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496
1
피의 강이 서서히 말라붙어 갈 무렵.
아직 악마군 잔당들과의 전투가 채 끝나지 않은 서부전선의 한 고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 * *
무수히 많은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르그의 성채.
지면 위에 수많은 꼬챙이들이 박혀 있는 듯 보이는 외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숨겨져 있는 탑의 지하.
모르그를 구성하고 있는 명당(明黨)과 암당(暗黨)에는 이처럼 각기 비밀스러운 지하공간이 존재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암당의 심층부라 불리는 ‘암부(暗扶)’이다.
지면 아래로 자그마치 600층이 넘게 뻗어 나간 지하공간.
그리고 그곳의 최하층인 666층에는 암당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제국의 감시도, 악마의 시선도, 심지어 모르그 가문의 가주조차도 접근할 수 없는, 오직 암당의 대의원만이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의 층계 제일 밑바닥.
그곳에는 한 명의 여인이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츠츠츠츠츠츠……
전신 혈맥에 흐르는 마나를 점검하고 있는 마법사.
붉은 머리에 흰 살결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는 대마도사였다.
모르그 뮤 까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
한평생 홀로 선 채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 왔고, 때론 이겼고 때론 졌으며, 지금껏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매 순간을 살아왔다.
“후우…….”
이윽고, 명상을 끝낸 까뮤가 눈을 떴다.
본디 마법사가 마나를 점검할 때에는 매우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마나를 점검하는 마법사는 갓 허물을 벗은 게나 새우와도 같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까뮤는 항상 꼭,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이 암부 666층에서만 명상에 잠기곤 했다.
절대독선.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따로 호법을 세우지도 않는다.
자신의 몸은 오로지 자신만이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명상 끝냈어? 평소보다 오래 하네?”
까뮤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황새의 부리가 달린 가면.
음침하고 불길한 가면을 뒤집어쓴 한 여자가 돌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단 암당의 대의원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이곳 666층에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건만.
“……평소보다?”
무엇보다 이 말이 까뮤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이 말인즉슨, 눈앞에 있는 저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까뮤가 평소 명상하는 것을 많이, 오래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까뮤는 평소 하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명상에 빠져 있었기에 저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쿠르르르르륵!
주변에서 마나가 끓는다.
까뮤는 불길과 쇠꼬챙이를 소환해 눈앞에 있는 침입자를 향해 내던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죽어라. 질문은 그 뒤에 하지.”
사령술(死靈術)의 대가인 까뮤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더욱 편하고 익숙했다.
특히나 포로나 첩자를 심문할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콰콰콰쾅!
더더욱 믿지 못할 광경이 그녀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불길과 쇠꼬챙이. 그것이 반대편에서도 날아와 까뮤의 공격을 상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녀를 기겁시킬 만한 일이 또 벌어졌다.
스스스스스스스스……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까뮤의 앞으로 늘어진다.
망령목(亡靈木).
마법사의 심상(心想) 속에 뿌리를 내리고 영혼의 업보를 양분 삼아 자라나는 마나의 나무.
추상과 형이상학을 먹고 살며 그 수확물을 물질계에 드리우는 불가해(不可解)의 존재.
그리고 여덟 번째 악마 군주 ‘세에레’의 성명절기였기도 한.
“마, 말도 안 돼! 세에레, 그놈은 분명히 내가 스네이크와 함께 소멸시켰거늘!”
까뮤는 경악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래 전에 죽인 악마 군주가 살아 돌아온 셈이니까.
그러나.
“진정해.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가면의 여자는 까뮤의 공격만을 깔끔하게 상쇄시킨 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너는 대체 뭐냐? 악마의 주구냐? 어떻게 팔번시의 힘을 가지고 있지?”
“이렇게.”
까뮤의 질문에 여자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것이 있었다.
“세, 세에레…… 인가?”
까뮤는 놀라 소리치려다가 말고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한때 이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사령술의 악마 세에레’라고 하기에는 뭔가가 좀 많이 부족하다.
“……왜 이렇게 작아?”
까뮤는 작고 하찮게 변해 버린 세에레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얼굴에 쓴 마스크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거의 다 흡수해 버렸거든.”
“……악마의 힘을?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그러자 까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뭐 하는 미친년이기에 주워 먹을 게 없어서 악마의 힘을 주워 먹었지? 보통 미친년이 아니로구나. 살려 둬서 세상에 이로울 것이 없겠다.”
“누워서 침 뱉지 말고.”
“……?”
까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붉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이목구비.
“……!”
까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까뮤의 앞에 있는 이는 바로 까뮤였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너지.”
가면을 벗은 까뮤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왔다.
“많이 늙었을 줄 알았는데 별로 안 늙었네? 역시 나야. 나이를 먹어도 예쁘잖아.”
“……?”
영문을 모르겠다는 까뮤의 앞으로 까뮤가 걸어와 섰다.
이윽고, 까뮤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평행세계를 넘어온 너야.”
“뭔 개…….”
“X같은 소리냐고?”
“…….”
20대의 까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까뮤는 장년을 넘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까뮤와 외형적으로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구분하기 쉽게 ‘이쪽의 너’와 ‘저쪽의 나’로 구분하자고.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다른 세계 출신이니까.”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쪽의 까뮤는 이를 갈며 말했다.
“악마는 죽인다. 악마의 힘을 쓰는 놈들도 죽인다. 그냥 죄다 쳐 죽여야 한다.”
“……오우. 이쪽은 우리 서방보다 훨씬 화끈하네.”
이윽고, 이쪽의 까뮤가 쏘는 불과 꼬챙이들이 날아든다.
저쪽의 까뮤는 망령목의 뿌리에 묶여 있는 세에레를 방패처럼 내세워 그것을 막아냈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세에레를 보며 이쪽의 까뮤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반쯤 벌린다.
그때.
“이러면 좀 믿을 수 있으려나?”
저쪽의 까뮤가 이쪽의 까뮤에게 화해의 증표를 던졌다.
…툭!
그것은 바로 바알의 목이었다.
이쪽의 까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건 바알! 최초의 군주! 이, 이 녀석을 죽인 거냐?”
“정확히는 껍데기뿐이지만 말이야. 본체는 어디 다른 곳에 숨어 있는 모양이야.”
저쪽의 까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바알의 진짜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못 찾겠더라고. 그동안 수많은 악마들을 잡아 족쳤는데도 다들 모른다고 하더라. 아마도 바알 자체는 인간계 정복에 큰 뜻이 없는 것 같던데? 그놈의 유지를 잇겠다는 하위 악마들만 넘쳐 나서 문제였었던 거지.”
“네년은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말했잖아. 너는 나고 나는 너라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도 들어올 수 있었지.”
저쪽의 까뮤는 말을 마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로지 까뮤의 육체에만 반응하는 출입문의 봉인장치, 그리고 익숙한 배열의 기둥들, 바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까지.
모든 것이 까뮤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어느덧, 저쪽의 까뮤는 눈시울을 촉촉하게 붉혔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던 곳이야. 아직도 스네이크 숙부를 떠올리면 눈물이…….”
“뭐? 스네이크? 스승? 그 더러운 짐승 놈이 왜 스승이냐?”
“뭐? 짐승? 지금 스네이크 숙부님을 짐승이라고 말한 거냐?”
“……?”
“……?”
이윽고, 두 명의 까뮤가 서로 날카롭게 대치했다.
“나한테 숙부는 아돌프 숙부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악마들의 총공세에 휘말려 돌아가셨지만. 스네이크, 그 비열하고 추잡한 작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개일 뿐이야.”
“내 스승님을 모욕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용서 못 하지.”
“닥쳐라. 스네이크는 아돌프 숙부와 어머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 배신자야.”
“나한테는 아니야.”
“방금 네년이 한 말과 다르잖나. 나는 너고 너는 나라며.”
“이건 아닌가 보지.”
바알의 껍데기로 아주 잠깐 조성될 뻔했던 화해 무드는 금세 다시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게 변했다.
바로 그때.
“손을 잡으라고 보냈더니 깽판을 치면 어떻게 하나.”
돌기둥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두 까뮤의 가운데로 나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비키르. 몇 번인가의 삶을 건너온 사냥개.
상처투성이의 노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순간.
“……!”
이쪽의 까뮤가 멈칫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 불릴 정도로 오만하고 고집 센 그녀조차 멈칫하게 만들 정도로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눈빛은 깊고 강렬했다.
게다가 보고만 있어도 왜인지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심장이 떨리는 것이……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막 싹틀락 말락……
“야! 뭘 봐!”
하지만 이쪽의 까뮤는 저쪽의 까뮤가 외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저쪽의 까뮤는 잽싸게 달려가 비키르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쪽의 까뮤를 향해 단단히 경고했다.
“남의 남편한테 눈독 들이지 마라.”
“나는 너고 너는 나라며?”
“아, 이건 아닌가 보지!”
저쪽의 까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그녀는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자신과 자신의 남편(?)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건데?”
그러자 이쪽의 까뮤가 대답했다.
“손을 잡자.”
“손? 뭐, 네일아트라도 하자는 거냐?”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내 성격도 알겠지? 한 번 더 비꼬면 죽여 버릴 거야.”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내 성격도 알겠네. 죽여 봐 어디.”
“하, 이 XX년이 진짜…….”
그때, 비키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다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무슨 힘을 합치자는 거냐? 악마들을 죽이는 것에?”
“그것 말고도. 하나가 또 있지 않나. 보다 더 근본적인.”
“……악마들을 쳐 죽이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인류를 수복하는 일.”
“!”
비키르는 말을 이어 까뮤의 의문에 대답했다.
“멸망의 시대 이후 인류의 99.99%가 사멸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튜더, 비앙카, 산쵸, 피기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했지. 악마의 숙주가 되어 이용만 당했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을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냐. 죽은 자는 죽은 자인걸.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걸…….”
이쪽의 까뮤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마도 악마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레스파네나 아돌프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을 모두 부활시키는 방법이 있지 않나.”
비키르의 말에 이쪽의 까뮤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저쪽의 까뮤가 서 있었다.
쿵쿵-
까뮤는 환한 표정으로 바닥을 발로 구른다.
그리고 바닥에는 아직 완성되다 만, 불완전한 마법진 하나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순간, 저쪽의 까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더 동요한 듯한 표정.
이윽고.
두 까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든다.
“완전소생의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