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길
정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거늘.
충분히 맛봤다고?
덕분에 깨달았다는 건 또 뭐고?
이 일을 벌인 이유는 불존의 부탁과 그 대가로 받을 보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자신을 속인 현오를 골탕 먹이기 위함이다.
사바세계의 달콤함을 실컷 맛보게 한 뒤 산에서만 지내온 삶을 후회하게 하려고 했건만, 뭐가 어째?
정광은 깊이 탄식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더니…….’
평생 소림사에서만 박혀 지내서 그런지, 정도 이상의 사치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까워라.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물론 정광도 몰랐다.
백승무가 모두 계산했으니까.
어쨌든 적은 금액은 아닐 터, 속이 쓰려 왔다.
‘가만. 소림에서 받아내면 되잖아.’
전에 백승무에게 들은 바로는 이런 경우 부대비용(附帶費用)으로 잡아서 따로 청구한다고 했다.
원래 받기로 한 보상 따로, 부대비용 따로.
좋아. 문제 해결이다.
“뭐 하느냐? 앉으래도.”
“네.”
현오는 앞에 앉은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게 받은 만큼 큰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이나마 주려고 한다.”
“춘화도(春畵圖)요?”
“……그건 암자에서 네가 날 업을 때 이미 챙기지 않았느냐?”
“아. 그랬었나.”
현오는 피식 웃은 뒤에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네 도가 높고도 높아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란 건 안다. 그래도 이 세상을 딛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말을 안 할 수가 없구나.”
“……?”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내려보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모르는데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네 도는 자유로움 속에 굳건한 절제가 있는 삶으로 보였거든. 세상을 위하는 것으론 안 보였어.”
자유야 맞다만 굳건한 절제가 뭐?
정광이 황당해하는 것과 상관없이 현오의 말이 이어졌다.
“하늘이 너 같이 특별한 이를 내려보낸 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세상에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예정이라서일 테지. 잠깐. 어딜 가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느냐. 조금만 더 들어라.”
“아니, 지금 무슨 사교 교주처럼 말씀하시잖아요.”
“……윤회(輪廻)를 아느냐?”
“네.”
누가 모를까.
불교의 기본사상 중 하나 아니던가.
“사람은 일정한 깨달음을 얻어 어떤 경지에 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경지에 올라 세상에서 얻을 게 더 이상 없을 때, 비로소 끝나게 되고요.”
“그래. 네 도는 높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기에 이 세상에 다시 온 것일 터. 내 생각엔 하늘이 네게 마지막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준 것 같구나.”
“……뭔진 모르지만 큰일을 막고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멈추라고요?”
“바로 이해했다. 도가 식으로 말하면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는 것이겠지.”
“저 오래 살고 싶은데요.”
“…….”
“실컷 즐기면서요.”
“…….”
빈말이 아니라 본마음이었다.
전생엔 아비의 뒤치다꺼리만 하느라 허리가 휘어 생에 대한 집착이 없었지만 현생은 다르지 않은가.
갈 데가 얼마나 많고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우화등선은 무슨.
현오가 그런 정광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 그의 눈이 깊어졌다.
“네 뜻이 그렇다 해도 세상이 널 가만 놔두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얘기하는 것이니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네 쓰임을 알고 미리 마음을 정해놓는 것과 닥치고 나서야 생각하는 건 천지 차이니라.”
“이제 말씀 끝나신 거죠?”
“……허허허.”
현오는 아쉬운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정광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꿀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그저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해줌으로써 조금의 도움이나마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좀 아쉽군…… 이런,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현오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정광은 감히 추측할 수도 없는 존재, 그런 그를 자신의 뜻대로 이끄는 것은 과욕이었기에.
‘하늘이 정해 그를 내려보냈고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모든 것은 오롯이 그에게 달린 것이지.’
현오는 미련을 털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할 말은 다했다. 네가 말 많은 늙은이를 만나 고생하는구나.”
“자오에 비하면 이 정도야 뭐. 좀 이따 나오세요. 주문해 놓은 아침은 드셔야죠.”
“흘흘. 알겠다. 마지막 잔치를 즐겨야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더 좋은 곳들이 있거든요. 나오신 김에 들리시죠.”
“지금까지 것들로도 충분하다. 그보다 항마주에 대해 듣고 싶은 것 아니었더냐?”
“그렇긴 하죠.”
“암자에 돌아가서 얘기해 주마. 따로 보여줄 것이 또 있느니라. 어허. 눈빛이 왜 그렇느냐? 춘화가 아니라 항마주와 관계된 것이야.”
“네. 네. 그럼 이따 봬요.”
정광이 돌아서려는데 현오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정광아. 본사로 돌아가는 길에 한 군데만 더 들러도 되겠느냐?”
“이러실 줄 알았다니까. 제가 맞춰볼까요?”
“본사에 딸린 전답을 일구는 시주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 살아왔는데 세상을 뜨기 전에 인사라도 하고 싶구나.”
“……소작농들을 만나러 가자고요? 진짜 그거예요?”
“그래. 그보다 중한 것이 어딨겠느냐.”
“……네. 그렇게 해요.”
방을 나온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후원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았다.
현오가 했던 얘기 중 머리를 간지럽히는 것이 있어서였다.
‘윤회라. 제법 그럴듯하단 말이지.’
불교사상에 기반해 생각해 보면, 정광의 환생은 수없이 많은 윤회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단지 이번 것은 전생의 혼뿐만이 아니라 기억까지 갖고서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남들보다는 높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윤회를 끝내기엔 애매해서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 건가.’
현오의 말처럼 이번엔 제대로 이뤄보라고 하늘이 수작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또 환생할 터.
‘그러든 말든.’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면 즐기며 살면 된다.
기억을 잃은 채 환생하면 어차피 전생을 모르니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고.
삶이 힘들든 괴롭든, 그건 그때의 그놈이 해결해야 할 몫인 것이다.
‘그게 도(道)지.’
도사로 태어난 죄로 어쩔 수 없이 배우고 곱씹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정광의 생각은 이랬다.
도(道)가 왜 ‘길 도’인가.
삶에는 수많은 길이 있어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중 하나, 또는 여러 개를 거쳐 걸어야 한다.
그 길은 중간에 막힐 수도 있고 다른 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걷다 지쳐 주저앉거나 방향을 바꿔야 할 수도 있고, 막혔으면 뚫어내어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한다.
‘결국엔 사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란 말이지.’
그 사람의 의지조차 하늘의 안배대로라면 할 말이 없고.
하늘이 그렇게까지 한가할 리는 없을 테니 그럴 리도 없다.
정광은 하늘을 바라봤다.
드넓은 푸른빛이 그의 눈을 가득 채웠다.
‘부를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승무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형! 식사 준비됐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응! 갈게!”
정광은 바위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생각들도 모조리 함께.
* * *
정광은 소림에서의 복장으로 돌아온 현오를 업고 신법을 펼쳤다.
어찌나 빠른지 그를 쫓는 백승무와 자오는 숨이 넘어갈 판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힘들어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현오였다.
“우욱. 조, 조금만 천천히 달려다오.”
“빨리 가야죠.”
“왜 마차를 반납한 것이냐?”
“거기서 반납해야 더 싸서요.”
“이, 이번엔 왜 내공을…….”
“아. 잊고 있었네. 이제 됐죠?”
현오는 엉덩이가 따뜻해짐과 함께 마음의 평안까지 얻었다.
자연히 목소리까지 평안하게 나오게 되었다.
“민초들의 삶을 본 적이 있느냐?”
“지나가다 조금씩요.”
“제대로 본 적은 없으렷다.”
정광은 전생을 떠올렸다가 지워 버렸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기준이지.’
사실 전생에서도 낱낱이 알았던 건 아니었다.
“잘 몰라요. 선사님이나 저나 큰 차이 없을걸요.”
현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선사라? 어르신 어르신 하더니 갑자기 왜?”
“아침부터 조금 스님처럼 보이셔서 그렇죠.”
“흘흘. 내 입적(入寂)해 부처님을 뵙게 되면 자랑을 해야겠구나. 네게 인정을 받았다고 말이다.”
“제게 며칠 동안 업히셨던 게 더 큰 자랑이 될 텐데요.”
“무어라? 그도 그렇구나. 허허허허.”
한동안 웃던 현오가 낮게 말했다.
“네 덕에 속세의 향락을 실컷 맛봤다. 그래서 그런지 소작하는 시주들을 만나기가 미안해진다.”
“그럼 소작료를 좀 깎아주세요.”
“최대한 낮은 소작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 이상은 힘들게야.”
현오의 말이 맞았다.
직접 도착해서 보니 상당히 볼만한 것 아닌가.
‘오오. 전답이 꽤 넓은걸.’
마을도 괜찮은 편이었다.
여느 소작농들의 것처럼 다 쓰러져 가는 흙집과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은 안 보였다.
작지만 깨끗한 집들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솔솔 올라왔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옷은 허름했지만 얼굴만큼은 밝았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지 않게 해주고 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
이리저리 꽉 막혀 속이 답답한 소림이었으나 이런 쪽만큼은 잘하고 있었다.
정주현 사람들 모두가 승복을 입었을 때의 현오를 깍듯이 대했던 것도 그래서일 테고.
연기에 섞인 구수한 밥 냄새를 맡자 식욕이 돋았다.
‘소작농들에게 인사를 한다고 했지? 시간이 좀 걸릴 터. 소림에 올라가 풀을 씹느니 여기서 먹는 게 낫지.’
정광 일행을 발견한 사람들이 경계의 빛을 띄우다 화들짝 놀랐다.
정광 때문이었다.
“……시, 신선?”
“……어, 어떻게 여기에…….”
정광은 몸을 돌려 등에 업은 현오를 보여줬다.
“소림사 선사님이 여러분께 인사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하나같이 합장하며 현오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불심이 보통 깊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광이 보기엔 좀 달랐지만.
‘존경심도 있지만 두려움도 섞여 있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들은 소림의 전답을 소작으로 부쳐 먹는 처지였다.
소림승에 대한 존경은 존경이고, 혹시나 밉보였다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는 두려움은 따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저 양반이라면 괜찮겠지.’
정광의 등에서 내려온 지 오래인 현오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것도 더없이 정중한 얼굴과 말투로.
“아미타불. 소림의 현오라 하오. 시주 덕분에 지금껏 생을 이어왔으나 곧 떠날 때가 되어 인사를 드리러 왔소이다. 부처의 가호가 시주께 함께하기를.”
“……아,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사님!”
감격에 겨워 정신없이 대답하는 이는 물론, 눈물을 터뜨리며 꺼이꺼이 우는 이도 있었다.
이제껏 소림이 잘해줬으나 이렇게 마음으로 다가온 적은 없어서였다.
이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소림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켜보던 정광은 혀를 찼다.
‘저 양반, 길을 잘못 들었어. 사이비 교주를 해야 했는데 말이야.’
그랬으면 상당한 성공을 거뒀으리라.
잘 먹고 편히 산 만큼 더 오래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응? 이건 또 뭐야?’
자그마한 꼬마가 쭈뼛쭈뼛 다가와 정광을 빤히 올려다봤다.
“왜?”
“……신선님이세요?”
“아니.”
“……그럼요?”
“도사 비슷한 사람.”
“……음. 신선님 같은데.”
“편할 대로 생각해. 무슨 일이지?”
한동안 머뭇거리던 꼬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축원 받고 싶어요.”
“선사님께 받지 왜?”
“음…… 양쪽 다 받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신선님이 훨씬 더 멋있으시니까 효과도 더 좋을 것 같고…….”
정광이 피식 웃자 꼬마가 급히 덧붙였다.
“저는 홀어머니밖에 안 계셔서 건강하게 잘 커야 해요. 제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데…….”
“어머니는 건강하셔?”
꼬마가 목을 움츠렸다.
“……엄청요.”
“잘못했다가 엉덩이 맞았을 때 덜 아파지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
꼬마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더듬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그냥 맞아. 그래야 단련이 되지.”
“……단련 안 해도 되는데…….”
“아. 무인이 아니었지. 그래, 그냥 받아라.”
정광은 격식 있는 자세와 말로 꼬마에게 축원을 내렸다.
꼬마는 기쁨에 찬 눈으로 소리치듯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신선님!”
“마보를 수련해. 그럼 엉덩이가 단단해져서 맞아도 덜 아플 거야.”
“……저 무인 아닌데…….”
“살아남으려면 어떤 수라도 써야지.”
정광이 아이의 더러운 머리를 대충 쓰다듬은 뒤 돌려보내는데.
주위에서 숨죽여 구경하던 꼬마들이 몰려왔다.
소림의 고승이라는 현오와 비교해도 격이 다른 정광 아닌가.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화려한 외모에 반한 지 오래인데, 한 아이를 축원해 주자 망설임이 사라진 것이다.
“신선님! 저도 해주세요!”
“저도요! 네?”
작지 않은 소란이었다.
현오와 함께 있던 부모들이 바로 눈치챌 만큼.
아이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게 된 부모들은 경악했다.
‘소, 소림의 고승께서 계신 자리에서 무슨 짓을!’
‘내 저놈의 자식을 그냥!’
사람들이 현오에게 사죄하는 한편 아이들을 끌고 가려 하는 그 순간.
현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이다. 부처께서도 태상노군과 친하실 것인데 무엇이 문제요? 어느 분께서 내려주시는 축원이든 가슴에 잘 품고 자신의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을.”
“……아아. 선사님.”
사람들은 현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꼬마들은 정광의 얼굴에서 실제로 빛을 보고 있었고.
이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잘 흘러가던 시간이…….
“크허허허헝!”
우렁찬 포효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