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후유증 (2)
“……형아?”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 물기 덜 마른 짧은 은발에는 아직도 은은한 샴푸향이 감돈다.
싱클레어. 성은 없고 그냥 이름만 있는 평민 출신. 하지만 압도적인 성적으로 열병기부의 수석을 지키고 있는 여학생.
“…….”
비키르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만 까닥 움직였다.
장소와 시간을 감안하면 다소 뜻밖의 만남이었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장소에 그녀가 있다는 말인가?
그 의문은 곧 밝혀졌다.
“형아도 아는구나? 여기 은하수 명당인 것.”
싱클레어는 활짝 웃으며 비키르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사이즈의 캔맥주였다.
푸슉-
싱클레어는 맥주를 따고는 거품을 급하게 입가로 가져간다.
별안간에 흰 수염이 자라난 싱클레어는 씩 웃으며 비키르에게도 맥주를 건넸다.
“두 캔인데 특별히 하나 줄게.”
“……고맙다.”
비키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맥주를 받아들었다.
“이 시간대에 여기서 형아를 만날 줄은 몰랐네. 나 혼자만 아는 명당이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기분이 꿀꿀한 날이면 항상 여기 와서 은하수를 봐.”
그렇게 말하는 싱클레어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뭔가가 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키르는 그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험한 장소였군. 앞으로 씬디웬디와의 접선 장소를 바꿔야겠어.’
이제부터는 ‘이 장소에 오면 간간이 그와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여자.
이제부터는 ‘이 장소에 다시는 안 와야지’라고 생각하는 남자.
상당히 아이러니한 동상이몽이었다.
그때, 맥주캔을 내려놓은 싱클레어가 비키르 옆에 앉아 있는 올빼미에게 관심을 보였다.
“올빼미네? 귀여워라. 편지 배달 왔니?”
[올-뺌.]“아하하하, 특이하게 우는구나.”
싱클레어는 올빼미의 둥그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비키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편지 온 거야?”
“음.”
“누구한테?”
“…….”
씬디웬디를 뭐라 지칭해야 할지 몰랐던 비키르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싱클레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자구나?”
올빼미의 머리에는 씬디웬디의 머리카락 색깔인 녹금색 리본이 붙어있다.
씬디웬디가 여자인 것은 맞기에 비키르는 그저 고개만 조용히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싱클레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와~ 교내연애 하나 보네 이 형아. 연애하면서도 성적 안 떨어질 자신 있다 이거지? CC 하니까 좋냐! 하긴 신입생 중 누가 CC에 대한 로망이 없겠느냐만…….”
“그런 것 아니다.”
비키르는 싱클레어의 말에 짧게 일축했다.
연애관계를 단호히 부인하는 비키르의 말에 싱클레어는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안도하는 듯한 한숨이었다.
“형아, 만약에…… 이거 비밀연애라서 나한테까지 숨기는 거면 진짜 실망이다? 우리끼리는 이런 거 말해 줘도 되잖아, 짱친인데. 혹시나 그런 거면 말해 줘야 돼? 진짜로!”
……짱친? 비키르는 말뜻을 이해 못 했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싱클레어는 그 뒤로도 혼자서 재잘재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늘어놓았다.
평소 학교에 있을 때는 원래 이렇게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여학생인지라 비키르는 조금 놀랐다.
싱클레어는 어느새 절반쯤 남은 맥주를 아쉬운 표정으로 흔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참. 형아 혹시 회장님이랑 무슨 관계야?”
회장님이라 하면 돌로레스 학생회장을 뜻하는 것이리라.
돌로레스와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면 비키르는 자신 있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무관계.”
“에이~ 아닌 것 같던데?”
싱클레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비키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쳤다.
“아무 관계도 아닌데 회장님이 요 며칠간 형아를 그렇게 찾아다녀?”
“?”
비키르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로레스는 왜 자기를 찾는단 말인가?
안 그래도 요즘 미팅이 너무 많다.
교장에 사장에 대장에 원장에 사장에 뭔장에 뭔장에…… 뭔 놈의 장들이 그렇게 많이들 찾아대는지 스트레스를 받던 참이다.
심지어 황태자까지 표창을 줄 테니 한번 보자고 하니 원.
‘……암살은커녕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말이지.’
씬디웬디가 정보 분석에 한 달쯤 걸린다고 한 게 오히려 호재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싱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요 근래 돌로레스 회장님이 형아를 은근히 찾아다니더라고.”
“그렇다면 그때 궁술 연습장으로 오던 게 나를 찾기 위해서였나.”
“에? 봤는데 왜 안 만났어?”
“……길이 엇갈렸다.”
개로 변해 숨었다가 중성화를 피해 달아났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에둘러 말하는 비키르다.
싱클레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맥주를 쭉 비웠다.
푸하-
흑맥주 특유의 탄 보리향이 밤하늘에 번진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손으로 턱을 괴고 다소 힘없어진 모습을 보였다.
“부럽다.”
“?”
비키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만 갸웃한다.
싱클레어는 입가의 맥주거품을 엄지로 쓸어내며 싱긋 웃었다.
“형아는 항상 그렇네.”
“?”
“먼저 묻지 않는 거. 내 스타일이야.”
싱클레어의 말에 비키르는 옅게 웃었다.
타고나길 사냥개로 태어나 사냥개로 길러진 비키르는 누군가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주인이 먼저 입을 열기를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사냥개의 미덕이었으니까.
항상 주위에서 먼저 접근해 떠들어대는 것에 지친 것일까?
비키르의 그런 태도는 싱클레어에게 색다른 면모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부럽다고 한 건…… 그냥, 형아가 부러워서 한 말이야.”
“그런가?”
“그렇지. 같은 동급생인데 격차가 어마어마하잖아.”
싱클레어는 묘한 시선으로 비키르를 돌아보았다.
필기 1위, 심지어 벌써부터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준의 연구논문을 서너 편이나 발표한 1학년 학부생.
일반적인 학부생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괴물 이레귤러.
보통 1학년 학부생의 수준은 예를 들어 이렇다.
-교수: 오늘은 연어를 맛있게 먹는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겠어요~
-1학년 학부생 1: 와아! 연어가 뭐에염?
-1학년 학부생 2: 연어는 먹을 수 있는 건가염?
-1학년 학부생 3: 광어가 뭐에염?
그리고 4학년 졸업반쯤 되면 조금 달라진다.
-교수: 오늘은 연어를 맛있게 먹는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겠어요~
-4학년 학부생 1: …….
-교수: …….
-4학년 학부생 1: …….
-교수: 뭐해? 연어 안 잡아오고.
1학년과 4학년은 다루는 학문의 깊이에서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비키르는 이미 이 4학년의 수준조차도 한참을 초월해 대학원생, 아니 교수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실기 성적은 어떤가?
익스퍼트 하급은커녕 비기너 단계가 아닐까 의심받던 비키르는 숨겨놓고 있었던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드러냈다.
이는 평민 출신이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경지. 7대 가문의 쟁쟁한 후기지수들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경지였다.
“필기 되고, 실기 되고. 참 여러모로 동기들 기죽이는 남자네, 형아는.”
“…….”
“듣자하니 벌써부터 한두 세대 위의 셀럽들이랑 미팅 엄청 하고 있다면서? 다들 부러워해.”
정작 비키르는 그것 때문에 짜증을 내고 있건만 다른 누군가들에게는 그것이 절실하고 요원한 모양이다.
하지만 비키르는 잘 알고 있었다.
“…….”
돈? 권력? 명예? 그 모든 허울 좋은 것들은 멸망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그때가 되면 기존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모든 가치들이 뒤집어질 것이다.
어느 위대한 작가의 말마따나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가 곧 도래한다는 말이다.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지.”
비키르의 말에 싱클레어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한다.
“형아는 가끔 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애.”
그 말은 비키르의 가슴을 약간 뜨끔하게 만들었다.
싱클레어는 또다시 활짝 웃었다.
“말하는 거 보면 완전 애늙은이야~ 누가 형아를 18살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럼 뭐, 속세를 떠나서 어디 은거라도 하게?”
꾸깃- 하고 텅 빈 맥주캔이 찌그러든다.
싱클레어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쿠르륵!
너무 뜨거워서 하얗게 보이는 불꽃이 일어나 맥주캔을 녹인다.
그것은 이내 철(鐵) 속성의 마나로 인해 새로운 외형을 갖춘다.
회중시계를 든 토끼, 아주 정교한 모양의 금속 인형이 싱클레어의 손바닥 위에 자리했다.
“참, 그 소문 들었어?”
싱클레어는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번에, 그러니까 20학번 동기들 중에 정체를 숨긴 황족이 입학했다는 거 말이야.”
“그것은 그냥 증권가에 도는 찌라시 아니던가?”
“……으음~ 글쎄? 어떨까?”
싱클레어는 다소 의뭉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황족이라면 분명 재능이 보통이 아닐 거야. 위대한 예언가였던 초대 황제폐하의 핏줄이니까 아무래도 일반적인 또래와는 다르겠지?”
“…….”
“학기 초부터 너무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실력을 숨긴 채 생활할 거야. 그래야 굳이 정체를 숨기고 입학한 보람이 있지. 아마도 곁에 둘 인재를 모집할 생각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
“하지만 위급한 순간에까지 실력을 숨길 수는 없었을 거야. 가령 친한 친구들이 시험 도중 위험에 빠졌을 경우라거나.”
“그만.”
비키르는 이번에도 싱클레어의 말을 일축했다.
“나는 황족이 아니다.”
“……나는 형아가 황족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
비키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싱클레어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다.
그 모습은 비키르로 하여금 하나의 단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싱클레어, 이 여자는 예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지.’
비키르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싱클레어는 아카데미 졸업 후 모든 동기, 선후배들과 연락이 두절된다.
그리고 그대로 영원히 세상에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회귀하기 전, 아카데미 졸업 후 나이를 꽤나 먹은 하이브로, 미들브로, 로우브로 역시도 종종 ‘싱클레어는 지금쯤 뭐 할까?’, ‘4년 내내 열병기부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녀석이니 어디서든 잘살고 있겠지,’, ‘걔는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버렸을까?’ 등등의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시절 세웠던 놀라운 성적과 기록들을 추억 삼아 이야기하면서.
……비키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참. 형아 이번에 중간고사 끝나고 뭐 해?”
싱클레어가 또다시 물어왔다.
“중간고사 끝나면 일주일간 휴가잖아. 그때 뭐 계획 있어?”
“있지.”
“뭔데?”
“등이랑 하체. 그리고 궁술 훈련.”
“……운동이랑 훈련 말고.”
싱클레어는 셀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한번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시간 비면 우리 집 한번 놀러 와. 밥이나 한 끼 먹자.”
싱클레어의 초대는 다소 의외였다.
비키르는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싱클레어는 예전에도 비키르에게 이런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당시의 일이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던 단탈리안의 행위, 기부금을 내지 않느냐고 물어보던 싱클레어와 비키르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형. 형은 돈 안 내?’
‘……돈 없다.’
그건 진짜 없어서 없다고 한 것이었다.
비키르는 바스커빌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기로 했었으니까.
그렇다고 씬디웬디의 자금 지원도 현재는 받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평민이라는 위장신분에 괜한 의혹이 생길 수 있기 때문.
아무튼. 그때 싱클레어는 다소 의아한 기색을 보였었다.
‘돈? 돈이 왜 없어? 아카데미 학생이면서. 너무 매정한 것 아니야? 여기 아이들은 가엾게도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 우리가 도와줘야지.’
‘부모 같은 것은 별반 필요 없다.’
‘엥?’
‘어차피 세상은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라는 존재는 남의 도움이 필수적인 유년 시절에만 기능할 뿐, 그 외에는 불필요하지.’
비키르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왜 불쌍한가?
그들은 부모의 존재가 국가의 기관으로 대체되었을 뿐,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다.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고 필요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바스커빌가에서 사냥개로 키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한, 싸워서 극복해 내야 할 대상이며 ‘부모’는 그 기나긴 싸움의 첫 튜토리얼을 도와줄 초반 안내자에 불과할 뿐.
비키르는 부모라는 존재를 그저 기능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것은 한평생을 몸담고 있었던 바스커빌 가, 그리고 반평생을 살아왔던 ‘멸망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본 이와 겪어 보지 못한 이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법.
비키르는 자신이 멸망의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점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나.
“알겠지? 꼭 놀러 와야 해.”
싱클레어는 전에 없던 진지한 기색으로 비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호기심 넘치고 발랄하던 기색이 아니라 무겁고 애잔한 분위기.
그녀는 마치 비키르를 이해하며 공감하고 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자, 그럼 나는 이제 알바 시간이 다가와서 이만!”
싱클레어는 비키르의 앞에 무언가를 탁 내려놓고 옥상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저 녀석, 알바도 하나? 이 시간에?’
비키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다.
이윽고.
…쾅!
옥상 문이 닫혔다.
“…….”
비키르는 고개를 돌려 싱클레어가 눈앞에 내려놓은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바쁜 듯 정신없이 뛰어가는, 회중시계를 든 토끼 한 마리가 비키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