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11
11화
여기가 정녕 곤륜인가!
허청의 안내로 삼청전(三清殿)에 들어선 팽수원은 내부를 훑어봤다.
곤륜파의 장문인이 장로들과 중대한 일을 논의하는 곳답지 않게 낡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세가 약해져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알 수가 없군.’
어느 쪽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오직 실력만이 중요했다.
‘그런데 왜 이리 사람이 적지?’
드넓은 삼청전에 그와 허청을 제외하면 달랑 노도사 두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중 중앙에 앉은 노도사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가 장문인이고 다른 노도사는 장로일 터, 팽수원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북팽가의 팽수원이 장문인과 장로께 인사드립니다.”
예상대로 중앙의 노도사가 대답했다.
“허허. 어서 오시게. 곤륜의 장문을 맡고 있는 운적이네.”
뒤이어 파리한 안색의 노도사가 인사했다.
“반갑네. 운후라 하네.”
운후라는 말에 팽수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곤륜삼성의 수좌, 운후 진인? 서장의 대마두를 처단하며 단전이 파괴되었다더니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참된 진인으로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운후였다.
친우인 허청의 사부이기도 해서 그를 통해서도 많이 들었었지만 직접 보게 되니 느낌이 새로웠다.
자연스레 언행이 더 공손해졌다.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우리 같은 늙은이들에겐 너무 과분한 말이군.”
“어찌 그런 말씀을…….”
“괜찮네, 괜찮아. 사람이 너무 적어 놀랐는가? 곧 올 테니 편히 앉게나.”
그 후 몇 차례 덕담이 오갔지만 금방 어색함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봤다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겠는가.
하지만 팽수원은 재기 넘치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섬서성에서 큰일이 있었는데…….”
“……오호. 그런 일이 있었나?”
오지에 처박힌 곤륜파로서는 듣기 힘든 강호의 여러 사건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장문인은 물론 신선처럼 허허롭게 앉아 있던 운후조차도 몰입한 얼굴로 한참 경청하는데,
벌컥!
삼청전 문이 활짝 열리며 노도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힘든 수련 탓에 잔뜩 지치고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괴로운 수련이 일찍 끝나게 해준 손님이 너무 고마워서.
“도법제일! 투사 중의 투사! 하북팽가에서 오셨다고!”
“반갑네! 무척 반가워!”
“허어! 딱 봐도 무림을 이끌어 나갈 동량이라는 걸 알겠구먼!”
일부는 장문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무척 평안해 보이시는군요.”
“험. 험. 내 의지로 수련에 빠진 게 아니잖소.”
“네? 잘 못 들었습니다만.”
왁자지껄한 노도사들 때문에 당황하던 팽수원은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땀 냄새는 진정시킬 수 없었기에 입으로 숨을 쉬어야만 했다.
‘으음. 이제야 조금 나아지는 듯하군.’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초췌한 안색의 허 자 배 도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당연히 그들도 운 자 배와 마찬가지로 팽수원을 격하게 환영했다.
“명성 높은 중류도(重流刀)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이리도 헌앙할 수가! 과연 명불허전이외다!”
“하하! 원시천존께서 보우하사 곤륜에 팽 대협을 보내셨소!”
팽수원의 안색이 점점 노래졌다.
간신히 참고 있던 땀 냄새가 훅 밀려오고 있었다.
‘우욱.’
그가 괴로워하는 기색을 눈치챈 장문인은 용건을 빨리 묻기로 했다.
“좋은 얘기 잘 들었네. 그래,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는가?”
팽수원은 혼미한 정신을 억지로 깨웠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허어. 두 개나? 말해보게.”
“우선 곤륜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어서입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옆에 있던 허청이 웃었다.
“하하. 이 친구. 그런 것이라면 내게 말할 것이지 뭐 하는 건가?”
“자네와는 친분이 있어 제대로 할 수가 없네.”
“제대로 한다?”
“진검(眞劍)과 진도(眞刀)로 겨뤄보고 싶다는 말일세.”
“그야 당연히…….”
허청이 말끝을 흐리며 팽수원을 바라봤다.
그들 연배의 무림인이라면 진짜 검과 도로 비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형식적인 비무가 아니라 실전처럼 겨뤄보고 싶다는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잠시 수염을 쓰다듬던 장문인이 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것과 관련이 있겠군.”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삼청전이 소란스러워졌다.
“허어, 저런.”
“연유는 모르겠지만 본문을 시험해 보겠다는 말 아닌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팽수원은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곤륜 도사들을 향해 포권했다.
“중한 일이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그도 말해놓고 켕겼다.
만약 누군가가 팽가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칼부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기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비를 거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곤륜 도사들이 갈고 닦아온 수양의 무게는 가볍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담담히…… 아니, 좀 이상하게 반응했다.
“장문인. 승낙하시지요.”
“칠대세가의 일원인 하북팽가라면 딱 좋지 않습니까?”
“제가 나서겠습니다.”
“어허. 사제. 내가 하겠네.”
“다들 뭐 하시오? 내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편히 쉬시오.”
노도사들이 서로 나서며 삼청전이 난장판이 되었다.
정광에게 코가 꿰여 해왔던 지옥 같은 수련의 결과를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짐작도 못 하는 팽수원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끔뻑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장문인이 나직이 호통쳤다.
“그만들 하시오.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요?”
“혹 장문인께서 나서시렵니까?”
“어허. 손님이 비웃으시겠소이다.”
노도사들을 진정시킨 장문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팽수원에게 물었다.
“그래, 나 정도면 되겠는가?”
여기저기서 장문인을 성토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그는 꿋꿋이 팽수원만 바라봤다.
“……어찌 제가 감히. 저와 같은 연배의 도장이었으면 합니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장문인이 허 자 배를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하겠는가?”
운 자 배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던 허 자 배들이 저마다 손을 들며 외쳤다.
“감히 제가 나서겠습니다!”
“어허! 사제는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좀 쉬지 그러나?”
“사형이야말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소만.”
“그만들 하시오. 장문인께선 소제를 보고 계시오이다.”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것은 허 자 배도 마찬가지였기에 또다시 난장판이 되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문인은 운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형이 보시기엔 누가 하는 게 좋겠습니까?
운후는 빙그레 웃으며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장문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형이시구나. 딱 좋군, 딱 좋아.’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 그의 입만을 바라봤다.
“허직. 자네가 나서게.”
비무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던 유일한 인물인 허직이 놀라서 물었다.
“저 말씀입니까?”
“허허. 여기 허직이 자네 말고 누가 있나?”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허직이 앞으로 걸어 나와 팽수원에게 예를 취했다.
“허직이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가르침을 청하오.”
팽수원은 재빨리 그를 훑어봤다.
‘꼬장꼬장한 도사 같군. 기세는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데.’
허직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도사였기에 그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었다.
“팽수원이오. 잘 부탁드리겠소.”
그들은 검과 도를 뽑아 기수식을 취했다.
‘허직이라. 장문인이 지목한 것으로 봐선 한 수가 있는 자 같은데.’
팽수원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허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에 반해 장문인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나선 허직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어째서 나란 말인가?’
비무를 하고 싶어 하는 사형제들이 그리도 많은데 대체 왜?
게다가 허 자 배에서 그의 무공은 낮은 편에 속하는데?
그때 팽수원의 입이 열렸다.
“무례한 말인 줄은 아나, 서로 무공이나 초식명은 말하지 않고 겨뤘으면 합니다.”
“……상관없으니 그리합시다.”
머릿속의 잡념이 사라졌다.
대신 어린 소년의 당돌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싸우는데 그런 걸 왜 소리쳐요?’
‘헉. 헉. 그게 예의이니라.’
‘어차피 이기는 게 목적인데 예의요? 그럴 바엔 져주는 게 예의를 지키는 거겠네요.’
‘허어. 어찌 그런 말을. 내 사형께 이 일을 단단히 따지겠다.’
‘사부님은 저기 누워계시는데요.’
‘헉! 사형! 벌써 지쳐 쓰러지셨소?’
허직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이런 쓸데없는 일을 떠올려서 어쩌자는 건가.
순간 칼자루를 잡은 팽수원의 두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허직의 두 발이 저절로 용형보(龍形步)를 밟았다.
쉬익-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려치는 팽수원의 깨끗한 베기를 용이 꿈틀거리듯 우측으로 돌아 피한 그는 곧바로 우아하게 검을 들어 한 점을 향해 찔렀다.
팽수원의 어깨였다.
‘용형보잖아요, 용형보. 직선으로 빨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용이 담 넘듯…… 아, 그건 구렁인가. 어쨌든 굴곡을 주면서 걸음을 옮겨야죠.’
‘거참. 그건 그렇다 치고 태청용형검(太淸龍形劍)은 왜 그리 펼쳐야 하는 게냐?’
‘사숙께서 하시는 것처럼 빠르게 찌르려고만 하면 누가 맞아줘요. 뻔히 보이는데. 쓸데없이 멋 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렇게 큰 호를 그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죠. 개파조사 영…… 개파조사님이 괜히 그러셨겠어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 보법과 검법을 펼쳤다간 상대가 쉽게 피할 텐데.’
‘네? 쉽게 피해요?’
허직의 머릿속에 정광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숙보다 훨씬 강하지 않는 이상 허겁지겁 물러날걸요.’
아니나 다를까.
“헉!”
팽수원이 헛바람을 터뜨리며 재빨리 물러났다.
너무 의외의 광경에 놀란 허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정광의 가르침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허도 사숙께서 물러나셨을 땐 용형보가 아니라 뇌전보(雷電步)로 치고 들어가셨어야죠.’
그의 신형이 죽 늘어나며 번개처럼 팽수원에게 쇄도했다.
‘상대가 물러나면서 병기를 휘둘러 봤자 무슨 위력이 있겠어요. 한 대 맞아준다는 각오로 멋지게 찔러주는 겁니다. 찌르기라 사숙께 적의 병기가 닿지도 않을 거예요. 창이 아니라면요.’
다행히 팽수원은 도를 썼기에 허직은 멋지게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챙!
“윽!”
도로 가까스로 막으며 한 걸음 더 밀려난 팽수원의 눈이 깊어졌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밀리다니!
힘을 아끼고 있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대로 가다간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린 그는 폭풍 같은 도격을 퍼부었다.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절기,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가 펼쳐진 것이다!
지켜보던 곤륜 도사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과연 팽가군!”
“저리도 강맹한 연환격이라니!”
“그냥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오. 하나하나의 흐름이 모여 강함을 더하고 있소.”
“중류도(重流刀)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로다!”
이렇게 팽가와 팽수원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의 가슴은 새롭게 태어난 곤륜 무공에 대한 자부심으로 터질 듯했다.
보아라! 저 꼬장꼬장한 허직이 우아하게 보법을 밟는 모습을!
느껴라! 저 융통성 없이 꽉 막힌 허직이 멋들어진 초식을 찔러 넣는 장관을!
게다가 멋있는 것만이 아니라 강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허직의 마음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문인과 운후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광이 바꾼 곤륜 무공을 수련했건만 마음속 한편에는 불만과 불안감이 존재했다.
과연 이게 맞는 길일까?
오히려 더 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길로 빠진 것이라면 죽어서 개파조사님을 어찌 뵙겠는가?
그런데 아니었다.
언제나 딱딱한 그였지만 가슴속에서 짜릿한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별호가 중류도(重流刀)라 했던가? 명성이 꽤 높다 들었는데.’
풍문으로도 몇 번 들었고 허청에게서도 직접 들었던 고수다.
그런 자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거다.
‘아차.’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전에도 한 번 느꼈던 기분이었다.
‘사숙. 끝이 안 났는데 방심하시면 어떡해요.’
‘그, 그래도 거의…….’
‘거의가 어딨어요. 상대가 죽을 때까지 계속 패야죠.’
‘패, 패? 나는 검을 쓰는데.’
‘그럼 찌르셔야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신형이 번뜩이며 화려한 검격을 쏟아냈다.
그를 보는 팽수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하면서도 멋진 무공이라니! 게다가 강하기까지! 여기가 정녕 곤륜인가!’
그와는 반대로 허직을 보는 장문인과 운후의 눈빛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사형의 뜻대로 허직을 시키길 잘했구나.’
‘번뇌를 멈추고 이제 받아들이거라. 우리가 걷는 길은 틀리지 않았어.’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이 진정한 곤륜이니라.’
* * *
정광은 환생하여 곤륜에 온 이후로 무척 많이 변했지만 안 그런 점도 있었다.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한 게 뭔가 하려 하다가도 누가 그러자 하면 갑자기 반대로 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지금 정광이 딱 그랬다.
“……대체 어찌 안 것인가?”
그는 팽강휘의 물음에 짧게 대답했다.
“우연히?”
“……후우. 내 먼저 잘못한 게 있으니 탓하지 않겠네. 잘 있게.”
또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팽강휘를 보자 정광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비 맞은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장난 한번 쳤다고 처량해지는 꼴 좀 보소.
제법 성격 좀 있어 보이더구만 이렇게 답답한 녀석이었나?
“아, 진짜. 남자가 패기 없기는.”
“……지금 뭐라 했나?”
“패기 없다고 했는데요.”
“그건 동의할 수 없군.”
“그래요? 그럼 패기 있게 한 번 더 물어보시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팽강휘가 다시 물었다.
“물어볼 염치도 없지만 자네가 그리 말하니 묻는 걸세.”
“네.”
“……후우. 내가 뭘 부탁할지 어찌 안 것인지는 일단 제쳐두겠네. 내 가슴의 기혈이 막힌 걸 어떻게 알고 풀었나?”
“보이니까요.”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정광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이놈 말이며 표정이 왜 이래?
잘 못 들었나?
조금 더 자세히, 한 자씩 또박또박 말해줬다.
“뻔히 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