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Iron-blood Sword Hound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일리아드(Illiad) (5)
적과 흑 산맥의 검수림(劍樹林)은 지독하다.
나무들의 잎사귀 한 장 한 장이 예리한 면도날처럼 되어 있고 가시투성이의 껍질부터 뿌리까지, 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그 지옥의 밀림 한가운데에서 두 남자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비키르와 아흐헤만.
이들은 허리에 칼 차고 등에 활 매고 서로 마주섰다.
수많은 관전자들이 둘의 주위로 넓은 원을 그린다.
비록 울창한 잎사귀와 넝쿨들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 좋고 귀 좋은 발락의 전사들은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비키르와 아흐헤만의 싸움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아흐헤만은 이를 갈았다.
“……네깟 놈이 암만 뛰어 봤자 2년차에 불과하지.”
비키르는 이곳 수해에 적응한 지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자신은 이곳 수해에서 거의 70년 가까이를 살았던 몸, 지형지물을 다루는 것에는 익숙했다.
어지간한 젊은 사냥꾼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평지가 아니라 밀림을 일리아드 장소로 삼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아흐헤만은 재빨리 밀림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무뿌리 넝쿨에 몸을 숨기고 은엄폐를 한 뒤 활에 화살을 메겼다.
“호오. 마침 좋은 게 있군.”
아흐헤만은 몸을 숙인 넝쿨뿌리 밑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것은 붉은색 몸에 검은색 다리를 가지고 있는 큰 지네였다.
아흐헤만은 화살을 꺼내 지네의 머리통에 푹 꽂았다.
지네의 머리통이 깨지며 지독한 독이 깃든 뇌수가 화살촉에 묻는다.
아흐헤만은 그 외에도 반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잘 끊어지지 않고 절삭력도 강한 넝쿨들을 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상대방이 뛰어오다가 넝쿨에 걸리면 자빠질 것이 분명하고 운이 좋으면 아예 발목을 절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지반이 약해서 밟으면 푹 빠질 수밖에 없는 진흙 구덩이 위에 마른 모래와 낙엽을 솔솔 뿌려 덮어 놓았고 사나운 벌들이 모여 잠을 자고 있는 벌집 몇 개를 언제든 떨어트려 벌들을 깨울 수 있게 준비도 마쳐 놓았다.
“어디 오기만 해 봐라.”
아흐헤만은 울창한 잎사귀들 사이로 비키르의 모습이 드러나길 기다리며 손에 든 독화살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누굴 기다리나?”
아흐헤만의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닿아 얼어붙는다.
철렁- 하고 몸속에 파장이 일었다.
아흐헤만이 떨어지려는 심장을 간신히 붙잡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뒤로 바짝 다가와 있는 비키르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인다.
“어, 어떻게!?”
소리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하지만 아흐헤만은 의문을 끝까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전에 비키르가 손에 든 송곳을 옆으로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핏-
비키르는 아흐헤만이 설치해 둔 발목절단용 넝쿨들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아흐헤만은 그것을 피해 뒤로 허둥지둥 물러나다가 자기가 감춰둔 진흙 웅덩이를 밟고 허리까지 풍덩 빠져 버렸고 심지어 그 와중에 벌집도 몇 개 떨어트려 버렸다.
웨에에에에엥-
집을 잃은 말벌들이 진흙구덩이 속의 아흐헤만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비키르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고 아흐헤만은 진흙탕 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며 벌들을 쫓아내려 애썼다.
이윽고, 아흐헤만은 진흙구덩이 속에 한참을 잠수하는 것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이미 몸에는 벌침들이 잔뜩 박혀 퉁퉁 부어 있었다.
한편. 아흐헤만이 막 진흙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비키르는 나무줄기 위로 올라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놈이!?”
아흐헤만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진흙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지네 독이 다 씻겨 나갔지만 화살촉의 뾰족함만큼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펑-
활시위에 묻은 진흙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강력한 화살 한 대가 수직으로 솟구쳐 비키르를 노렸다.
하지만.
쩍-
검붉은 참격 하나가 날아 아흐헤만의 화살을 세로로 쪼개 버렸다.
그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비키르는 유령처럼 사라져 아흐헤만의 뒤로 내려앉았다.
아흐헤만은 두 눈이 찢어져 피가 흐를 정도로 크게 치떴다.
비키르의 속도도 속도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다면.
‘소리가 안 나잖아!?’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비키르는 눈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발로 풀을 밟는 소리, 진흙탕을 첨벙이는 소리,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는 소리, 돌이나 통나무 위를 박차는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들린다고 해도 너무 미약해서 주변에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에 가려질 정도였다.
“무, 무슨 술수를 쓴 것이냐 이놈!”
아흐헤만은 연거푸 화살을 발사했지만 그것은 나무 위를 지나가고 있던 애먼 오랑우탄 몇 마리를 맞추어 떨어트렸을 뿐이다.
이윽고, 비키르가 꺼내든 마검 바알제붑이 검붉은 아우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꿀처럼 끈적하고 혈액처럼 비린 액체 아우라가 그래듀에이터 상급의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발락의 노련한 베테랑 전사들도 발현하기 쉽지 않은 수준의 아우라에 아흐헤만은 기겁했다.
‘이 꼬맹이가 이렇게 강했었나!?’
나이와 전혀 매치되지 않는 가공할 전투력이다.
아흐헤만은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사냥개의 여섯 이빨은 한번 문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바스커빌 제 육식.
여섯 개의 매복치가 도사리다 못해 튀어나와 아흐헤만의 전신을 갈기갈기 난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칼날의 이빨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서는 어김없이 뜨거운 작열통이 찾아왔다.
부글부글부글…… 쿠르륵!
오로지 비키르의 눈에만 보이는 지옥의 불길이 아흐헤만의 영혼을 직접 태우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아흐헤만은 영문 모를 고통에 몸서리쳤다.
육체가 칼에 베였으니 아픈 것이야 당연하지만 비키르의 칼에 베인 것으로 인한 고통은 정도가 이상하리만치 심했다.
아흐헤만 역시도 7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칼이나 창, 화살을 수도 없이 맞아 보았지만 단언컨대 이렇게 아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불에 시뻘겋게 달군 칼로 살점을 한 점 한 점 포를 뜨는 느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길이 피부로 옮겨 붙어 살점과 지방을 태우고 있는 격통이었다.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발락의 전사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었기에 조금 베인 것을 가지고 꺅꺅 비명이나 지른다며 아흐헤만을 향한 경멸을 표할 뿐이었다.
“으으으으으!”
아흐헤만은 결국 체면을 버렸다.
명예고 긍지고 전통이고 지금 그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젊은 전사에게 먼저 도전해 놓고 꼴사납게 도망치는 아흐헤만을 향해 발락의 전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우우!
울창한 잎사귀들 건너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비난과 야유는 마치 밀림 전체가 아흐헤만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흐헤만은 허둥지둥 물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비키르를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다만, 아흐헤만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비키르 역시도 지난 2년간 아이옌에게 궁술을 사사하여 꽤나 수준 높은 궁사가 되었다는 것을.
핑-
화살 한 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나 싶더니.
…퍽!
이내 아흐헤만의 사타구니에 가 꽂혔다.
“어흐억!?”
아흐헤만이 두 눈을 치떴다.
어찌나 눈에 힘을 주었던지 눈가의 살이 찢어져 피눈물이 흐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윽고,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쓰러진 아흐헤만의 앞 잎사귀들이 흩어진다.
부스럭-
비키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옥스베어의 생식기를 탐내더니만. 그럴 만한 처지가 되었군.”
2년 전, 비키르가 사냥해 온 사냥감의 생식기를 달여 먹겠다며 강짜를 부렸던 적이 있는 아흐헤만이다.
그것을 기억해 낸 아흐헤만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가지고 노는군!”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너는 내 놀잇감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으으…… 으으으으!”
이윽고, 아흐헤만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든 칼과 활을 버렸다.
“……!”
비키르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바뀌었다.
시커먼 마나가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음험하게 일렁거리며 한 곳을 향해 응집한다. 바로 아흐헤만의 두 손바닥 말이다!
‘……과연. 주술사라 이건가.’
비키르는 아흐헤만에게 숨겨진 한 수가 있을 것임을 진즉에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흐헤만은 피로 물든 손바닥으로 수결을 그리며 기묘한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아흐헤만의 두 손에서 뻗어 나온 암흑기류가 주변을 휩쓸었다.
삐그덕- 삐그덕- 끼걱!
비키르는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 드는 몇 개인가의 손길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아흐헤만의 앞을 가로막는 몇 개의 형체가 있었다.
그것은 썩은 살점과 허옇게 드러난 뼈를 가진 오랑우탄의 시체들이었다.
아흐헤만은 주술을 이용하여 아까 자기가 화살로 쏴 죽인 오랑우탄의 시체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렇군. 아흐헤만은 로코코 부족 출신이었나.”
비키르는 일리아드에 임하기 전 아이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흐헤만은 본디 외지인 출신이었는데 알고 보니 주술사 부족 로코코를 고향으로 두고 있었나 보다.
수해의 원주민들에게는 주술, 제국에는 흑마법의 한 종류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이 기묘한 시체소생술이다.
이는 주술사 부족 로코코 사람들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아흐헤만은 급한 대로 방금 죽은 오랑우탄 좀비와 스켈레톤들을 일으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흐흐…… 흐하하하! 일리아드는 무규칙 전투다! 꼭 칼이나 활을 이용해 싸우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육체적인 것이 중요시되는 발락의 분위기 상 아흐헤만의 행동은 여러 전사들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전사들이 주술에 큰 관심이 없는 동안 아흐헤만은 혼자서 착실히 그것들을 연구하고 천착해 왔었던 듯했다.
“가라! 가서 놈을 막아! 내가 치료할 시간을 벌어라!”
아흐헤만은 오랑우탄들을 부려 비키르를 가로막았다.
오랑우탄은 신장이 사람만큼이나 크고 몸무게도 최대 100킬로그램까지 나가니 일단 시간벌이용 고기방패로 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아흐헤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으음. 생각보다는 별것 없군.”
비키르는 여전히 아무런 감흥 없는 목소리로 발을 뒤로 물릴 뿐이다.
“……?”
아흐헤만이 뭔가 싶어 입을 열려 할 때.
퍼-억!
그의 입을 한순간에 틀어막는 것이 있었다.
뒤에서부터 떨어져내려 등을 후려갈기는 어마어마한 충격!
아흐헤만은 등가죽이 찢어지고, 척추가 부러지고, 내장들이 죄다 터져나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나뒹굴었다.
당연하게도, 아흐헤만의 옆에 있던 오랑우탄 시체들 역시도 한 순간에 피떡이 되어 바닥에 으스러져 버렸다.
오로지 비키르만이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뒤로 물러나 있을 뿐.
“???”
아흐헤만은 입가에서 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고통은 둘째쳐도,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이내 뒤집힌 시야, 거꾸로 처박혀 있는 아흐헤만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르르르르……]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거구의 마물.
늙은 암컷 옥스베어가 아흐헤만을 향해 거대한 앞발을 들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