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Mythical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72)
신화 속 대마법사의 재림-272화(272/466)
세 번째 시험의 페이지와 다섯 번째 시험의 페이지는 각각 전쟁 종결로부터 반년 후의 세계를 복제해 구성한 세계다.
허나 이곳 여섯 번째 시험의 페이지는 다르다.
전쟁이 종결나기 7년 전 세계를 구현화한 세계다.
확실히 7년 전 세계를 구현화 해 둔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이 모두 납득이 된다.
아까 만났던 미미르의 복장과 고풍스러운 말투도 그렇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뭔가 어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죽었음이 분명한 게아란이 멀쩡히 살아 있는 이유도 7년 전을 그대로 복제한 세계라고 하면 말이 된다.
하지만 납득이 되는 만큼, 납득이 안 되는 것들도 상당수 있다.
“그, 일단 어째서 세 개의 시험의 페이지가 합쳐진 건가에 대한 의문은 뒷전으로 둔다고 쳐도. 어째서 시험의 페이지에 흑마법사 놈들을 집어넣어 둔 걸까요?”
제일 큰 의문.
이곳. 여섯 번째 시험의 페이지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준비된 장소다.
그런 장소에 어째서 흑마법사 놈들을. 그것도 평범한 흑마법사가 아니라, 9서클 급의 흑마법사를 함께 구현화해 두신 걸까.
상대가 7서클 정도의 흑마법사였다면 내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넣어 뒀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상대가 9서클인 이상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식적으로 내가 이길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아니다.
“……모르겠네요.”
엘레나 님이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아스란도 엘레나 님의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한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날카롭게 빛낼 뿐.
“힌트는…… 미미르의 말 정도일까요. 그린우드 숲에 가서 엘레나 로 그린우드에게 인정받아라, 였죠?”
엘레나 님이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안 했나요? 그 아이의 성격상, 그냥 다짜고짜 그린우드 숲에 가라고 했진 않았을 텐데.”
“다짜고짜 그렇게만 말했습니다.”
“미미르가요? 그 애가 그렇게 두서없는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
“엘레나. 지금 이 세계의 미미르 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미르 님이 아니라, 7년 전의 미미르 님이시다.”
“아……. 7년 전이면 아직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이었죠? 아직 한참 어리광쟁이 일 때네요. 그럼 그럴 수 있죠.”
엘레나 님이 납득한 듯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럼 진짜 곤란하게 됐네요.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뭔가 추가적인 지시가 있었을 텐데…….”
“변수인지 뭔지, 세 시험의 페이지가 합쳐지면서 모두 무산됐으니 말이지.”
아스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픽 웃었다.
“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없는 상황이군.”
“……그러게요. 미미르에게 뭔가를 묻고 싶어도, 정작 중요한 황녀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고.”
목적이 불명인 이상, 통과는 불가능하다.
통과가 불가능한 이상 여기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악의 경우 여기에 평생 갇혀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우리 셋은 동시에 침묵했다.
다들 머리가 복잡해 보인다.
“일단 정보 수집부터 해 보죠. 이 세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구현화 되어 있는지. 그걸 파악하면 어느 정도 레이의 의도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은 접근이다. 너와 나 외에 다른 가신들이 있을 수도 있고. 조사해 볼 가치는 있겠어.”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의 행동 방침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 * *
그 후, 우리는 그린우드 숲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을 탐사하고 다녔다.
사실 말이 ‘우리’지.
사실상 모든 정보 수집은 아스란이 도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공간 마법 사용자라는 걸까. 우리가 발로 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주위를 탐색하고 오더라.
조사의 9할 이상은 아스란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시대로 북동쪽 끝까지 갔다왔다. 대충 2034km정도 나아가고 나니,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더군. 역시 바다까진 구현화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동쪽의 조사를 다녀 온 아스란이 엘레나 님에게 보고를 했다.
“북동쪽으로도 2000km란 말이죠. 그럼…….”
엘레나 님은 그 보고를 기반으로 지도에 표시를 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네요.”
세계 지도에는 거대한 원이 그려져 있었다.
아스란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곳을 서로 연결하자, 딱 이런 형태가 됐다.
“답 나왔네요.”
엘레나 님이 지도의 한 곳을 검지로 콕 집었다.
“구현화된 세계의 중심. 벨라하임 절벽 전초기지. 여기에 뭔가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아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스란이 팔짱을 낀 채 엘레나 님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좋아요. 그럼 다음 목적지는 벨라하임 절벽 전초기지로 결정한 걸로 하고……. 아스란. 주위를 정찰하는 중에 사람은 못 봤나요?”
“전혀. 다른 가신들은커녕, 흑마법사 한 마리. 마을 주민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을은 텅 비어있었다고 했었죠?”
“그래.”
“그럼 이 시점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카피해서 구현화 한 건 아니라는 말이네요.”
만약 그 당시의 세계를 그대로 복제해서 구현화한 거라면, 마을 주민이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세계는 확실히 레이 벨 바이테너의 제어 하에 형성된 가상 세계다.
말인즉.
“그래. 반대로 말하면, 게아란. 그를 이 세계에 넣은 건 주군의 의도라는 말이 된다.”
“……그렇죠.”
마을 주민들이나, 다른 가신들이 없다는 건, 레이 벨 바이테너가 생명체를 취사선택해서 구현화했다는 말이 된다.
즉, 게아란은 레이 벨 바이테너가 의도적으로 넣은 존재라는 말이다.
“대체 레이는 무슨 생각으로 게아란을……. 7년 전의 미미르를 시험관으로 두는 것부터, 게아란을 재현하기까지……. 레이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가 없어요.”
“주군의 하해와 같이 넓고 깊은 생각을 우리 따위가 어찌 모두 파악할 수 있을까. 분명 우리가 상상도 못한 원대한 목적이 있으실 게 분명하다.”
“원대한…… 까진 모르겠지만. 분명 이유가 있긴 할 텐데 말이죠.”
엘레나 님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벨라하임 절벽으로 이동하죠. 아스란. 포탈 부탁해요.”
“흠.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엘레나 님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어째선 가요? 설마 정신력 때문…인가요? 확실히 총합 14,485km를 이동한 만큼,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긴 했을 테지만……. 당신의 정신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당연한 소릴. 전쟁 종결 후, 어느 정도 녹이 슨 건 사실이지만, 고작 이 정도로 퍼질 수준까지 영락하진 않았다.”
“그럼 왜 이동할 수 없다는 거죠?”
“간단한 이유다.”
아스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벨라하임 절벽 전초기지 쪽과 포탈이 연결되질 않는다.”
“……연결이 안 된다고요?”
“그래. 뭔가가 포탈의 연결을 완전히 틀어막고 있는 것 같다.”
“구현화가 안 돼 있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다. 탐색 중, 벨라하임 절벽이 구현화되어 있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
“이미 육안으로 확인까지 했군요. 좋아요. 그럼 일단 그 근처로 포탈을 연결해서 이동한 뒤, 걸어서 이동하는 걸로…….”
“내가 그 정도도 확인 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걸어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던가요?”
“그래. 벨라하임 절벽 근처는 보이지 않는 방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 이상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 그 얘기를 미리 하지 않은 건가요?”
“안 그래도 하려고 했다.”
“……빨리도 말하시네요.”
엘레나 님이 아스란을 찌릿 노려봤다.
“뭐가 됐던, 벨라하임 절벽에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해 졌네요.”
“동의한다.”
“그럼 뭐가 됐던, 그 근처로 가 봐야겠죠. 아스란. 당신이 말한 투명한 방벽 근처까지 포탈을 열어주세요.”
아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바로 허공을 수평으로 그어, 균열을 열었다.
천천히 포탈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균열.
중앙 지점이라고 했으니, 거리가 그리 멀진 않을 터.
대충 30초 정도면 완성될 테지.
“이제 와서 묻는 것도 뭐한데……. 동의하시는 거죠?”
엘레나 님이 슬쩍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네?”
“벨라하임 절벽 전초기지로 이동하는 거요.”
“아, 네. 물론이죠. 저도 두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계속 조용히 하고 있었던 건, 딱히 딴지를 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이 알아서 일을 술술 진행하시는데, 내가 여기서 뭔가를 더 말해 봐야 뭐하겠는가.
“좋아요.”
엘레나 님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조금 내려, 내 가슴팍을 바라봤다.
내 품에 안겨 세상 행복하단 표정으로 하품을 하고 있는 구미호.
엘레나 님은 그런 구미호가 신기한 듯, 눈을 빛내며 탄성을 흘리셨다.
“참…… 봐도봐도 신기하네요.”
“얘가 진짜 사람을 안 따르긴 했나보네요. 엘레나 님까지 그렇게 놀라실 정도면.”
“그것도 충분히 놀랍긴 합니다만…….”
엘레나 님이 구미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당신의 성장이 더 놀랍네요. 분명 얼마 전까지 만해도, 이제 갓 신안을 개안해 나가는 단계였는데……. 벌써 신화 마법을 다루고 있다니.”
엘레나 님이 천천히 내 머리에 손을 가져와, 천천히 쓰다듬었다.
“대견하네요. 정말……. 한때나마 당신을 가르쳤던 선생으로서 너무나도 뿌듯하답니다.”
“……그, 감사합니다.”
간만에 듣는 엘레나 님의 칭찬에 괜히 얼굴이 화끈해졌다.
“준비됐다.”
그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아스란이 우리에게 턱짓했다.
이상한 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오기나 하라는 표정이었다.
“쟤는 진짜 정말 눈치라는 게 전무하다니까요. 안 그래요?”
“……그, 음.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무슨 대답을 하던 내게 득이 될 게 없다. 지금은 입 꾹 닫고 있는 게 상책이다.
나는 조용히 엘레나 님의 시선을 피해, 아스란이 만든 포탈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도 참, 여전하네요.”
그런 날 바라보며, 엘레나 님이 작게 미소 지었다.
* * *
우리는 포탈을 타고 순식간에 벨라하임 절벽 전초기지 인근에 도착했다.
“……와우.”
자연에 풍화되어 날카롭게 벼려진 절벽.
그 위에 성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성이 얼마나 웅장한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전초기지라고 해서, 작은 성채 정도를 예상했는데…….’
설마 저 정도로 클 줄은 몰랐다.
“멋지죠? 우리 바이테너 제국 최전선을 무려 13년이나 지켜 준 철의 요새랍니다.”
“진짜…… 대단하네요.”
이 험준한 지형에 저런 게 서 있으면, 어지간한 방법으론 뚫을 수단이 없을 테지.
과연 철의 요새라 불릴 만하다.
“안은 더 대단하답니다. 보면 엄청 놀라실 거예요. 나중에 꼭 보고 가세요.”
엘레나 님이 천천히 허공에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들어갈 방법을 찾은 뒤의 이야기지만요.”
엘레나 님의 손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아스란의 말대로였다.
벨라하임 절벽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진짜……. 산 넘어 산이라고 해야 할지…….”
“……흠.”
아스란과 엘레나 님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절벽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성을 올려다봤다.
두 분의 눈에서 오만가지 감정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묘한 기분이에요. 저 성을 다시 보게 되다니.”
“…….”
후회, 그리움, 절망, 분노 등등.
저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저 성에서 뭔가가 있었나요?”
“……예.”
“있었다.”
두 분이 동시에 답했다.
“과거, 벨라하임 전초기지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전쟁의 큰 전환점이 된 전투였지.”
“전환점이요?”
“그래.”
아스란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전쟁이 마지막으로 치닫기 시작한 전환점. 그게 바로 저 벨라하임 전초기지에서 벌어진 전투. 벨라하임 초토화다.”
“초토화…….”
그래서 그런 눈으로 성을 올려다보신 거구나.
“뼈아픈 패배였다. 만약 벨라하임 전초기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면, 희생은 절반으로 줄었을 거다.”
“제가 전선에 나설 수만 있었다면…….”
“놈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가장 먼저 널 노린 거겠지.”
엘레나 님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네가 있었어도 상황을 뒤집기는 힘들었을 거다.”
아스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벨라하임 성을 습격한 자는 다름 아닌 베일 스톨이니까.”
베일 스톨.
흑마법의 시초.
과연. 이런 요새가 어떻게 뚫릴 수 있었던 건가 궁금했는데.
베일 스톨이 나선 거였구나.
“그래도 제가 있었다면…….”
“희생은 확실히 줄었겠지. 못해도 20% 이상은 더 살렸을 거다.”
“……그렇죠.”
엘레나 님의 표정이 더 침울해졌다.
“표정이 못 봐 줄 정도군.”
그런 엘레나 님을 보며 아스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후회를 곱씹어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는 절벽의 보이지 않는 벽에 손을 짚고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의 후회를 곱씹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다.”
“……그랬죠.”
엘레나 님의 눈에 힘이 돌아왔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일단 흩어져서, 혹시 뚫려 있는 곳이 있나 확인부터 해 볼까요?”
“그게 순서겠지.”
두 분이 의견을 교환했다.
나는 그런 두 분을 힐끔 바라 본 뒤, 아스란이 짚고 있는 투명한 벽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어라?”
그 순간, 뭔가 묘한 감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이 감각. 뭐지?
“그럼 상공은 내가 확인하는 걸로 하고…….”
“잠시. 잠시만요.”
나는 아스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두 분의 시선이 단숨에 내게 집중되었다.
“잠시 확인 좀 해 봐도 될까요?”
이 묘한 감각.
이 감각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이 장벽 말인가? 얼마든지 확인해 봐라.”
나는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가까워질수록 증폭되는 묘한 감각. 대체 이 감각은 뭘까.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듯한 묘한 감각.
그 감각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투명한 벽에 손을 짚었다.
“……어?”
아니.
짚으려고 했다.
“……뭐?”
“……통과했어?”
두 분의 손을 가로막았던 벽은 내 손을 막지 않았다.
내 손은 아무렇지 않게 투명한 벽을 통과했다.
마치 나만큼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오히려 어서 이리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날 반겼다.
“이거, 제 생각에…….”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여섯 번째 시험의 페이지 응시자인 나뿐만인 듯하다.
나는 내 생각을 털어놓기 위해 고개를 돌려, 두 분을 바라봤다.
“……사라졌어?”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내 품에 안겨 있던 구미호도 마찬가지였다.
눈치채고 보니 내 품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중.
“윽!”
돌연 갑작스런 어지럼증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눈을 뜨고 있을 수조차 없는 강력한 어지럼증.
나는 그대로 지면을 굴렀다.
아니, 내가 지면을 구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정도 수준의 어지럼증이었다.
‘대체…… 뭐야……?’
그렇게 서서히 어지럼증이 멎어가고.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대리석 바닥?’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 온 건, 절벽 인근의 불그스름한 돌바닥이 아니라, 잘 정돈된 대리석 바닥이었다.
‘설마 성 안으로 들어 온 건가?’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을 만한 곳이라고 하면 전초기지 내부 밖에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휘황찬란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거만하게 턱을 괜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의 제자. 바이테너식의 다음 계승자.”
칠흑을 형상화 한 듯한 눈동자.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로 싸늘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남성.
“네 이름은 무엇이더냐.”
내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폭군 드레이크의 앞에 섰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위압감은 감히 드레이크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치 죽음이 내 앞에 서 있는 듯했다.
“흠. 상대의 이름을 묻기 전에, 내 소개를 하는 게 예의였던가.”
남자가 씨익 웃었다.
“이해해라.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드물어서 말이지.”
죽음이 한데 뭉쳐,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보통은 그 전에 죽어버려서 말이야.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누는 건 레이에 이어서 두 번째다. 제법 기쁘군.”
남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그 별거 없는 웃음소리가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그럼 내 소개부터 다시하지.”
남자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내 이름은 베일 스톨.”
남자가 나를 내리깔아 본 채, 씨익 웃었다.
“레이의 숙적이자…….”
실험용 쥐를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초리였다.
“미래의 네 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