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492
492화 사냥개 달린다 (3)
눈을 감으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하늘도, 바다도 모두 어둠에 물들어 보이지 않지만 발가락 사이사이로 와닿는 까끌까끌한 모래알의 감촉만은 똑똑히 느껴지는 것이다.
파도가 모래톱에 닿아 부서질 때면 가냘픈 손목이 휘청인다.
손에 쥐고 있던 얼마 되지도 않는 모래마저 파도에 스러져 간다.
나는 울며 붙잡지만 아무 것도 되돌려 받지 못한다.
파도도. 모래도. 눈물마저도.
나는 꿰매어진 입으로 묻는다.
-신이여. 저것들을 더 단단히 쥘 수는 없을까요?
-저 잔혹한 파도로부터 한 줌이라도 더 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내가 지금 쥐고 있는, 아니 어쩌면 쥐고 있는 것 같은.
-이 모든 것은 단순히 꿈속의 꿈일 뿐인가요?
사랑하는 이는 모래톱 위에서 나의 통곡을 내려다본다.
나는 꿰매어진 입으로 말한다.
-그대여, 내가 사라지거든 슬픈 노래일랑 부르지 말아요.
-붉은 상사화(相思花)도 푸른 피안화(彼岸花)도 내 머리맡에는 심지 말고.
-그저 비바람과 세월을 깎을 칼 한 자루만 무덤 앞에 꽂아 두세요.
-그리고 가끔 시간이 남는다면 나를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잊어버린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나는 그대의 울혈 맺힌 심장을 쥐지 못하고 피멍 든 목젖에도 귀 기울일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비탄에 젖어 절규하는 올빼미의 울음을 따라.
-새벽 어스름에 파묻혀 꿈을 꾸며 문드러지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우연히, 사랑했던 그대의 얼굴을 기억해 낼지도.
-혹은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 *
“……!”
비키르는 아득해졌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비키르는 전신의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한이 든다. 발가락과 손가락 끝이 떨어져 나갈 듯 차가웠다.
손목에 튀어나와 있는 마검 바알제붑이 이토록 무겁고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던 적이 또 없었다.
…쿵!
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진동, 이 묵직한 무게감.
그것은 비키르의 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키르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절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있었으니까.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악마의 머리통이었다.
안드라스.
일번시(一番尸). 불화의 후작. 최후의 적. 마지막 악마.
올빼미의 머리를 하고 있는 그것은 진득한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키르의 9식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목의 절단면은 재생할 조짐조차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쩌저적-
석화되어 바스라지는 절단면을 보면 재생은 아예 글렀다.
안드라스는 정말로 죽어 가고 있었다.
혼도 육신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영멸이다.
“……해치웠나.”
비키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순간.
[인간! 그런 불길한 말 하지 마라! 또 살아날라!]데카라비아가 황급히 비키르의 입을 막는다.
비키르는 건조하게나마 피식 웃었다.
끝을 예감하는 순간 그 뒤가 이어진다는 것 역시도 잘 팔리는 스토리, 뻔한 클리셰.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안드라스는 최후의 힘을 모두 쏟아 냈고 그 결과 내부에서부터 자멸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바스커빌가의 궁극이라 불리는 9식에 당했으니 그 영혼마저 갈가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드라스가 순식간에 영멸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나?]안드라스는 검게 죽어 버린 두 눈에서 암흑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린 머리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혓바닥은 움직인다.
많이 뻣뻣해지기는 했지만.
[네가 이겼다. 악마사냥꾼이여. 멸망의 문이 곧 닫힐 것이니 너와 다른 인간들이 나머지 악마들을 만날 일은 없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결코 좋은 일일까? 옳게 된 일일까? 인류 전체에게 있어서 말이야.]안드라스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보면 네놈은 인류가 지은 원죄(原罪)를 탕감할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나 다름없……]그러나 안드라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비키르가 발을 들어 올려 잘린 머리통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이다.
…풀썩!
맵고 고운 재로 변해 나부끼는 안드라스의 몸과 머리.
이윽고, 비키르의 귓가에 안드라스가 남긴 예언이 아스라이 맴돌다 사라졌다.
[말년까지 추격을 피해 달아나고 또 달아나야 하는 삶. 외로움과 고독을 곱씹는 말로.] [그러나 너를 쫓는 자들은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끝끝내 네가 있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도다. 평생. 영원히.] [보인다. 너를 추격하는 이들의 분노한 표정이. 그들에게 영원히 옭아매이고 속박될 너의 비참한 미래가.]트라우마는 오래 남는다.
과거 변절자, 내통자로 몰려 기나긴 추격에 시달려야 했던 비키르는 이를 악물고 안드라스가 남긴 예언, 아니 저주들을 견뎌 냈다.
[최후에는 다섯 조각이 나리라!]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안드라스는 완전히 부서져 사라졌다.
죽음의 문턱 너머의 세계에서마저 사라진, 말 그대로 완전한 영멸(永滅).
그와 동시에.
쿠드드드드드드-
바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궁이 무너지고 있었다.
붕괴의 시발점은 아마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해전이리라.
콰콰콰쾅!
뒤편의 지붕과 기둥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촉수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온통 찢어지고 불탄 크라켄의 다리 토막이 날아온 것이다.
“……바깥도 슬슬 정리되어 가는 모양이군.”
비키르는 고개를 돌렸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붕괴물들의 저편. 그곳에는 아직 열려 있는 차원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차원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피기. 두 번의 삶을 거치는 동안 함께했던 전우.
“고생했어. 정말로.”
피기는 비키르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키르는 물었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간단해. 내가 이 마지막 차원문을 닫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
멸망의 문은 닫혔다.
멸망의 문이 열려 있는 평생세계로 통하는 문은 이제 하나가 남았다.
“나는 문을 닫는 것만 할 수 있을 뿐, 여는 것은 못 해. 그러니 이 문을 닫기만 하면 이제 모든 문이 사라지는 거야. 평생.”
“…….”
비키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된 여정의 끝, 지친 사냥개. 피딱지 눌어붙은 몸을 이제는 좀 누일 수 있을까?
……아니다.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가장 큰일. 진정코 해야 할 과업이 분명히 존재한다.
꾸득-
비키르는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피기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피기는 비키르를 향해 물었다.
“마지막 문을 없애기 전에 네게 선택권을 줄게.”
“…….”
“돌아갈 거야? 네가 원래 살던 세계로.”
그렇다.
차원문 너머의 세계는 비키르가 죽고 없는 세계.
이쪽 세계에서 새로운 몸을 얻은 사냥개는 다시금 저쪽 세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기는 내심 비키르가 저쪽 세계로 넘어가기를 바라지 않는 듯했다.
“한번 돌아가면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못해. 인연의 끈도 끊어져. 영영 이별인 거야.”
이쪽 세상은 이미 평화를 거의 되찾았다.
겁화의 장마는 시작되자마자 끝났고 대홍수 역시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악마들은 전멸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고 마인과 마물들은 모두 사멸할 것이다.
“이제 너를 따르는 사람들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기만 하면 돼. 굳이 원래 살던 척박한 세계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피기의 말이 맞다.
저쪽 세상은 십상시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대한 악마들이 62마리씩이나 우글거린다.
비키르가 겪어 본 가장 최악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멸망과 종말이 범람하는 세계.
그야말로 인외마경의 지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피기는 재촉하듯 말했다.
“그것들 중 일부가 아직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지금 남아 있는 이 하나의 차원문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져.”
안드라스가 죽기 전 만들어 놓은 마지막 차원문.
이 통로를 향해 진득한 악의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 문을 빨리 닫지 않으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악마가 넘어올지도 모른다.
십상시 열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비키르는 갈등했다.
바로 그때.
-전멸! 전멸입니다!
-더는 못 버텨!
-후퇴! 후퇴하라!
-빌어먹을! 후퇴할 곳도 없다고 이제!
-신이여,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하소서……
.
.
문 너머에서 처절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멸망의 시대에 남겨 두고 온 전우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인류가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익숙한 목소리 몇몇이 섞여 있었다.
-모르그가 전원! 이곳에서 옥쇄한다!
-마지막까지 신앙을 잃지 마세요, 여러분!
-하하…… 이제는 돈도 황금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비키르는 가부간의 결단을 내렸다.
“아직 살아 있는 전우들의 목소리를 들은 이상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넘어간다. 원래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간다.
지금껏 걸어온 가시밭길을 다시 한번 더 걸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길고 가혹한 순례길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사냥개는 간다. 피투성이가 되어, 절뚝거리면서도.
비키르의 말을 들은 피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래. 너라면 역시 그렇게 할 줄 알았어.”
피기의 대답에 비키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이윽고.
비키르는 층계를 오른다.
반파된 옥좌, 그리고 무너지기 직전의 계단을 위태롭게.
이윽고,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차원문이 눈앞에 보인다.
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잘려 나간 목이 있는 세계.
피와 얼룩으로 점철된 오욕의 시간선.
비키르는 고개를 돌려 피기와 시선을 마주했다.
피기는 처연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밤의 사냥개. 비키르 반 바스커빌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제는 정말 넘어갈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
“가긴 어딜 가!”
문턱을 넘어가려는 비키르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는 목소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