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일리아드(Illiad) (3)
아흐헤만은 당황하고 있었다.
제사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해독약을 풀어 모두를 치료한 뒤 발락의 영웅이 되겠다는 계획이 초장부터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했지만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발락의 전사들 대부분은 아흐헤만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
하지만 아흐헤만은 아직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붉은 죽음이 어떻게 치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술사의 제사가 효과가 없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야 하나?
딱히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돌아오는 반응들이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아흐헤만의 의문은 이어진 아퀼라의 말 한마디에 풀렸다.
“다 필요 없고. 자네의 허리춤에 있는 자루 속에 뭐가 들었는지 한번 보고 싶군.”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흐헤만은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뭘까? 족장이 왜 허리춤의 자루를 보자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이 타이밍에?
무언가 알고 있지 않다면 하기 힘든 말이다.
‘……설마 눈치 챈 건가?’
수해에 붉은 죽음을 퍼트린 장본인으로서는 당연히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아흐헤만을 향해 아퀼라가 재촉했다.
“뭐 하나? 당장 그 자루를 끌러 보이지 않고.”
족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일단 명령이 내려진 이상 항명은 없다.
하지만 이 늙은 주술사는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족장의 권위를 부정하고 말았다.
“이, 이것은 보여 줄 수 없소이다!”
너무 당황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아흐헤만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무거웠다.
아흐헤만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전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젊은 전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늙은 전사들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족장을 향한 전사들의 존경과 충성은 세대를 불문하고 깊은 것, 그러니 아흐헤만이 곱게 보일 턱이 없다.
“저 늙은이가 기어코? 내 이번 기회에 확……!”
발끈한 아이옌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당장 그 자루를 여시오!”
그녀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아훈. 아흐헤만의 손자인 그가 제일 앞장 서 아흐헤만의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인 것이다.
아이옌이 의외의 광경에 멈칫하는 동안 아훈은 아흐헤만을 향해 강하게 말했다.
“족장님의 말에 거역은 있을 수 없소. 당장 그 자루를 열지 않으면…….”
아훈은 허리춤의 화살을 빼 화살에 장전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흐헤만의 굵은 눈썹이 확 꺾여 올라갔다.
“이 패륜아 놈!”
“…….”
하지만 아훈의 두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여동생 아휼이 붉은 죽음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동안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
이내 수많은 전사들이 아흐헤만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당장 자루를 내놔!”
“안에 뭐가 있는지 보여 줘라!”
“이 역적! 네놈이 범인이지!?”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본 아흐헤만의 표정이 점점 더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오냐. 봐라!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흐헤만은 허리춤의 자루를 확 끌렀다.
그러더니 그것을 대뜸 옆에 흐르고 있는 강물을 향해 패대기쳤다.
수많은 전사들이 순간 멈칫한다.
기묘한 침묵.
아흐헤만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아퀼라를 돌아보았다.
“이런! 이 늙은이가 수전증이 있어서 그만 자루를 강물에 빠트렸……?”
태연하게 변명을 하던 그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낌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사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한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비키르가 있었다.
아퀼라가 그런 비키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과연. 네 말대로 되었다. 정말로 자루를 강물에 버리는군.”
“……뭐라?”
아흐헤만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다.
바로 그때.
“족장님! 찾았습니다!”
갑자기 강물의 수면 위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든다.
애초에 물속에서 잠복하고 있던 발락의 한 전사가 아흐헤만이 팽개친 가죽자루를 잽싸게 건져 올렸다.
자루는 비록 물을 머금기는 했지만 내용물은 절반가량이나마 남아 있었다.
“헉!? 안 돼!”
아흐헤만은 깜짝 놀라 움직였지만 이미 물 젖은 자루는 아퀼라의 손으로 전해졌다.
“…….”
아퀼라는 자루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에 반쯤 풀어지다 만 하얀 가루들이 가득하다.
아퀼라는 아흐헤만에게 물었다.
“이건 붉은 죽음의 해독약이지.”
“…….”
“왜 이게 자네의 손에서 나오지?”
아퀼라의 말에 아흐헤만은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퀼라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 말이 또 맞았구나.”
이번에도 비키르를 돌아보며 하는 말이었다.
아흐헤만이 고개를 갸웃하자 아퀼라는 흰 가루들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이 가루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냥 밀가루이다.”
“뭣!?”
“네가 이것을 해독약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라더니. 놀라는 것을 보니 과연 그 말이 맞구나.”
자신이 들고 있던 가루가 그냥 밀가루라는 사실을 들은 아흐헤만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저게 해독약…….”
“너는 리바이어던 가에게 속은 것이다.”
비키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리바이어던 가는 바보 같은 원주민 스파이를 통해 해독약 없는 역병을 퍼트린 것이다.
그의 권력욕과 야심을 꿰뚫어 보고서.
비키르가 사전에 했던 모든 말들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자 전사들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아흐헤만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저놈 말대로 이건 그냥 밀가루라고!”
“그럼 아까 전에 자루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왜 주저했지? 그리고 붉은 죽음이 처음으로 시작된 이곳 수원지에는 왜 온 것이냐?”
“닥쳐라! 그걸 내가 왜 너에게 말해야 하나!”
비키르가 조목조목 따져 묻자 아흐헤만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발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조금도 유리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키르가 더욱 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비키르의 품에서 나온 것은 두 장의 편지였다.
그곳에는 두 개의 필적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지독한 악필이어서 알아보기 힘들었고 다른 하나는 꽤나 정갈한 서체였다.
비키르는 입을 열어 말했다.
“이것은 리바이어던 가문과 네가 내통하며 주고받던 편지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두 편지 중 하나는 분명 아흐헤만의 필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전사들의 시선이 편지와 아흐헤만을 번갈아 향했다.
아흐헤만은 억울함에 방방 뛰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나는 저런 편지 쓴 적 없어!”
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몇몇 늙은 장로들이 편지에 적힌 것이 아흐헤만의 글씨체가 맞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 진짜다! 나는 결백하다! 저놈이 모함하는 거야!”
아흐헤만은 비키르를 가리키며 팔딱팔딱 뛰었다.
하지만 삿대질의 대상이 되는 비키르는 그저 속으로 조용히 웃을 뿐이다.
왜냐? 모함이 맞기 때문이다.
‘치와와 사무장 덕을 여기서 보다니.’
비키르는 2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치와와 사무장은 글씨를 참 잘 쓰는군.’
‘아무렴요. 저는 태어난 이래 저보다 글씨체를 잘 다루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죠. 매번 집정관님들이 서명을 대신 시키시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필체를 흉내 내는 것에도 도가 텄는데…….’
‘나도 배워 볼 수는 없겠나?’
‘아무렴요! 당연히 가르쳐 드릴 수 있습죠! 영광입니다!’
‘고맙네. 그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부탁하지.’
언더독 시의 부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에게 부지런히 필적 위조 기술을 배운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선동을 할 때 정말 유용한 기술이었다.
‘원래 선동은 쉽고 해명은 어려운 법이지.’
비키르는 진짜로 억울해서 펄펄 뛰는 아흐헤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편, 아퀼라가 말했다.
“리바이어던 가문에 이런 필체를 가진 자가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제국의 7대 가문 중 하나를 무슨 수로 조사하겠는가.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락 내부의 분위기는 아흐헤만을 성토하는 쪽으로 흘렀다.
“반역자!”
“너 때문에 내 아내가 죽을 뻔했어!”
“내 자식들도!”
“죽여라! 매달아 버리자!”
여론이 몹시 나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심지어 손자인 아훈마저도 경말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지금 아흐헤만의 편은 이곳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흐헤만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증거는 없다.
자루 속의 흰 가루가 그냥 밀가루인 것으로 밝혀진 지금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기만 한다면 자신을 처형할 명분은 없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버티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만. 모두들, 반응이 지나치다.”
족장 아퀼라가 입을 열기 전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다.
모든 전사들이 고개를 돌려 아퀼라를 쳐다보았다. 아흐헤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퀼라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증거도 없는 일이다. 모두들 더 이상 이 일로 주술사의 명예를 해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부족을 위해 헌신해 온 공신이지 않은가.”
그러자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옌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어머님! 아니 족장님! 그럼 지금 이 사태를 그냥 덮고 넘어가시겠다는……!?”
“그만! 주술사의 권위를 존중해라! 그는 나이도 연륜도, 부족을 위해 헌신했던 시간도 너보다 훨씬 더 많다! 예의를 지키도록!”
아퀼라의 강경한 말에 아이옌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많은 전사들이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족장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다들 말이 없다.
정작 변호의 대상이 된 아흐헤만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그토록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족장이 웬일로 편을 들어주는가?
하지만 일단 빠져나갈 구멍은 이것뿐이기에 그는 그저 아퀼라를 향해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족장의 하해와 같은 아량과 지혜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별일 아닐세. 조상들이 물려 주신 전통을 존중한다면 당연한 일이지.”
아흐헤만은 짐짓 감동한 양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아퀼라의 눈이 한 번 더 깊게 빛났다.
“어떻게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자네의 높은 명예에 흠집을 내도록 둘 수 있겠는가?”
“예에, 감사드립니다 족장님.”
“감사할 것도 없네. 자네는 우리 부족뿐만이 아니라 수해 전체에 그 명성이 드높은 존재가 아니던가.”
“예에. 뭐…….”
“당연히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명예와 긍지가 아주 무겁겠지. 암.”
“예……?”
“그러니 오늘, 증거도 없는 일로 모함을 당했으니 자네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주 클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 그 지고한 자존심에 해가 가게 생겼으니.”
“……?”
아흐헤만은 너무 두껍게 덧발리는 금칠에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아퀼라는 아흐헤만을 향해 외쳤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내 친구이자 소중한 동료! 이곳에 모인 모든 젊은이들의 영적 스승 아흐헤만에게 자신의 결백을! 자신의 명예를! 자신의 자존심을 수호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불만 있는 이들 있나!”
“없습니다아-!”
아퀼라의 의도를 짐작한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외친다.
그리고 미리 모든 이야기를 들은 비키르가 담담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
아흐헤만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비키르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당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다는 표정.
이윽고, 그런 아흐헤만에게 아퀼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길을 열어 주지. 자네가 정말 결백하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쌓아올린 지고한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게. 설마 이렇게까지 자리를 마련해 주는데 빼지는 않겠지?”
“……기회라 하심은?”
조심스럽게 묻는 아흐헤만의 두 눈에서는 불안함이 번들거린다.
이윽고, 아퀼라가 말했다.
“일리아드(Illiad)를 명령한다.”
‘일리아드’란 서로 간에 의견 충돌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무력을 사용해서 승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판을 짓는 발락만의 독특한 해결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흐헤만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간다.
반면 비키르는 조용히 웃었다.
증거고 증명이고 간에 사실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모든 것은 이번 판을 위해 깔아 놓은 포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