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쩐의 전쟁 (5)
비키르는 고양이 가면을 꾹 눌러 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흑갈색 장발의 남자 데미안.
그는 제국 화폐제조국의 국장이자 부르주아가 지주길드의 사외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반은 제국 소속의 공무원, 반은 사기업의 이사라는 기묘한 위치.
이는 그가 가문 내부에서의 정치싸움에 패해 유배당했다는 뒷배경을 알지 못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왕좌의 게임에서는 패배했으나 가진 바 능력이 워낙에 출중하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기에 부르주아 가문에서도 그를 완전히 내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 녹을 받으며 화폐제조국의 일을 총괄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가문에서 운영하는 가장 큰 지주길드의 내정 역시도 조금은 맡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신분적으로는 공무원인 것이 우선시되는 만큼, 그는 본가의 일에 거의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있는지라 지주길드의 이사 직은 거의 유명무실하다.
가문 내부에 미치는 영향력도 백작이라는 작위와 사회적 위치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
비키르는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국장으로 승진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 선택일지도 모르겠군.’
왕좌에 도전하다가 패배한 이의 말로는 죽음, 혹은 죽음보다도 더 비참한 유배뿐이다.
똑똑하고 유능한 데미안은 그런 결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가주 직에 앉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든 즉시 승진을 통한 말뚝박기를 시전했을 것이다.
국가의 비호를 받기 위해 말이다.
‘자기 가문을 두려워해 국가의 개를 자청하다니.’
쉽게 말해 가족이 무서워 직장에 몸을 의탁했다는 뜻.
비키르는 이와 같은 선택을 간단하게 평가했다.
‘현명하군.’
비키르는 가족이 오히려 제일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 가족 아닌가.
그런 면에서 데미안이 가문을 등지고 황실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황실의 비호를 받아 부르주아가를 소소하게나마 견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부르주아가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데미안은 황실의 입장에서도 아주 좋은 볼모겠지.’
이미 신문 기사들을 분석한지라 그가 부르주아가의 가주와 적대 관계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즉, 데미안은 현재 황실과 부르주아가의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자신의 입지를 지켜나가고 있는 셈이다.
뛰어난 상인임과 동시에 노련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었다.
비키르는 다른 하인들처럼 칵테일 잔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이곳에서 하인으로 위장해 있는 것은 돌로레스조차도 모르는 사실이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신중하게.
이제 데미안과의 간격은 불과 몇 미터 내외로 좁혀졌다.
그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하하. 돈이란 것은 정말 대단하군요.”
“돈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더니 과연 그렇소.”
“어린 후배님들이 이 정도로 사치를 부릴 줄 안다니.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과연 돈은 일단 벌고 볼 일이오.”
“왜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알겠군요.”
손에 술잔을 든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에이, 돈이 대단하기는 해도 만능은 아니지요. 세상에 돈으로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황금이 곧 만능이라는 말에 대꾸한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했다.
“어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도 모르시오?”
“오잉? 그게 뭡니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게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말 말이오! 하하하하!”
그 말에 좌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습니다. 돈이 있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일단 불행한 것은 맞지요.”
“당연하지요.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타고 좋은 데서 자고 좋은 데 여행하고 좋은 장난감 사고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 나눠 주고. 애초에 배부르고 따숩게 살면 남보다 행복할 확률이 훨씬 높아지니까요.”
“허허- 젊었을 때는 돈이 최고인 것 같았지만 나이를 좀 먹고 나니 알겠더군요. 돈은 제가 젊었을 때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욱 더 최고라는 것을!”
“맞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돈 많은 사람들이 제일 부러웠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역시나 돈 많은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한번은 제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누군가 그러더군요.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어’. 그 말을 듣고 조금 어이가 없었지요. 누가 행복하고 싶댔나? 돈 많고 싶댔지.”
“정말 돈이란 것은 대단한 발명품이지요. 인류를 상징하는 최고의 물건입니다.”
화제는 어느덧 돈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쪽으로 흐른다.
다들 재계에서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니만큼 당연한 주제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돈’ 그 자체를 만드는 이, 데미안을 향한 우회적인 아첨이기도 했다.
제국의 화폐제조국 국장. 나라 전역에 통용되는 화폐를 찍어내는 존재.
아무래도 돈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니만큼 돈이라는 물건에 대한 자부심과 경외감 같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
데미안 국장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말없이 자리를 떠 홀로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축 처진 분위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뭐, 뭐지? 방금 국장님의 표정이 좀 안 좋으시지 않았습니까?”
“으음. 우리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딱히 없었습니다. 다 맞는 말만 했는걸요.”
“그냥 취하신 게 아닐까?”
“맞습니다. 애초에 파티장에 들어오실 때부터 조금 피곤해 보이셨어요.”
“……더군다나 ‘딸 문제’도 있으실 테니.”
마지막 사람의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따님이 참 그렇게 되셨군…….”
“줄리엣 님 말이지? 나도 그 소식은 익히 들었네.”
“참 젊고 아름다우신 분이었는데 말이야. 너무 안타깝게 되었어.”
“그럼 저렇게 기분이 착잡하실 만도 하지.”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무희들이 격정적인 댄스로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기 전까지 몇 분간 데미안과 그의 딸이 겪은 불운한 일을 이야기하며 떠들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비싼 술에 비해 입에서 나오는 동정은 꽤나 값싸 보였다.
* * *
“……후우.”
데미안. 그는 밤이슬 내려앉은 테라스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단 장막들이 가리고 있는 너머로 황도의 아름다운 아경이 보인다.
푸른 밤의 아경. 포근하고 아늑해서 파묻혀 잠들고 싶은 분위기를 잘 연출해 놓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돌려 버릴 뿐이었다.
밖의 홀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과 들뜬 목소리. 모두 오늘의 파티를 예찬하고 있다.
문득, 그는 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돈이라.”
그는 돈에 익숙한 남자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마어마한 순도의 금수저를 물고 있었고 젊었던 시절에는 수많은 상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슬슬 황혼에 접어들고 있는 현재에는 아예 돈을 찍어내는 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즉 한평생을 돈과 함께 살아온 남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액수를 손에 쥐어 본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데미안조차 등 뒤에서 다가오는 목소리에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돈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것일까? 고양이 가면을 쓴 소년 하나가 뒤에 서 있었다.
데미안은 처음에 그저 당돌한 하인 하나가 동경의 마음으로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깨달았다.
‘……기척이 없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마치 유령처럼 등 뒤에 서 있는 소년.
그 움직임은 단순히 움직임에 대한 교육을 받은 하인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다.
하지만 데미안은 과연 똑똑한 남자였다.
그는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소리를 치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나가고자 일단 대화를 시도했을 뿐이다.
“있지. 많다네.”
고개를 끄덕여 보인 데미안은 시선을 비스듬히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돈은 그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 그리고 이루지 못할 목표들은 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네. 그렇기에 인간이지.”
데미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자연스럽게 난간에서 등을 뗐다.
다시 파티홀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때. 하인 소년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별들 중 가장 멀고 가장 밝은 별은 뭘까요?”
“……?”
데미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하인 소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별.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정말로 간절하고 또 간절한, 그러나 데미안 정도 되는 사회적 위치를 가진 자라도 이룰 수 없는 높고 먼 목표.
“……그것은 바로 죽은 딸을 만나보는 것이 아닐는지.”
하인 소년의 말에 데미안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밤공기만 더욱 더 싸늘해진다.
이윽고,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죽은 자를 만나는 일이라.”
그는 비스듬히 돌아서 하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매섭게 벼려져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자네는 곧 할 수 있을 것 같군.”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핏-
찰나의 섬광. 데미안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황금빛 스틸레토가 하인 소년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데미안은 짧게 생각했다.
이 버릇없는 하인 소년은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것이나 생명에 지장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위 귀족에게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평생을 불편한 팔로 살아가게 되리라.
그러나.
…깡!
데미안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리고 빠르게 전개한 쾌검 역시도 빗나가 버렸다.
하인 소년의 손등에서 튀어나온 시뻘건 칼날이 그의 칼을 빗겨 쳐냈기 때문이다.
동시에 데미안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바, 밤의 사냥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