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고백 (3)
비키르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sse, Non Videri.’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부르주아가의 차세대 정점을 노리던 두 명의 후계자.
하나는 차남 데미안의 딸 줄리엣이요 다른 하나는 장남 바르톨로메오의 자식이었다.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
‘공교롭게도 형님과 나, 둘 다 슬하에 딸 하나만을 두었지.’
데미안이 했던 말이 아니었더라면 바르톨로메오의 자식이 딸이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데미안의 딸 줄리엣은 시험을 중도 포기하는 바람에 세상에 그 정체가 드러났다지만 바르톨로메오의 딸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던 인물.
‘싱클레어가 바르톨로메오의 딸이었군.’
비키르는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줄리엣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낯익다 싶었다.
같은 핏줄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나.
‘그렇다면 그녀가 왜 졸업 후 세상에서 사라졌는지 알 것 같다.’
콜로세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싱클레어는 아마도 부르주아가의 가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이목이 닿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장막 뒤에서 세상을 움직여 나갔으리라.
회귀 전의 비키르와 같은 하급 전사들이 감히 알현할 수도 없는, 아니 아예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까마득한 상류층.
전 세계의 VVIP.
……하지만 장차 그렇게 크게 자라나게 될 나무도 지금은 작은 떡잎에 불과하다.
“형아는 나 어떻게 생각해?”
품에 안겨 울먹이면서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해 올 정도로 말이다.
싱클레어의 물음을 들은 비키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정말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일 리 없다.
비키르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라고 자부하는 축이었다.
비키르의 반문에 싱클레어는 입술을 꾹 다문 뒤 눈을 쓱쓱 문지르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형아랑 연애하는 게 내가 자퇴해서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에 이루고 싶은 유일한 업적이니까.”
업적……?
비키르는 입을 반쯤 벌렸다.
연애라는 게 업적 소리나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던가?
하지만 싱클레어는 비키르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원래는 4학년까지 마친 뒤 졸업장을 받고 나서 세상을 등지려 했어. ‘우수한 학점’, ‘각종 대외활동 수상’, ‘4년 내내 수석’, ‘학생회장’, ‘콜로세오 아카데미 졸업생’. 뭐, 이런 스펙들이 학교에서, 청춘(靑春)의 마지막에서 내가 얻어 갈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싱클레어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쓰게 웃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사촌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어. 내 사촌 언니 중에 다니던 아카데미를 중도에 자퇴한 언니가 있어서.”
아마도 테미스퀴라 여대학당에 다녔던 줄리엣을 말하는 것이리라.
싱클레어는 비키르를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니의 기분을 알 것 같아. 나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거든. 학교생활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학점이나 졸업장, 상장, 자격증 같은 게 아니었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과의 추억이다.
싱클레어는 확신을 가진 눈으로 또랑또랑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비키르는 고심 끝에 물었다.
“왜 나에게 그런 가치를 두나. 나는 그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뭐 대단한 사람인가?”
싱클레어는 맥주캔 하나를 비우고는 손으로 꾸깃 쥐었다.
“……그러게. 내가 언제부터 형아를 좋아했었지. 나도 궁금하네. 한번 복기해 볼까?”
그녀는 눈을 감고 또렷한 발음, 청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겪은, 그녀 중심의, 그녀 시점에서의.
싱클레어의 입에서 20학번 새내기 때의 추억들이 천천히 구술되기 시작했다.
* * *
‘왜 나는 나가야 해?’
어린 소녀는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늙은 집사에게 묻는다.
집사는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할 뿐이다.
‘장성하셔서 돌아오셨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아가씨의 것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녀는 가문을 떠나야 했다.
보육원. 소녀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다른 아이들이 패배감에, 혹은 체념에 빠져 있을 때 소녀만은 언제나 열정과 희망으로 씩씩하게 빛났다.
명문 소학교. 소녀는 입학하자마자 신분 차별을 받았다. 수행평가의 점수가 노력 대비 저조하게 나와도, 이상하리만치 청소당번이 자주 돌아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차별과 험담, 괴롭힘도. 소녀는 꿋꿋하게 감내했다.
결과는 늘 공평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돌이켜보면 꽤나 공평했다.
뛰어난 실력과 계속되는 증명 앞에 모든 차별들은 사라졌다.
뒤에서 수군거리던 아이들도 점차 소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을 냈고 보육원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던 선생들도 점차 소녀를 가장 총애하게 되었다.
거기에 나이를 먹어갈수록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소녀의 외모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덧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난 소녀는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제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콜로세오 아카데미에 조기 입학하게 되었다.
그것도 수석으로.
소녀는 이런 넓은 곳에서도 자신의 실력이 먹힌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그리고 대망의 콜로세오 아카데미.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그리고 위로 올라와라. 도움이 되면 이용하고 도움이 안 되면 가차 없이 버려라.’
소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신입생 선서를 마쳤다.
그리고 첫 수업.
소녀보다 똑똑한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명문대에서도 소녀의 실력은 통했다.
그 사실에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 소년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첫인상은 평범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더벅머리.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흔한 이름. 그저 그런 실기와 면접 성적.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수업시간에서 소년은 일부러 학생들이 틀릴 만한 문제를 골라내는 교수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였다.
‘……으음. 과연. 필기 점수 만점답구만.’
그 까다롭던 교수마저도 인정했던 소년의 필기 성적은 만점. 990점 만점에 931점을 기록했던 소녀보다도 훨씬 더 높은 점수였다.
소녀의 다음으로 높은 점수가 700점대였으니 시험의 난이도는 말할 것도 없는 최악, 하지만 만점자는 나왔고 그것이 소녀는 아니었다.
그때부터 소녀는 소년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남을 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소녀는 객관적으로 예쁘고 몸매도 좋다. 지적일 뿐만 아니라 외모적으로도 매력이 넘쳤다. 대인관계에서 수혜를 입기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갈 때 자신이 있었다. 소년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하지만 늘 남이 자신에게 다가왔지 자신이 남에게 다가가는 것은 처음. 그래서 소녀는 조금 어색한 태도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왜 봉사활동을 나왔는지에 대한 질문. 소년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벌점 때문에 왔다.’
‘……아.’
보통 왜 봉사활동을 나왔느냐고 물으면 으레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성취감, 베푸는 마음, 희생정신 등등…… 듣기 좋은 말들.
하지만 소년은 아니었다.
귀찮다는 듯 자리를 피하는 소년.
소녀는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처음인지라 다소 생경함을 느끼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같은 곳으로 봉사활동 장소를 배정받다니 우연이네요.’
‘그런가.’
사실 아니었다.
소녀는 소년과 같은 곳으로 봉사활동을 나오기 위해 담당자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리고 그날 소녀는 소년과 조금이지만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말을 놨기 때문이다.
필기 성적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듣지 못한 소녀는 소년이 참 깍쟁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벌점 때문에 왔다는 말과는 달리 봉사활동을 정말로 열심히 했다.
화장실 청소에 식당 배식, 배관 수리에 빨랫감 세탁, 애들과 놀아줌과 동시에 운동장을 정비하는 등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하는 궂은일들을 척척 해내는 소년을 보고 소녀는 놀라움을 느꼈다.
‘……사람이 괜찮네.’
소녀는 소년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날이 소녀가 난생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남을 칭찬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소녀가 소년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안녕! 좋은 아침!’
‘?’
‘오빠! 왜 아는 척 안 해!’
‘나한테 하는 인사인 줄 몰랐다. 그리고 동급생이니 오빠라는 호칭은 쓰지 마라.’
‘왜? 나이는 내가 한 살 어린데. 말은 편하게 한다고 해도 오빠는 오빠지.’
‘듣기 불편해서 그런…….’
‘그래? 오빠가 싫으면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뭐. 점심 때까지 고민해 볼게.’
그 뒤부터 소녀는 소년을 ‘형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은근히 여자에 대한 면역이 별로 없네?’
소녀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종종 얼굴을 가린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흔들렸을 때 드러나는 소년의 맨얼굴은 충격적일 정도로 잘생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라면 이미 여자 여럿 울렸을 법한데, 라며 소녀는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뭐 아무튼. 소녀는 그 뒤로 소년을 만날 때마다 종종 아는 체를 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오빠’라는 호칭 대신 조금 특이한 ‘형아’라는 호칭을 썼던 순간.
유일하게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는 상대가 생긴 순간.
그동안은 있는지조차 몰랐던 소녀의 방심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소녀가 자신도 모를 요상한 감정으로 소년에게 다가갔을 때, 소년은 부모에 관한 충격적인 말을 했다.
‘부모 같은 것은 별반 필요 없다. 어차피 세상은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 부모라는 존재는 남의 도움이 필수적인 유년 시절에만 기능할 뿐, 그 외에는 불필요하지.’
소녀는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 약간 충격을 받았다.
보육원에서나 명문 학교에서나 아이들의 생각은 항상 비슷했었다.
부모에 대한 사랑.
그것이 결핍되어 있든 충족되어 있든 아이들은 항상 그것을 그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소녀 역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소년은 아니었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동정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같이 술도 마셨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중간고사 때 생긴 사고에서 친구들을 구하는 소년을 보면서 소녀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대학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탄 열차에서 사촌 언니가 다녔던 학교의 학생들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도와줘서 고마웠어. 사실 엄청 무서웠었거든. 쎈 언니들 같아서.’
‘나도 무서웠다.’
소년이 태연하게 하는 말에 소녀는 그만 진심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을 이렇게나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눈앞에 있는 이 소년뿐이라고.
* * *
“……말하고 나니 뭐 별거 없기는 하다.”
싱클레어는 눈가를 쓱쓱 비비며 웃었다.
비키르는 싱클레어의 말이 끝나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다.
그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음일까. 싱클레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형아한테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네. 고백하면서 이게 무슨 꼴이람.”
“…….”
“아까도 말한 대로 밤의 사냥개가 우리 아빠를 죽였어.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옆에 돌로레스 학생회장님이 계셨고.”
“…….”
“내가 학교생활을 할 때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선배가 내 아빠를 죽인 자와 한 패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친구? 선배? 교수?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더더욱 학교에 있기가 힘들기도 하고.”
싱클레어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형아라면 내 말을 믿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야. 형아는 그동안 꾸준히 밤의 사냥개를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었잖아. 그렇다면 알아주겠지. 밤의 사냥개가 얼마나 극악한 범죄자인지.”
“…….”
“지금 내겐 형아밖에 없어. 나를 이해해 줄 사람…….”
싱클레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만 비키르의 소매를 꼭 쥘 뿐이다.
그러나.
“미안한 일이지만 네 마음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비키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 싱클레어가 비키르의 소매를 더욱 꽉 쥐었다.
“그래. 형아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
“지금껏 형아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보지 못했어. 바로 우리 아빠.”
싱클레어는 말을 이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지.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형아는 우리 아빠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야.”
“…….”
“나는 예쁘고 몸매도 좋아. 어리기까지 하지. 검술도 뛰어나고 마법도 잘 다뤄. 그리고 무엇보다 형아의 삶을 다 이해하고 응원하고 뒷바라지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도, 참을성도 있어. 방해되지 않을 거야. 내가 진짜 잘할게.”
“…….”
“……그래도 안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하면 형아가 나를…….”
그 시점에서 비키르는 싱클레어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연애 같은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악마사냥꾼이 연애라니, 먼저 죽어간 전우들이 웃을 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 가족을 만드는 것만큼 불안한 일이 또 없다.
지켜야 할 것, 잃으면 안 되는 것은 곧 약점이 될 뿐이니.
비키르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싱클레어의 표정은 오히려 약간 밝아졌다.
“……‘지금은?’”
“?”
비키르가 고개를 들자 싱클레어가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다.
“지금은 아니다 이거지? 어디까지나 ‘지금은’. 그러면 나중에 형아가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는 여유가 좀 생기려나?”
“내 목표는 아주 길고 험난한 곳에 있다. 달성하려면 아직 먼…….”
“알아. 형아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원대한 야망이겠지.”
싱클레어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젠가 형아가 원하는 거 다 이루고 나면.”
“…….”
“그때는 날 받아 줄 수 있어?”
실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비키르는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이 온다면.”
“그럼 됐어.”
싱클레어는 비키르의 품에서 벗어나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맥주캔을 들어 남은 술을 원샷해 버렸다.
비키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마.”
그때. 싱클레어가 비키르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형아. 가기 전에 나 한 번만 안아 주고 가면 안 돼?”
그 말에 비키르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아직 작고 어린 소녀. 하지만 언젠가는 그 무시무시한 재벌가 부르주아의 정점에 서게 될 존재.
이 유약한 아이가 회귀 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대영웅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을까.
싱클레어에게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낀 비키르는 눈을 꾹 감았다.
그때.
와락-
싱클레어가 비키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평생 밀어내도 좋아.”
“…….”
“그러니까 지금만. 지금은 잠깐만 이대로 있어 주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다.
“하하……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스스로도 뜬금없고 멋쩍은 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은 비키르의 가슴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비키르는 잠시 호흡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이곳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싱클레어가 그랬듯 비키르 역시도 곧 콜로세오 아카데미를 떠날 계획이었다.
다음에 몸담게 될 곳은 아카데미가 요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가혹하고 험한 장소가 될 예정.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콜로세오의 건축물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상징하는 의미는 전혀 다른.
고난과 시련 그 자체로 군림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건축물.
‘……누벨바그. 그리고 멸망의 시대.’
개막(開幕).
곧 악마들과의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