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야만부족의 노예 (2)
발락의 전사이자 족장의 딸인 아이옌.
그녀는 눈앞에 있는 비키르를 향해 말했다.
“엎드려.”
상하관계를 분명히 해두려는 것일까?
하지만 딱히 그런 의도를 가진 말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잇-
비키르 역시 뒤를 향해 날아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팟!
아이옌이 비키르의 목에 걸린 개목줄을 잡아당겼다.
비키르의 몸이 숙여지자 뒷덜미를 스치고 가는 화살 한 대가 땅에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아이옌이 소리쳤다.
“이 녀석들! 다른 데 가서 연습하지 못해!?”
그러자 수풀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어린아이들이 와- 하고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손에 활과 화살을 든 채였다.
“…….”
비키르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아이옌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물기를 털어내는 소녀.
전에 노예경매장에서 구출했던 그 소녀가 맞다.
아이옌이 비키르에게 말했다.
“우리는 구면이지?”
어눌한 제국어. 비키르는 아이옌의 제국어 실력보다는 자신의 발락어 실력이 낫다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또 보게 됐군.”
비키르의 입에서 나오는 발락의 언어를 들은 아이옌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발락의 말을 할 줄 아나?”
“조금은.”
그녀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비키르의 앞을 향해 걸어왔다.
몸에는 짧은 사슴 가죽 몇 장만 둘러져 있었지만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기색이었다.
아이옌은 비키르의 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그때에는 고마웠다. 우리는 은혜는 두 배로, 복수는 열 배로 갚아 주지.”
“…….”
“네가 나를 한번 구해 줬으니 나도 너를 두 번 구해 준 거야.”
“…….”
“설마 ‘그녀’와 맞서 싸우려 들 줄이야. 도망치다가 혹시나 해서 돌아와 봤더니만.”
확실히, 아이옌이 던진 올가미가 제때 목에 걸려 당겨지지 않았더라면 비키르는 어둠 속의 마물 ‘마담 여덟다리’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번은 무엇인가?
비키르가 설명을 요구하듯 쳐다보자 아이옌의 눈꼬리가 여우의 것 같은 호선을 그렸다.
“오면서 못 봤나?”
그녀는 수풀 저 너머, 부락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매캐한 연기 기둥을 가리켰다.
비키르는 오면서 만났던 포로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자신 역시도 그와 비슷한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을 막아 준 사람이 아마도 눈앞에 있는 아이옌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나를 살려 놓은 이유가 뭔가?”
단순히 은혜를 갚기 위해? 그렇다면 애초에 자기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걸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비키르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자 했던 이는 아이옌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몰려왔던 발락의 모든 여전사들이 모두 비키르의 목을 노렸었으니까.
아이옌이 은근슬쩍 딴청을 피자 비키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게 그 남편감 사냥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오, 어디서 들은 것은 있는 모양이로군.”
비단 발락뿐만이 아니라 밀림에 사는 대부분의 야만족들은 배우자를 부족 바깥에서 납치해 온다.
근친을 피해 외부의 신선한 피를 수혈해 오기 위함이다.
물론 발락은 전사 부족이니만큼 납치 대상의 육체가 얼마나 튼튼한지는 큰 기준점이 된다.
아이옌은 비키르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상품을 감정하는 감정사처럼.
그동안 비키르는 많은 고민을 했다.
만약 이들이 바스커빌가에 자신의 생존 소식을 알린다면? 그리고 인질 협상이라도 벌인다면?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휴고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쥐죽은 듯 숨어 힘을 기르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곳을 탈출하거나 혹은 전원 몰살시키거나 해야 하는데…… 그것은 비키르의 현재 몸 상태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키르는 괜한 걱정을 한 것이 되었다.
저쪽에서도 딱히 비키르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옌은 비키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착각 마라. 나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 남편감 따위는 필요 없다.”
“…….”
“너는 노예로 쓰기 위해 잡아온 것이야.”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올가미를 던질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비키르가 가만히 있자 아이옌은 손에 든 개목걸이를 흔들며 말했다.
“어차피 그 몸으로는 남자 구실도 못 하겠지. 그냥 노예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원래 발락의 여자들은 외부에서 잡아온 남자들을 번식용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다.
그 남자가 만약 수컷으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으레 죽여 버리곤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이옌은 그렇게 하지는 않을 눈치였다.
아이옌은 물가에 있던 자기 옷을 비키르에게 던졌다.
비키르가 그것을 받아들자 이내 개목걸이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아이옌이 부락을 향해 앞장서 나가고 있었다.
“너는 앞으로 내 집 앞에 살며 내 시중을 들어야 해.”
한 걸음을 뒤따라 갈 때마다 전신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키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겠나? 그나마 무르시엘라고의 힘 덕분에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그런 비키르에게 아이옌은 짤막하게 첫 명령을 내렸다.
“일단 호칭부터 정리하지.”
앞서 걷던 아이옌은 부락 입구에 들어가기 전 멈춰서 비키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님이라 불러 봐라.”
* * *
비키르는 다시 발락의 마을로 내려왔다.
그들은 울창한 밀림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희박해 보인다.
잠자리가 없으면 친구의 천막에 들어가 잤고 그것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많은 사람에게 얻어먹었고 그 또한 기분 좋게 음식을 내주었다.
으레 모든 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이니 있을 때 서로 나누자라는 의식이 공유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넓은 천막을 가진 친구의 집에 모여 유쾌하게 놀다 잠이 들었다.
땔감이나 고기와 술이 호방하게 나누어졌고 얌체는 없었다.
외부에서 납치당해 왔더라도 일단 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갈 수 있었고 어디에나 올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생동감 넘치고 정겨운 분위기.
하지만 부락 경계에 있는 가시나무들 위에 걸려 있는 포로의 해골들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외부인에게는 가차 없지만 내부인에게는 한없이 정겹고 자유로운 땅이 바로 이곳 발락의 부락이다.
……하지만 부락 내에는 내부인들조차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위엄 있는 구역’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비키르가 향한 곳은 바로 그런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한 커다란 천막.
최대 24인까지도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 큰 천막 앞으로는 방정맞게 뛰놀던 아이들조차도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전사들은 항상 이 천막의 입구가 있는 쪽을 향해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했다.
고기를 굽던 이들은 이쪽을 향해 연기가 풍기지 않도록 조심했고 사냥감의 내장을 손질하던 이들은 피 냄새가 흘러가지 않게끔 신경을 썼다.
‘……족장의 집인가.’
비키르는 천막의 규모를 보고 미루어 짐작했다.
아이옌은 비키르의 목에 채워져 있는 개목줄을 쥔 채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머니.”
비키르 역시도 아이옌이 찾는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천막 안,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박제되어 있는 의자가 있었고 그곳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 하나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것이 보인다.
싸늘한 인상, 전신을 난자하고 있는 상처 자국.
그녀는 독수리 깃털로 만든 망토와 하의를 입었고 등 뒤의 옥좌에는 길고 커다란 활을 뉘여 놓고 있었다.
특히나 한쪽 눈에 나 있는 커다란 흉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현 발락을 이끌고 있는 여족장 ‘아퀼라’.
아이옌의 손길에 이끌려 그녀의 앞에 선 비키르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비키르는 눈앞에서 무거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이 여족장의 이명이 ‘밤의 여우’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천하의 검성 휴고의 콧잔등에 흉터를 새겨 놓은 여자.
마도성 아돌프 역시도 이 여자에게 패해 한동안 의무대 신세를 지지 않았던가?
바스커빌과 모르그들이 적과 흑 산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존재 때문이 컸다.
뭐니뭐니해도 단신으로 그래듀에이터 급 칼잡이를 16명, 4클래스 마법사를 10명, 5클래스 마법사를 6명씩이나 죽였던 인물이니까.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또한 적과 흑 산의 마물 케르베로스의 옆구리에 화살촉 자국을 만들어 놓은 것도 이 여자일 가능성이 짙었다.
‘회귀하기 전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전성기 때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 여자와 맞상대할 수 있었을까.
‘정면대결로는 0%, 암살로도 0%, 도망간다면…… 20% 정도였으려나.’
물론 그 20%란 생존 확률을 말하는 것이다.
비키르는 눈앞에 있는 여자의 전투력을 가늠하다 말아 버렸다.
어차피 상대는 휴고나 아돌프 급의 인물, 지금으로서는 아예 상대가 불가능한 상위 포식자였으니까.
한편, 아퀼라는 눈앞에 있는 비키르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딸아. 네가 매번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댔던 제국인 수컷이 이 아이냐?”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많이 말했다고…… 아무튼 맞습니다.”
“흠. 아직 어려 보이는데? 너보다도.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야.”
아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키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상위 포식자가 아래에 있는 보잘것없는 먹잇감을 훑어보는 듯했다.
비키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시선을 최대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아퀼라는 비키르에게서 휴고의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휴고는 선이 굵고 턱이 직각이며 남자답게 생긴 인상이지만 비키르는 어머니 쪽의 외모를 더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퀼라는 비키르의 몸 상태를 꽤나 정확히 간파한 것 같았다.
“그래. 폐인이나 다름없는 것을 주워다가 뭣에 쓰려느냐?”
“잘 치료하면 쓸 만할 겁니다. 마담 여덟다리한테도 덤벼들었던 녀석이니까.”
“흐음. 그러냐? 하지만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은 오히려 발목만 잡을 뿐이지.”
아퀼라는 말을 이었다.
“하긴. 어차피 몸이야 망가져 있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지. 씨앗만 멀쩡하면 그만인…….”
“앗! 어머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은 노예로 쓰려고 합니다!”
“뭐?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꾸준히 말해 왔던 목적과는 다르지 않…….”
“워, 원래 그런 목적이었습니다! 노예! 사냥 보조용 노예가 하나 필요해서!”
아이옌은 다급하게 손을 휘저어 아퀼라의 말을 막았다.
아퀼라는 그런 딸의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라. 노예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든 간에 그것은 주인인 네 자유니까.”
아이옌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비키르의 목줄을 잡아끌었다.
이윽고, 천막 바깥으로 나온 아이옌의 표정은 전과 달리 상당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까 엄마 앞에서 당황해 허둥거리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이제부터 네게 임무를 하달하겠다.”
아이옌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비키르를 내려다보며 고압적으로 말을 이었다.
“꽤나 힘들 거야.”
……아무래도 상당히 고된 임무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