 정도였고 1학년 당시에는 바둑부의 최고 에이스였으며 2학년 때는 바둑부의 부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활동했었다.
……비록 그 뒤 신입생들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폐부되어 버렸지만.
이후 아무도 그녀와 바둑을 둬 주지 않았고 애초에 아예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 되었다.
돌로레스 역시도 여러 가지 업무가 바빠서 마음 놓고 바둑 한 수 두기도 어려워졌기에 자연스레 멀어진 취미.
하지만 지금 여기에 모든 보드게임을 잘 한다고 자만하는 애송이가 있다. 고작 2급의 실력으로 말이다.
“훠우~ 회장님! 비키르랑 한 판 붙으시는 겁니까!?”
“언니! 멋있어요!”
“뭐든지 잘하시는 부장님 대 보드게임에 특화된 새내기! 그 승부는!?”
마침 분위기 역시도 돌로레스의 참전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돌로레스는 주변의 환호에 못 이기는 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보드게임을 할 줄 몰라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그리고 유일하게 굉장히 잘 하는 보드게임인 바둑.
이렇게 판이 깔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럼 간만에 조금 즐겨 볼까?’
성녀는 튜더가 가지고 온 간이 바둑판을 들며 싱긋 웃었다.
아마추어 5단이 힘을 숨김.
돌로레스의 기력과 비키르의 기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채 바둑에 임하고 있었다.
“벌칙은 한 집당 벌주 한 잔 어때?”
돌로레스의 패기 넘치는 도발에 지금껏 비키르에게 짓눌려 있었던 다른 학생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좋습니다.”
비키르는 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