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야만부족의 노예 (3)
발락의 최연소 사냥조장 아이옌.
발락의 젊은 층들을 이끌고 다니며 밀림 전역을 무서울 것 없이 활개 치던 그녀.
그런 아이옌도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적수를 하나 만났다.
그 이름은 바로 비키르, 얼마 전에 제국의 영토를 습격해 손수 잡아온 노예 되시겠다.
“…….”
아이옌은 멍한 표정으로 비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키르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불편한 몸으로도 빠르게 움직이며 자기가 거주할 천막을 짓고 있었다.
척척척척척……
2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의 나무들 열 서너 개가 일사분란하게 늘어졌고 그 옆으로 진흑과 돌가루, 석회가루, 물이 섞인 반죽들이 착착 발라진다.
건식과 습식이 섞여 있는 건축 구조, 벽에는 나뭇잎들이 덧발렸고 그 위에 다시 짐승 가죽이 덮였다.
천막에는 금세 문과 창문이 달렸고 바닥에는 톱밥과 낙엽 바닥재가 깔렸다.
노예에게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건축 재료들로도 충분했다.
30분도 되지 않아서 비키르가 혼자 들어가 잘 수 있는 천막이 완성되었다.
“명령을 완수했다.”
비키르는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아이옌을 돌아보았다.
아이옌이 비키르에게 내린 첫 명령은 바로 ‘자기 집을 만들 것’이었다.
아이옌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비키르의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천장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비가 오면 닫을 수 있게끔 덮개도 있었다.
안쪽의 바닥에는 작은 화덕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연기를 빼낼 수 있는 굴이 천막 바닥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뻗어 있었다.
식사를 위해 불을 떼면 연기가 바닥 밑으로 지나가 천막의 바닥까지 달궈지는 구조였다.
연기는 빼내고 잔불로 인한 열기는 가두고, 거기에 통풍과 채광도 완벽했다.
아이옌은 어이가 없어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천막을 잘 짓지?”
비키르가 아픈 몸으로 낑낑거리는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그녀이다.
아이옌은 비키르가 고전을 할 때 은근슬쩍 내주며 생색을 내려고 했던 건축재료들을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
튼튼한 나무막대나 벽돌을 구울 때 쓸 기름 등을 말이다.
하지만 비키르는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석회질의 흙을 찾아내 퍼왔고 물을 개어 굳히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비나 바람에 대비해 커다란 낙엽들로 가림막도 세웠다.
‘……간만이군.’
멸망의 시대를 거쳐 온 칼잡이들은 칼만 잘 써서는 안 됐다.
뜨겁고 추운 극지에서도 야영을 하며 생존할 수 있게끔 온갖 생존술에 통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비키르는 어지간한 가사노동들 역시도 통달해 있었다.
비키르는 집을 축조한 뒤 아이옌의 천막 근처에 쌓여 있던 가죽들을 손질했고 찢어진 옷감들을 기워놓았다.
천막 근처에 배수로도 정비했고 오늘 쓸 장작도 약간이지만 패 놓았다.
척척척척척……
주인이 뭘 시키기 전에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여 귀찮은 잡일들을 전부 처리해 버리는.
말 그대로 A급 노예.
“족장의 천막 밑 벽돌들이 불안정해 보이는군.”
“……어어? 어머니의 집이?”
“그렇다. 저 상태라면 훗날 우기가 닥쳤을 때 천막 중앙기둥의 지반이 흔들려 물이 샐 수 있다. 명령을 내린다면 저 아래 석회질의 흙과 건너편 언덕의 돌가루를 섞은 뒤 벽돌을 만들고 기름을 발라 구워서 보강하겠다.”
“……그, 그렇게 해라.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옌은 머리를 긁적였다.
비키르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절뚝이는 다리로 움직여 뒷산의 흰 흙을 퍼왔고 건너편 언덕의 돌들을 날라 와 깨고 부숴 흙에 섞었다.
그 뒤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뒤 그것을 직사각면체로 만들어 불에 구웠고 다 구워진 벽돌에 하이에나 기름을 발라 말렸다.
그렇게 만든 각벽돌들로 천막의 밑동을 괴자 천막은 한층 더 튼튼해졌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부산이냐고 짜증을 부리던 아퀼라도 막상 보수작업이 끝나자 꽤나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이제 천장에서 물이 새지는 않겠군. 천장에 잎사귀나 가죽을 아무리 덮어도 자꾸 물이 새서 짜증났었는데, 주춧대가 문제였었던가.”
아퀼라는 여전히 비키르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늘 이렇게 족장의 막사 주위를 돌며 자질구레한 것들을 관찰, 정비, 보수하라는 명을 내렸을 뿐이다.
아이옌은 자기 소유의 노예가 족장 막사를 정비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딱히 항명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키르가 아퀼라의 막사 주변에 배수로를 파고 그 위에 나뭇잎이나 토사가 쌓이지 않게 거름망을 설치하는 동안 뒤에서 계속 칭얼거릴 뿐이다.
“이봐. 혼자만 일하는데 괜찮나?”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한다거나 해서.
“그럼 혼자 하지, 떼로 하나?”
라고 반문하면 으레 그 뒤로 몇 번의 영문 모를 말들이 이어진다.
“흠흠, 일이 재미있나? 아까부터 일만 하는군.”
“우기나 되어야 하지 벌써 배수로를 까나.”
“느 집엔 이거 없지? 먹고 해라.”
“……주인님이 말 거는데 대답 좀 하지?”
비키르는 일하는 데에 방해된다고 판단, 아까부터 꾸준히 무시하고 있었지만 아이옌은 잠시 사라졌다가도 다시 슬쩍 나타나면서 계속 그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 모를 일이었다.
…퍽! …퍽! …퍽! 찰팍!
비키르는 잿물과 방망이로 빨래까지 싹 다 마쳐 놓았다.
야전에서 막내로 구를 때부터 노련한 고참이 될 때까지 패스파인더, 약초꾼, 치료사, 요리사, 암살자, 청소, 빨래, 요리 등등 안 해본 게 없었던 경험이 여기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멸망의 시대 핑계를 자꾸 대는 것 같지만…… 그만큼이나 치열했던 시대였으니.’
빨래를 하며 옛날 생각이 나는지 잠시 우수에 젖는 비키르였다.
“……크흠. 흠, 흠.”
그 옆에서는 시범을 보여 준다며 나섰던 아이옌이 찢어먹은 가죽치마를 슬며시 뒤로 숨기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 * *
……한편.
멸망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경험으로 인해 뭐든지 혼자 척척 잘하는 비키르.
바스커빌가나 언더독 시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훨씬 더 널널해진 노예의 하루 일과에 나름 만족하고 있는 그조차도 당황스러울 만한 상대가 하나 있었다.
“어, 시원하다.”
그 이름은 바로 아이옌, 야만부족 발락의 공주님 되시겠다.
그녀는 방금 전에 비키르가 파 놓은 배수로 위에 걸터앉아 소변을 보고 있었다.
“오래 참았더니 많이도 나오는군.”
“…….”
“어허, 주인님 오줌 누는 것을 그렇게 빤히 보게 되어 있나?”
아이옌은 비키르가 일하는 옆에서 대놓고 다리를 벌리고 소변을 보았다.
비키르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영역 표시. 여기는 내 노예의 집이니 내 집이기도 하니까.”
“……가리지도 않나?”
“배설을 하는 게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리지? 우리 부족에서는 그런 거 없다.”
오히려 보라는 듯 대놓고 치마를 더 들어 올리는 아이옌이다.
비키르는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야만부족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본 적이 있었다.
『적과 흑 산의 야만부족들은 부족원들끼리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진다. 관계 전에 상대방이 생식 능력이 있는지, 성병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남녀 모두 서로의 성기를 노출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
‘……라고 했던가.’
실제로 있는 풍습이었고 나름의 이유가 있는 문화였기에 비키르는 편견을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적어도 집 주변에서는 싸지 마라.”
“왜? 몇 백 년 전만 해도 너희 제국인들은 창문 밖으로 배설물을 그냥 버렸지 않은가. 길거리마다 오물이 쌓여 있어서 하이힐이라는 것을 신고 다녔다면서? 향수라는 것도 뿌리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비키르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도중 잡일들이 모두 끝났다.
발락은 전쟁이나 사냥을 하지 않을 시에는 매우 여유로운 분위기였고 언제나 부지런한 비키르로서는 이곳에서의 노예 생활이 바스커빌가나 언더독 시에서 훈련과 업무를 병행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옌은 그런 비키르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
“어서 빨리 정식으로 우리 부족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나?”
이건 또 뭔 소리인가?
비키르가 미간을 찌푸리자 아이옌이 이쪽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어 치마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비키르는 시선을 위로 고정했다.
아이옌이 말했다.
“노예 일만 하기는 힘들지?”
“나쁘지 않다.”
“말하는 교육은 잘 되었군. 하긴 노예의 입장인지라 감히 불평을 하기는 힘들겠지.”
“……아니, 진짜로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을 리가. 이렇게 고되고 잡스러운 일만 하는데 말이야.”
아이옌은 청소나 빨래 따위의 일을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와라.”
“……?”
“내가 널 도와주겠다. 이 부족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야.”
이미 노예가 된 마당에 거부권은 없다.
아이옌은 비키르의 목에 여전히 채워져 있는 목줄을 한번 툭 건드렸다.
“잘만 하면 이것도 벗겨 주지.”
이 제안은 조금 끌린다.
안 그래도 목덜미에 까끌거리는 이 올가미가 거슬린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뭘 하면 되나?”
비키르가 묻자 아이옌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사냥.”
“……사냥?”
“큰 놈.”
보아하니 사냥을 나가서 커다란 사냥감을 잡으면 되는 모양이다.
하기야, 발락은 주로 사냥을 통해 식량을 축적하는 부족.
근 300명 가까이 되는 인원에게 골고루 식량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200킬로그램이 넘는 멧돼지를 하루에 한 마리씩 소비해야 한다.
그것도 버섯이나 나무열매, 식용 뿌리 등등의 보조 식량들이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최근 들어 부족 내의 전사들이 쓸 만한 사냥감을 얼마 잡지 못해 며칠째 버섯이나 나무열매만 먹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이럴 때 커다란 고깃덩이를 가져올 수 있다면 네 면천(免賤)도 꿈은 아니지.”
아이옌의 말에 비키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야만인에게서 면천이라는 말을 듣다니, 상황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꽤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너는 나를 보조하기만 하면 된다. 보아하니 거동하거나 가벼운 짐을 옮기는 것에는 그닥 문제가 없어 보이던데.”
아이옌은 눈에 이채를 띤 채 말했다.
그녀의 의도가 정말로 큰 사냥감을 잡고자 하는 것인지, 단지 그뿐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았다. 가지.”
하지만 비키르는 일단 아이옌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노예의 입장인지라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으니 말이다.
비키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옌이 바로 말을 이었다.
“오늘 새벽에 출발할 거다.”
“알겠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웃나?”
“응? 내가 언제 웃었다고.”
아이옌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다가 비키르의 말을 듣고는 정색을 한다.
……어딘가 약간은 수상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