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그 나물에 그 밥
‘태상노군께서는 그렇게 쩨쩨하신 분이 아니라고?’
정광의 말에 백승무는 어이가 없었다.
“……사형. 그래도 도사가 단주를 차는 것은 좀…….”
“이런. 사제는 좋은 도사가 되기는 글렀구나.”
“……네?”
그른 것을 넘어 최고의 마인(魔人)인 정광이 도(道)를 논했다.
“도교와 불교를 왜 굳이 가르려 해. 민초들이 언제 그런 걸 따지는 모습 본 적 있어?”
“……없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사는 민초들이었다. 그들은 건강, 장수, 복을 내려줄 수 있는 존재라면 태상노군이든 부처든 상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얻길 원했기에 둘을 가리지 않고 믿는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쪽보단 양쪽을 믿는 게 받아낼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 점을 찌른 정광은 진인이 도를 설파하듯 말했다.
“도사가 중얼거리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나 중이 입에 달고 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둘 다 ‘불(佛)’이 들어 있잖아. 그만큼 양쪽이 가까운 거지. 고기, 술, 여인을 금하는 것도 똑같고.”
도교는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도(道)를 좇는 종교였다. 때문에 불교에서 차용한 부분도 꽤 있었다.
무량수불이라는 도호(道號)도 그중 하나였는데, 여기서 ‘불’은 부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태상노군을 말함이었다.
백승무는 정광의 말을 일부분이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다르지 않습니까?”
“부처나 태상노군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뭘 그리 따져.”
“사형!”
백승무가 경악해서 외쳤으나 정광은 평온하게 되물었다.
“왜?”
“……남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어찌 그런 불경한 표현을 쓰십니까?”
“여기 남이 어딨어. 우리밖에 없는데.”
정광, 백승무, 자오.
확실히 그렇긴 했다.
“……죄송합니다. 단주, 그냥 차십시오.”
“물론.”
흐뭇한 얼굴로 반불을 쓰다듬던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는 백승무와 자오에게 말했다.
“곧 떠날 테니까 짐 싸세요.”
“……이, 이렇게 갑자기요?”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정광은 당황한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얻을 건 다 얻었겠다, 이제 놀러 가야죠. 어디가 좋을까?”
* * *
백승무는 물론, 의외로 자오 또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당황한 것도 잠시, 그들은 수많은 지명을 말했고 치열한 논의가 이뤄졌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다음 행선지는 정광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정해졌다.
“진작 이럴걸. 괜히 시간만 버렸네.”
“…….”
“…….”
“사제, 어서 가서 준비해. 자오도요.”
“……네, 사형.”
“……알겠습니다, 진옥룡.”
두 사람은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정광은 찢어진 경장을 벗고 도복을 입었다.
곤륜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고급스러운 도복이었다.
‘하아아. 역시 이게 맞는 건가.’
당장 이것밖에 없어 입었건만 이리도 편하다니.
‘환생한 뒤 이십 년 가깝게 도복만 입고 살았으니 당연할지도.’
옷매무새를 확인한 정광은 주섬주섬 짐을 쌌다.
웬만한 것들은 모두 백승무와 자오가 들게 했기에 크게 챙길 만한 건 없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르신, 넣으세요.”
문을 연 팽만소는 방 안으로 손자를 밀어 넣은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쯧쯧. 넋이 나가셨네.”
정광은 공허한 눈빛으로 서 있는 팽강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큭.”
나직한 신음을 내며 자빠지던 팽강웅은 정광이 손을 놀리자 쓰러지는 것이 아닌 가부좌를 튼 상태로 앉게 되었다.
정광은 팽강웅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匯穴)에 손을 올리고 기합을 질렀다.
“합!”
“크흑!”
순후한 내공이 팽강웅의 백회혈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팽강웅의 머릿속에 있던 사기가 소멸되며 비어버린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그 자리를 완전히 채운 내공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러자 팽강웅의 공허했던 눈빛이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대공자, 정신 좀 들어요?”
정광을 한동안 바라보던 팽강웅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들을 순 있었는데 이제 말도 할 수 있게 됐군. 이보게 진옥룡, 이건 또 무슨 수법인가?”
“어라? 역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할아버님께 들었네. 그 예의 없는 말투와 곤륜의 도복을 보니 확실하군.”
“아, 진짜. 어르신 그렇게 안 봤는데 입 진짜 가벼우시네. 사방팔방 다 퍼뜨리셔 아주.”
“……할아버님 잘못이 아닐세.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시려면 그러셔야만 했어.”
“그렇긴 하네요.”
팽강웅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광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가 사술에 걸렸던 건가?”
“네.”
“……자네가 그 사술을 깼고?”
“네.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저하께서 따라주신 술을 마셨을 때까지.”
팽강웅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꿈을 꿨네. 왠지 익숙한 뭔가가 나를 삼키려고 하더군. 거부할 생각조차 못 했어. 당연한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었지.”
상소운의 요기를 말함이었다.
팽강웅이 익혀온 사이(邪異)한 심법을 조종하는 사술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것에 삼키기 직전, 소름 끼칠 정도로 요사한 무엇인가가 나타나 그것과 맞섰네.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역천경이 등장해서 상소운의 요기와 싸웠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몰랐지만 두렵더군. 그 싸움의 여파로 내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지. 그런데…….”
팽강웅의 눈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너무나 희면서도 검다고 할까? 묘사조차 못할 만큼 놀라운 것이 싸움에 뛰어들었네. 두 번째 것은 알아서 비키고 첫 번째 것은 물러나지 않고 싸우더군. 하지만 상대가 안 됐어. 마지막 것이 이겼지.”
깊숙이 가라앉았던 팽강웅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게 진옥룡 자네였나?”
“네.”
“……하하. 하하하.”
허탈하게 웃던 팽강웅이 말을 이었다.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에 있더군.”
정광이 손뼉을 치며 중얼거렸다.
“부작용 없이 제대로 깼구나. 운이 좋았네.”
팽강웅은 화낼 힘조차 없었다.
상실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일세. 무명심법으로 키워온 상단전(上丹田)의 기가 사라졌더군. 그게 사술의 씨앗이었단 말인가? 나 스스로 키우고 거기에 빠진 건가?”
“맞아요. 심법 이름이 그거였어요? 이름조차 허접하네요.”
“……내겐 무척 소중한 것이었어.”
“뭘 그렇게 실망해요. 사술일 뿐인데.”
“……할아버님께서 자네의 말을 전해주셨네. 내가 폐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지?”
“네. 지금 봐도 그렇네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니, 그럴 거야.”
팽강웅은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뒤처졌던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사술이었다니.’
황태손과 지척 거리에 있던 상황이었다. 왜 하필 그때 사술이 발동됐는지, 정광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떤 짓을 벌였을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이런 멍청한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가 나고 자란 가문을,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팽가를 스스로 멸문시킬 뻔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식솔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팽강웅을 보고 있던 정광이 부드럽게 위로했다.
“힘내세요. 자세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무슨 의미인가?”
“상선약수(上善若水)면 부유부쟁(夫唯不爭)이라. 그냥 물 흐르듯 넘어가면 아무 일도 없을 거란 거죠.”
“…….”
어처구니없어하는 팽강웅에게 정광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이나마 아는 사람은 어르신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의혹은 품을지언정 의심은 안 할 걸요?”
“……자네 말대로 할아버님께서 아시지 않는가. 무명심법이 정상적인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익힌 나일세. 고개를 들 면목이 없어.”
“어르신은 괜찮은데.”
“……?”
“대공자.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잖아요. 맞죠?”
“물론이지.”
“어르신의 일을 생각해 봐요.”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정광은 아차 했다.
‘아. 이거 비밀이었지.’
그런데 무슨 상관인가.
팽만소도 정광의 정체를 허구한 날 까발렸는데.
‘이래도 내가 손해 보는 거야.’
정광은 팽강웅에게 팽만소와 황태손의 얘기를 했다.
“……이해해요? 어르신도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황태손 저하를 배신했죠. 그런데 저하께서 어르신을 탓하셨나요? 아니던데.”
“…….”
“어르신도 대공자를 탓하지 않으실 거예요.”
“…….”
“오히려 걱정하고 계실걸요? 대공자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로 어르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괴감에 휩싸여 삶을 소진할까 봐.”
“…….”
“그러니 수련도 더 열심히 하고 가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 무공도 늘고 가주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어르신도 좋아하실 거고.”
“…….”
정광은 대충 던지는 말들이었지만 팽강웅의 가슴에는 깊숙이 박혔다.
“어라? 울어요?”
“……아닐세. 눈에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야.”
“엄청 큰 먼지가 양쪽 눈에 동시에 들어갔나? 신기하네.”
팽강웅은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뒤, 팔을 내리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눈물이 멈춘 건 물론이요, 조금이나마 담담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자네를 오해했군.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말로만 그러시는 건 좀…….”
팽강웅이 정색했다.
“지금의 나는 너무 부족해. 더 큰 사람이 되어서 보답하지.”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원한도 잊지 않지만 은혜도 제대로 갚을 줄 안다는 말이었다.
“역시 팽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호한이시네.”
과거의 팽강웅이었다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광을 제대로 겪어보니 나름 칭찬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맙군.”
“어? 생각보다 더 순순하시네요. 그럼 판을 키워야지.”
“……무슨 말인가?”
“더 커지셔야 더 줄 수 있잖아요.”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체조법을 펼쳤다.
그가 무림맹에 퍼뜨렸던 그것이었다.
“뭔지 아시죠?”
“무림맹에서 유행하는 그것이군.”
“열심히 하세요. 대공자의 상단전에 심어놓은 기를 단련하려면요.”
팽강웅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 했나? 상단전?”
“네.”
“자네가 내 상단전에 기를 심어놨고, 그 체조법을 수련하면 상단전을 활성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 들어놓고 왜 또 물어요?”
팽강웅은 경악했다.
‘상단전에 기를 심는다는 것도 처음 듣지만, 고작 체조법으로 상단전을 수련할 수 있다고?’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정광이 말했다.
“상단전을 열면 하늘과 영(靈)이 통해서 심기체(心氣體)가 합일되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고 하죠.”
“……그렇네. 무림에서 말하는 신화경(神化境)의 경지요, 도교에서 말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말함이지.”
“근데 그거, 사실이 아니에요.”
“……무어라?”
정광의 사조인 운후는 깨달음만으로도 우화등선할 뻔했다.
전생에 천하제일고수였던 정광은 상단전을 극도로 단련했지만 완전히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길 원하지도 않았고.’
말이 신화경이요 우화등선이지, 한순간에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 아닌가.
‘이건 경험해 봐야 아는 거니까 대충 설명하자.’
이름하여 맞춤형 설명이었다.
“어쨌든 상단전을 단련하면 집중력이 늘고 의지도 바로 설 거예요.”
“……사술에도 빠지지 않게 되는가?”
“네. 제대로만 익히면요.”
무림맹의 무인들이 너도나도 하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팽강웅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상단전까지 단련할 수 있다니…….’
정광이 그의 상단전에 기를 심어놔서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팽강웅은 고마움이 커지는 만큼 오기도 솟았다.
‘이렇게까지 받았는데도 못할까 보냐. 반드시 성취를 이루고 보답을 하마.’
팽강웅은 힘주어 말했다.
“좋아. 반드시 제대로 익히지.”
“네. 그래서 제대로 갚으세요.”
“……알겠네. 그런데 물어볼 게 두 개 더 있네만…….”
“말하세요.”
팽강웅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내게 수작을 부린 게 누군가?”
“글쎄요.”
“그런 사이한 심법을 우연으로 가장해 익히게 할 수 있는 조직은 얼마 없지. 할아버님이나 나나 대충 짐작하고 있네.”
“짐작만으로 상대를 치려면 상대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져야 하는 거 아시죠?”
“……뼈 아픈 말이군. 다음 질문을 하겠네.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어떻게 알고 본가에 온 것인가?”
정광이 싱긋 웃었다.
“저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시면 대답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