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348
348화 키 맨(Key man) (1)
어둠 속.
끝을 알 수 없는 공허의 한가운데 피기는 홀로 서 있었다.
‘나가라.’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기는 직감했다.
‘또 그때의 꿈인가.’
중간고사에서 골렘 더미들에 깔려 죽을 뻔했을 때 보았던 환상.
비키르의 도움으로 간신히 헤쳐 나왔던 그때의 악몽이었다.
‘이런 쓰레기는 내 핏줄이 아니야.’
지독하게도 싸늘한 목소리.
뒤이어 어머니의 슬픈 흐느낌이 이어진다.
‘어딜 천한 것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당장 이곳에서 내쫓아.’
‘……제거해.’
주위의 수군거림이 빙글빙글 돌며 흐느낌의 뒤를 따라온다.
이후 역시도 똑같았다.
도망치는 어머니, 숲과 산, 추격자들, 가파른 절벽, 거친 강물, 굶주린 늑대, 그리고 지나가던 상인과 용병 무리들의 놀란 얼굴, 점차 웃음을 되찾아가는 어머니, 늘 다정하던 새아버지, 힘들지만 보람찼던 수험기간, 어렵고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던 학교 기숙사 생활.
환상은 유수처럼 흐르는 시간을 따라 계속해서 진행된다.
이윽고, 피기는 자신의 몸이 어느새인가 끈끈한 실 같은 것에 뒤덮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헉!?”
어둠과 공허만이 가득하던 주위는 어느새인가 기분 나쁜 육벽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식도 속에 갇힌 듯한 불쾌한 감각.
피기는 필사적으로 몸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팔다리를 휘감던 근육 섬유 같은 것들이 툭툭 끊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저 앞쪽에 문 하나가 보인다.
커다란 원형의 문. 그 주위에는 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기둥의 끝은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불길한 모양새를 한 수없이 많은 불기둥들이 문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다.
순간. 피기는 아주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하고 근원적인 욕망이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피기는 자기 자신조차 어째서인지 모르는 상태로 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야, 피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튜더의 것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우리는 인간이잖아.”
튜더의 말에 피기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바로 뒤이어 산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문은 악마나 드나드는 것이다. 우리는 가면 안 돼.”
“미쳤어? 당장 돌아와!”
비앙카 역시도 피기를 불러세운다.
그 외, 낯익은 목소리들이 등 뒤에서 대거 들려왔다.
“돌아오렴 피기.”
“이쪽이 안전하단다.”
“절대 그리로 가면 안 돼!”
“여기야! 여기로 와!”
“이쪽을 봐 줘! 고개를 돌려!”
어머니, 새아버지, 고향 친구들…… 그리워했던 모든 이들이 피기를 부른다.
피기는 어느덧 눈이 몽롱하게 풀린 상태로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리고.
스르륵-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간다.
피기는 문을 등지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절대 돌아보지 마라.’
마치 심장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박동은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고 이내 흐리멍텅하던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내 주었다.
“헉!?”
피기가 정신을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은 여전했다.
“피기! 여기를 봐! 제발!”
“뒤야! 뒤를 보라고!”
“피해! 당장 뛰어!”
“어서 피기! 이쪽으로 와야 해!”
뒤를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목소리.
그러나. 피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가슴속에 뜨겁고 거친, 맹수의 헐떡거림에 가까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쭉 나아가.’
마치 강퍅하게 늙은 노인이 신음하며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피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피기! 미쳤어!? 돌아오라고!”
“왜 우리 말을 무시하는 거냐!”
“당장 돌아와!”
“여길 보렴 피기! 엄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녀석아! 당장 여기를 보지 않으면……!”
그러자 피기의 얼굴 역시도 울상이 되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저리 절박한 어조로 외치는데 어찌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으으으으…….”
피기는 침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때.
…터억!
피기의 얼굴을 잡는 손이 있었다.
“흐악!?”
피기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피기가 뒤를 보기 직전, 피기의 양 볼을 잡은 손은 피기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되돌려 놓았다.
피기는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지고 상처투성이인, 끈적한 피로 범벅되어 있는 거친 손.
그 손의 주인은 분명 피기의 옆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앞으로 걸어라.’
아까의 그 거칠게 쉰 목소리였다.
피기는 덜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손을 따라 옆으로 곁눈질해 보니 큰 키의 누군가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년의 한 남자.
시야의 최외곽이라서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과 얼굴이 온통 화상과 칼자국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도 피기를 부축하다시피 하며 앞으로 데려갔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목과 어깨, 턱을 손으로 잡은 채로.
이윽고. 피기는 눈앞에 있는 커다란 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글거리는 불과 육중한 강철.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주눅 들게 만드는 문이었다.
하지만 피기는 어째서인지 그 문이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만이 마음에 걸렸을 뿐.
그마저도 옆에서 함께 걸어 준 의문의 남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정체 모를 성취감과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 문을 꼭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피기가 막 입을 열어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남자가 피기의 몸에서 손을 뗐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이제부터는 혼자서 가라.’
동시에, 그의 모습과 목소리는 피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며 방금을 마지막으로 아주 먼 곳으로 영영 가 버렸다는 사실을.
“……좋은 사람이네.”
피기는 온 힘을 다해 눈앞에 있는 문을 밀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어둠을 향해 몸을 던졌다.
끼이이이이익-
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만을 뒤로한 채.
* * *
“헉!?”
피기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었다.
“도, 돌아왔네?”
얼굴을 만져 보니 10대의 피부 그대로다.
유수의 강에서 먹었던 나이가 전부 초기화되어 있었다.
이윽고, 피기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흐헉!?”
아까보다 더욱 더 놀랄만한 일들이 그곳에 있었다.
밤하늘처럼 검고 깊은 천장에 돋아나 있는 식물의 뿌리.
나락수의 본체에서 뻗어 나온 심층부의 본뿌리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본뿌리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잔뿌리들 밑에 열매 비스무리한 것이 매달려 있었다.
열매의 겉껍질 속에는 사람의 형체가 잠들어 있었는데 얼굴만 껍질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기에 누가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었다.
튜더, 산쵸, 비앙카, 그리고 발락의 전사들 모두가 그곳에 고치처럼 꽁꽁 싸매인 채 매달려 있었다.
하나같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채로.
피기는 이 거대한 뿌리가 나락수의 힘을 유지시키는 본체임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아래로 연결된 본뿌리를 보니 그 안쪽의 혈관들이 지옥 밑의 물과 불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곳에서 혈수의 옥잠화 등 각종 수생식물의 씨앗들, 그리고 흑해의 무영왕 등의 해파리 류가 딸려 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우리가 뿜어냈던 감정들을 연료로 삼아서 인간세상과 지옥을 연결하는 거였어.”
피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피기의 힘만으로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본뿌리를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당장 피기의 힘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스릉-
피기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칼을 뽑았다.
유수의 강에서 수련하며 쌓았던 레벨과 스탯은 그대로다.
나이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때의 경험들 역시도 피기의 손에 그대로 익어 있었다.
“에잇!”
피기는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뻗어나간 참격은 잔뿌리 밑에 매달려 있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피기는 가장 먼저 떨어진 튜더에게로 가 열매의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튜더의 뺨을 짝짝 때리기 시작했다.
“튜더! 정신 차려! 산쵸도! 비앙카도!”
피기가 열과 성의를 다해 뺨을 날리자 이내 튜더, 산쵸, 비앙카가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어? 뭐지? 나는 분명 아버지가 불러서 뒤돌아봤었는데?”
“음? 누님? 부르셔 놓고 어디로…… 헉? 여기가 어디냐?”
“윽! 머리 아파. 뭐야? 내 얼굴이 원래 나이대로 돌아왔잖아?”
눈을 뜬 것은 먼저 죽은 순서대로였다.
피기는 나머지 열매들도 모두 끌어내렸다.
그 속에 갇혀 있었던 발락의 원주민들 역시도 하나 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예전에 죽었던 이들도, 죽였던 이들도 모두 다 살아있다.
“어? 저, 저것 좀 봐! 발락의 그 사냥장 아니야?”
“뭐? 저런 어린 꼬맹이가 무슨…….”
“헉! 아, 아니야. 그 얼굴이 맞아! 무엇보다 다들 애기들뿐이잖아!”
튜더, 산쵸, 비앙카는 눈앞에 보이는 앳된 얼굴의 소녀를 보고 경악했다.
그녀는 바로 아휼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레벨, 노련한 노년 여성의 관록을 뽐내던 여전사가 사실은 이토록 어린 소녀였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실제로 그 뒤로 열매에서 깨어난 발락의 전사들은 대부분 어린 꼬마아이들이었기에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는 다소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유수의 강에서 쌓았던 경험치와 레벨, 스탯은 다들 그대로인지라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절대 얕볼 수 없었다.
저들은 이미 수십 년을 살아온 발락의 전사들.
그것은 유수의 강에서 7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던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나락수의 본뿌리를 본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는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런가. 우리가 뿜어내는 증오와 살의, 불안, 초조, 열등감, 삶에 대한 갈망이 이 나락수를 유지시키는 영양분이었군.”
“악마에게 가는 힘의 원천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지옥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영양분의 통로야.”
“이걸로 지옥의 불길과 물길을 끌어왔던 건가? 탑의 동력원으로 쓰려고?”
“그동안 만났던 재수 없는 마물들도 다 이 뿌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던 거였네.”
바로 그때.
“저, 저기!”
아휼이 어눌한 제국어로 소리쳤다.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는 아휼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그곳에는 커다란 열매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다른 열매들보다 월등히 크고 무거워 보이는 열매.
그 안에는 비키르가 갇혀 있었다.
“우리가 구해 줄게!”
피기는 신중한 표정으로 칼을 들어 휘둘렀다.
이내, 피기의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 익스퍼트 특유의 기체 아우라가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싹둑!
비키르가 갇혀 있던 열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모두들 비키르에게로 몰려들었다.
“비키르! 일어나!”
“눈을 떠라 비키르!”
“수, 숨은 쉬고 있어!”
“깊게 잠들었을 뿐인가.”
아무리 뺨을 때리고 몸을 흔들어도 비키르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비키르는 마지막에 모든 이들의 목을 날리고 홀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비키르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키르는 알고 있었던 거야. 먼저 죽는 순서대로 환상에서 빨리 깨어난다는 걸.”
“그렇군. 오히려 일찍 죽는 쪽이 유리했던 미션이었나.”
“이곳까지 올 정도면 다들 강하고 노련해서 쉽게 죽지 않았겠지.”
“무조건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에 도가 튼 녀석들일 거야. 아마도 쉽게 죽어 주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환각 속에 오래 갇혀 있겠군.”
결국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 죽고 죽이기!
※ 선주객들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원래 힘든 거예요~
※ 전원이 미션을 클리어했을 경우에만 인정입니다!
미션 ‘죽고’, ‘죽이기’. 그것은 단순히 남을 죽이는 것만이 답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죽어야’ 끝나는 것.
게다가 이번 미션은 최후의 생존자가 최후의 낙오자가 되는 방식.
필연적으로 악독해지고 누군가를 배신하고 상처 입혔던 버릇대로 살았다가는 그 결과를 고스란히 역으로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먼저 죽었던 이가 먼저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는 만큼, 먼저 버려지고 먼저 배신당했던 이가 아직 잠들어 있는 경쟁자들을 그냥 살려 둘 리 없다.
게다가 전원이 미션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제약까지 있으니 그 난이도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갑과 을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그래서 새로운 갑과 을을 만들어내는. 실로 악마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
비키르가 눈을 떴다.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 그리고 아휼을 비롯한 발락의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비키르의 상태를 살폈다.
“비키르! 괜찮아!?”
“다친 곳은 없나?”
“이, 이거 손가락이 몇 개로 보여 비키르?”
“아니, 유수의 강에 혼자 남아서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그러자 비키르는 잠시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과 검버섯들이 사라졌나. 깨어나면 원래 나이로 돌아오는 것이었군.”
그 말을 들은 모두는 경악했다.
손에 주름과 검버섯이 생겼을 정도면…… 비키르는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유수의 강에서 버티고 온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해 비키르는 별다른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다만.
-LV: 1 (%)
-호칭: ‘시궁쥐 사냥꾼’, ‘지옥의 개장수’, ‘옥잠화 벌목꾼’, ‘마인 처형인’, ‘흑해의 왕 시해자’, ‘용마인의 호적수’, ‘유수의 뱃사공’
-스탯
↳힘: 798
↳민첩: 798
↳체력: 798
↳물리 저항: 798
↳마력 저항: 798
↳반사 신경: 798
레벨 1. 6대 스탯의 합 4,788.
3대 특수 스탯을 모두 개화해 낸 데다가 그 수치가 각각 798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과를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확인했을 뿐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비키르는 이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피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짧게 웃었다.
“……잘해 주었구나.”
푹 잠겨서일까? 비키르의 목소리는 굉장히 많이 쉬어 있었고 또 거칠었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방금은 정말로 노인의 목소리 같았다.
그때.
피기의 표정이 변했다.
“이, 이 목소리야!”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피기가 재차 말을 이었다.
“나를 환각 속에서 구해 준 목소리! 바로 이 목소리였다구!”
피기는 자신을 문으로 이끌어 준, 뒤를 돌아보지 않게끔 도와준 목소리가 비키르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키르의 손에 있는 흉터나 점의 위치, 손톱의 모양 등이 그때의 손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이제부터는 혼자서 가라.’
피기는 그때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비키르의 손을 꼭 쥐었다.
“비키르. 네 덕분에 살 수 있었어. 만약 그때 뒤를 돌아봤었다면 나는 깨어나지 못했을 거야. 다른 친구들을 깨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피기의 진정어린 감사에 비키르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나는 그랬던 기억이 없는데.’
비키르는 잠시 생각한 끝에 가설 하나를 세웠다.
예전에 ‘10층 실낙원’에 도달했을 당시 조우했었던 옛 전우들.
혹시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던 게 아닐까?
기억 속 잔류사념처럼 남아 있던 회귀 전 자신의 모습이 어떤 방식으로든 실체화되어 친구들을 도와주었던 것이 아닐는지, 비키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 죽고 죽이기!
※ 죽고 죽이는 데스매치가 드디어 끝났어요!
※ 한번 죽어 보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 후발주자의 미션 클리어와 동시에 선주객들은 탑 밖으로 역소환됩니다
※ 역소환 대상인 선주객들은 미션을 클리어한 이들에 한합니다
요란한 알림음과 함께 보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르르-
모두의 앞으로 황금색 사탕의 무더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나락수의 심층부로 들어가는 게이트 역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키르가 가장 경계했던 알림음 역시도.
비키르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아휼은 역소환을 거부했다.
“잘 생각했다.”
비키르는 아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해에서 만났던 충왕인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오히려 탑 안에 남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내가 탑을 클리어하겠다. 너희들은 그때 탑을 나가서 밀림으로 돌아가거라. 발락을 재건해야지.”
비키르의 말에 아휼을 비롯한 발락의 꼬맹이들은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탑 안에서 놀라운 재능을 개화한 그들은 훗날 위대한 전사가 되어 일족을 부흥시키리라.
그때.
“비키르.”
튜더, 산쵸, 피기, 비앙카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비키르에게 친구들이 물었다.
“너는 알아? 왜 피기만 깨어날 수 있었는지?”
모두의 의문은 합당했다.
솔직히 말해서 피기의 무력은 넷 중 가장 아래였고 정신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근성과 오기, 끈기나 마음의 단단함 역시도 피기는 가장 꼴찌.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들 넷 중 가장 먼저 깨어나 모두를 구할 수 있었던 이는 피기였다.
“…….”
비키르는 조용히 턱을 쓸었다.
시선은 피기의 팔뚝, 검은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는 작은 상처에 고정되어 있는 채다.
“잘 들어라 피기.”
유수의 강에 남아 수십 년을 살다 온 비키르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결과였다.
“어쩌면 너는 암두시아스의 나락수를 무너트릴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