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74
74화 붉은 죽음 (3)
비바람 몰아치는 밀림.
벽면의 천막들이 요란하게 펄럭거린다.
막사 안에는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빛이 옅게 붉히고 있는 침상 위에는 뜨거운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휼.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소녀가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피부에 나 있는 옅은 반점, 붉은 죽음! 그것이 소녀의 몸을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다.
아휼의 오빠 아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비키르에게 매달렸다.
“부탁한다 비키르! 제발 내 동생을 살려 줘!”
“…….”
비키르는 입을 다문 채 아휼에게 다가갔다.
피부에 난 붉은 반점, 조절하지 못하는 대소변, 치솟아 오르는 체온, 관절 부위의 통증, 목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의 붓기.
이 모든 것들이 붉은 죽음의 징조다.
“왜 이렇게 되었지?”
“토목공사에 쓸 나무를 베러 늪지대에 갔다가 그만…….”
대답은 아훈이 대신 했다.
아휼은 아마도 나무를 하러 습지 깊숙이 들어갔다가 전염된 모양이다.
“어쩌지 노예?”
아이옌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병에 걸려 버린 이상 비키르라 해도 어찌할 도리는 없다.
예방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치료는 전문가의 영역이니까.
그때.
펄럭-
막사의 문이 열렸다.
불쑥 들어온 이는 바로 주술사 아흐헤만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휼과 아훈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꼴좋다 이놈들! 할애비의 말도 안 듣고 돌아다니더니만!”
아흐헤만은 신음하는 아휼의 얼굴 위로 침을 튀기며 소리 질렀다.
“저 제국 스파이 놈의 말에 선동당했으니 이런 꼴이 되어도 싸다! 다 제가 행한 대로 돌아오는 법이야!”
“할아버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아훈이 벌떡 일어나 아흐헤만에게 반발했다.
짝-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귀싸대기뿐이었다.
아훈은 붉게 물든 뺨을 감싼 채 주저앉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아흐헤만은 바닥에 쓰러진 아훈을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제 애미애비와 다를 게 하나 없구나. 쓸모없는 놈.”
“…….”
이윽고, 아훈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옌이 ‘또 시작이네’ 싶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치료법이라면 있다.”
비키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아흐헤만은 콧방귀를 뀌었고 아훈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흐헤만은 비키르의 가슴팍을 퍽 밀친 채 막사를 나갔다.
“네깟 놈의 장난질에 또 속을 성싶으냐? 이것은 신의 저주이니 제사를 드려 치성을 올리는 것만이 답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족장님도 허락하시겠지.”
끝까지 주술사의 권위를 내세우며 말이다.
휘이이이잉-
아흐헤만이 활짝 열어젖히고 나간 입구로 바람과 빗방울이 들어와 모든 이들의 몸을 적신다.
막사에 남겨진 이들은 아이옌과 비키르, 아훈, 그리고 아픈 아휼이었다.
비키르는 아훈에게 말했다.
“우선 아휼의 대소변은 네가 직접 받아라. 네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하고. 또한 사용한 집기들은 끓는 물로 소독해. 그리고 화톳불에 쑥을 태워서 집 주변에 있는 모기나 벼룩, 박쥐 등을 모조리 쫓아내라.”
“아, 알겠어.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러기만 해서는 안 되지.”
비키르는 고개를 돌려 아이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원래 요구할 예정이었던 것을 조금 더 앞당겨 말했다.
“나를 수해 밖으로 내보내 다오.”
그 말에 아이옌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래 외지에서 들어와 발락의 일원이 된 자들에게는 따로 차별이 없다.
그들은 밀림 속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으며 마을 내부에서는 족장의 막사와 주술사의 제전을 제외한다면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
수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만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외지 출신의 발락인이 수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만족했을 때여야만 가능하다.
첫 번째.
마을 안에서 2년 이상을 살았을 것.
두 번째.
토착 발락인과 관계를 가져 아이 셋 이상을 출산했을 것.
비키르는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도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키르는 수해 바깥으로 내보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내보내 준다면 전염병 치료제를 구해 오겠다.”
비키르의 말을 들은 아이옌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예외를 자신의 어머니이자 족장인 아퀼라가 허락할 것인가? 아마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퀼라는 상당한 원칙주의자였으니까.
‘아마 아휼을 버릴 가능성이 크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하지만 아이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늘 귀여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빨래와 청소를 도맡아 하던 아휼이 구토와 설사에 뒤범벅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이옌을 갈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비키르가 과연 돌아올 것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노예로 잡혀 온 이방인이다.
비키르에게 자유를 주어 수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준다면 과연 그는 돌아올 것인가.
지금까지 비키르가 혼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락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만약 비키르가 도망가고자 했다면 그날 저녁 인원이 비는 것을 확인한 발락의 수색대와 늑대들이 그를 찾아내 단죄를 가하겠지.
비키르가 그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출권을 얻어서 수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그가 평생 돌아오지 않을 도망길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시점에는 이미 영영 잡을 수 없게 된 후일 테니까.
“…….”
아이옌은 망설였다.
망설인다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 짧은 순간, 아이옌은 자신을 망설이게 하는 심적 요인들에 대해서 깊게 생각했고 이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조차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새삼 발견하는 과정.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은 이미 화톳불의 색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불과 달리 물기로 촉촉하다는 것이다.
“……가.”
주인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 * *
아이옌은 아퀼라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아이옌이 짊어졌다.
비키르는 등에 포메리안을 업은 채 밤의 수해를 내달렸다.
‘어차피 치수 공사로는 이 전염병을 완전히 막을 수 없지.’
더군다나 치수 공사를 하지 않은 다른 부족들은 어찌할 것인가?
붉은 죽음의 창궐을 막아 제국의 부흥, 나아가 바스커빌가를 저지하려면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타닥!
비키르는 물 위로 떠내려가는 통나무들을 밟으며 단번에 강을 건넜다.
홍수가 나 떠내려 오는 것들이 많다 보니까 오히려 강 위를 달릴 수 있어 이동거리가 짧아졌다.
바로 그때.
비키르는 강둑을 딛은 발을 우뚝 멈췄다.
쏴아아아아……
비가 쏟아지는 밤. 물빛에 번진 그림자 하나가 뒤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비키르가 돌아본 곳에는 온몸이 홀딱 젖은 아이옌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왜 따라오나?”
비키르가 묻자 아이옌은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내 노예 따라가는 게 뭐.”
“따라오지 마라.”
“싫어.”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주인님이잖아!”
아이옌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비키르는 차가운 눈빛을 뿌리며 한 번 더 선을 그을 뿐이다.
“세 번이나 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야. 너도 알지?”
“…….”
“따라오지 말라면 따라오지 마.”
비키르의 눈빛을 본 아이옌은 충격을 받았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떻게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볼 수 있지?”
울먹이는 듯한 물음이 들려온다.
비키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옌은 무언가를 힘겹게 우물거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 중에 선별하고 또 선별한 것만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디 가는데?”
“…….”
“어디 가는지라도 말해 주고 가 그럼.”
“안 돼.”
“포메리안은 왜 데려가?”
“…….”
“……애라도 맡기고 가면 안 돼?”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 모를 광경.
……아니 아이옌, 그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맨 처음에 노예 상인들의 철창 속에 갇혀 있을 때, 그의 말간 얼굴을 무대 위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평생을 그에게 밑지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걸.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아이옌.
그녀는 오들오들 떨리는 몸,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거 하나만은 대답해 줘.”
“……뭔가?”
비키르가 묻자 아이옌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쉰 끝에 말을 이었다.
“돌아올 거지?”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불안과 초조함, 먹먹함이 매달려 있는 어조.
그리고 이번만큼은 비키르 역시도 재깍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이옌의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안도의 숨결을 하얗게 토해냈다.
“약속 지켜.”
“…….”
“꼭.”
비키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사냥개가 다시 새벽을 꿰뚫어 달린다.
먼동마저 삼켜 버린 먹구름 속 아득한 어둠.
그리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선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주인이 여기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