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일리아드(Illiad) (4)
“이, 일리아드를?”
아흐헤만의 표정이 굳었다.
‘일리아드(Illiad)’란 전사와 전사 간의 대결. 양측 다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최후의 생사결을 뜻한다.
족장 아퀼라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아흐헤만에게 물었다.
“발락의 위대한 주술사 아흐헤만이여. 그대는 높은 긍지와 빛나는 명예를 가지고 유구한 전통을 수호해 온 존재, 내가 전에 말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 긍지와 명예, 전통이 이대로 훼손되어서 되겠는가?”
그 말에 아흐헤만은 이를 뿌득 갈 수밖에 없었다.
늘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족장이 웬일로 자신을 띄워 주나 했다.
결국 일리아드를 거부할 수 없게끔 판을 깔아 놓기 위한 밑작업이었던 셈.
노련한 족장 아퀼라는 이번 기회에 족장의 권력을 호시탐탐 넘보는 주술사 권력을 제거해 버릴 심산인가 보다.
그동안 딸인 아이옌을 이용해 젊은 층들을 선동하여 미신과 구습을 타파하자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술사 권력을 견제해 오던 정치가다운 수였다.
손자인 아훈 역시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부님. 조부님께서는 늘 전통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일리아드는 우리 발락의 전통입니다.”
“그 주둥이 좀 닥치거라! 나도 알고 있으니!”
아흐헤만은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에는 비키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노예로 잡혀 온 전쟁포로가 순식간에 수해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아흐헤만이 평생을 염원하던 그 자리를 어디서 굴러먹다 온 외지인 놈이 불과 2년 만에 꿰어 찬 것이다.
아흐헤만은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비키르를 향한 분노가 유계의 불기둥처럼 뜨겁게 용솟음쳤다.
“좋다! 알겠다! 네놈에게 일리아드를 청한다!”
아흐헤만의 선포를 들은 비키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족장 아퀼라는 비키르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나?”
“하라고 하신다면 해내야지요.”
회귀 전과 후를 합쳐 바스커빌가의 사냥개로 살아온 세월만 50년이 넘는다.
누군가의 칼이 되어 휘둘러지는 것에는 익숙했다.
비키르의 대답을 들은 아퀼라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손아귀 안에 들어온 예리한 칼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좋아. 믿겠네 사위.”
“……?”
비키르는 순간 아퀼라에게 모르그 아돌프가 겹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젊고 늙음을 떠나 모든 전사들이 의기투합해 판을 벌렸다.
두 전사가 영혼의 단판승부를 벌이게 될 장소.
모든 전사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이를 구경한다.
아흐헤만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번 기회에 모든 찜찜함을 떨쳐 버리고 다시 내 자리를 되찾겠어.’
그는 이글거리는 두 눈을 들어 비키르를 노려보았다.
마치 눈앞의 저것만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온다는 양.
아흐헤만은 활화산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버럭 외쳤다.
“날짜는 사흘 뒤 만월이 뜨는 날의 밤! 장소는 이곳! 네놈에게 정식으로 일리아드를 신청한다!”
아흐헤만이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에 일순간 전사들이 깜짝 놀란다.
하지만 정작 그 살기의 대상이 되는 비키르는 너무나도 무덤덤했다.
그저.
“사흘은 무슨. 지금 바로 합시다.”
별일 아닌 잡무 하나를 후딱 해치우려는 듯한 태도였다.
비키르의 여유로운 태도에 또다시 전사들이 탄성을 지른다.
반면 아흐헤만은 식은땀 한 방울을 흘렸다.
사흘간 은밀하게 준비하려던 모든 밑작업들이 무효가 되었다.
비키르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아흐헤만이 잔머리를 굴릴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주술사라는 놈들이 대게 그렇지.’
답지 않은 기백을 내뿜어 은근슬쩍 일리아드 시간을 늦추려 한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비키르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노장(老將), 결코 아흐헤만의 심계에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멸망의 시대를 거쳐 온 무인이니만큼 권모술수를 꾸미는 것에 있어서는 늙은 주술사 아흐헤만보다도 월등했다.
“일리아드는 도전을 받는 이에게 날짜와 장소를 선택할 우선권이 있지. 전통적으로 말이야. 그렇지 않소?”
비키르의 말에 아흐헤만은 앓는 소리만 낼 뿐이다.
평소 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아흐헤만 본인인지라 이런 상황에서 전통을 들먹인다면 할 말이 없다.
자승자박(自繩自縛), 본인의 평소 언행이 본인을 옭아 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던 아이옌이 낄낄 웃었다.
“역시 아흐헤만의 적은 아흐헤만이로군.”
고소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아이옌은 이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믿음직한 동료, 친근한 벗인 늑대 바키라가 아이옌의 옆에 늠름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아이옌은 바키라의 푹신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 근처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마을로 가서 일리아드의 승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전하렴.”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비키르를 위한 피로연을 준비하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그런 것 하지 마라.”
비키르는 아이옌을 타박했다.
아이옌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비키르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설레발을 치면 꼭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단 말이야.”
너무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변수에 대비하기가 힘들다.
비키르는 저 멀리서 이를 뿌득뿌득 가는 아흐헤만을 바라보았다.
놈은 주술사이니만큼 전투에 있어서 의외성이 많다.
비키르는 멸망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수도 없이 많은 주술사와 흑마법사, 연금술사 등과 겨룰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 그때마다 꼭 한 번씩 의외의 반격을 당하곤 했었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항상 비키르였지만 놈들은 죽기 직전 감추어두었던 패가 하나씩은 꼭 있었고 비키르는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단 1%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냥개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그 사냥감이 늙은 너구리일 경우에야 두말할 것도 없다.
비키르는 회귀 전의 모든 정보들을 복기하며 앞으로 펼쳐질 돌발변수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비키르가 신중해진 것을 본 아이옌 역시 신중해졌다.
그녀는 비키르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고자 자기가 아는 아흐헤만의 모든 것들을 말해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도중, 비키르의 귀가 순간적으로 쫑긋 세워지는 구간이 있었다.
“잠깐. 방금 그 부분, 다시 이야기해 봐라.”
비키르가 관심을 보이자 아이옌은 신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어떤 부분을 말하는가? 아흐헤만의 속옷 색깔 취향? 빨래를 담당하는 아이의 제보에 의하면 그는 쫙 달라붙는 호피무늬 가죽을 주로…….”
“……그것 말고. 그 전에.”
“아, 그의 출생 배경 말인가?”
아이옌은 아퀼라에게 들었던 것을 그대로 비키르에게 속삭여 주었다.
현 시점에서는 아퀼라와 아이옌, 그리고 아흐헤만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 정보였다.
“아흐헤만은 발락의 토박이가 아니다. 그는 원래 다른 부족의 일원이었는데 어렸을 적 납치되어 왔지. 아마 비키르, 너와 비슷한 나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비키르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하도 전통이 어쩌구저쩌구 난리를 치기에 몇 대에 걸친 발락 토박이인 줄 알았는데, 사실 외지인 출신이었다니.
심지어 아이옌의 다음 말은 더욱 놀라웠다.
“그는 자기가 사위 사냥으로 잡혀 왔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사실 노예로 잡혀 온 것이었지. 남색을 즐기던 당시 주술사에게 말이야.”
십대의 나이에 노예로 잡혀 온 외지 출신이라 그런가, 아흐헤만은 비키르에게 자신을 투영해 보았던 것 같다.
……이른바, 동족혐오랄까?
그랬던 비키르가 모든 이상적인 루트를 착착 밟아 가며 만인에게 존경받는 영웅이 되었으니 아흐헤만의 배알이 더욱 더 꼴릴 법도 했다.
“아무튼. 아흐헤만은 성노예 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주술사를 죽이고 그의 주술을 빼앗았지.”
아이옌은 그 이후 아흐헤만이 발락의 사회에서 적응하기 위해 했던 피눈물 나는 노력들을 읊어주었다.
“육체적인 힘을 높게 치는 발락 사회에서 아흐헤만은 딱히 설 자리가 없었어. 그리고 자기를 키워 준 주술사를 죽였다는 점에서도 멸시받았지. 그래서 아흐헤만은 뭐든지 했어. 부족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야.”
사람이나 늑대들의 똥오줌을 치우는 일부터 시작해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들을 죄다 맡아서 했고 때로는 위험한 사냥감을 몰아오거나 미끼가 되는 일도 자처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전대 족장의 신발을 품에 끌어안고 체온으로 데우는 것은 예사였다.
그때 아직 어린아이였던 아퀼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네 발로 바닥을 기며 개 흉내를 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가 부족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을 때는 이미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였다.
노인이 되니 그동안 누리고 살지 못했던 젊은 날의 특권들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창 나이 대에 마음껏 발산하지 못하고 억눌려 있었던 혈기와 폭력성, 충동이 보상심리와 더불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족장 아퀼라의 귄위마저 넘봐 가며 발락을, 나아가 온 밀림을 집어삼키려 했었던 것이다.
수해 바깥, 제국 소속의 ‘리바이어던 가(家)’와 손까지 잡아 가면서!
한편, 비키르는 문득 의문 하나가 들었다.
“……그러면 아흐헤만은 원래 어느 부족 출신이었지?”
“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이옌의 대답에 비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한편, 아흐헤만은 아까부터 초조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키르가 일리아드를 위해 전장으로 들어오자 더욱 더 심해졌다.
비키르는 노련한 사냥개답게 천천히, 서서히, 발걸음으로부터 사냥감의 목줄을 조여 간다.
모든 변수들에 대비를 마친 뒤 전장으로 향하는 비키르.
하지만 일리아드가 벌어지기 전, 천하의 비키르조차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돌발변수 하나가 발생했다.
…탁!
뒤에서 발로 땅을 한번 가볍게 박차는 소리.
그리고 이내 누군가 비키르의 손목을 확 낚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비키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입술 하나가 비키르의 입술에 와 닿는다.
지난 2년 사이 머리 하나가 작아진 아이옌이 까치발을 든 채 비키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기고 돌아와라. 더 좋은 거 해 준다.”
그녀는 씩 웃으며 비키르의 가슴팍을 밀쳤다.
비키르는 무어라 말을 할까 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니까.
이윽고.
…차앙!
손목의 동맥을 뚫고 마검 바알제붑이 검붉은 이빨을 드러낸다.
철혈검가(鐵血劍家) 사냥개의 목줄이 풀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