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하나 더
암기(暗器)와 독(毒)을 쓰면서도 의(義)를 표방하는 가문.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 상대가 숨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자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백배로 갚는 독종 중의 독종.
사천당가(四川唐家)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인식되는 당가였지만.
그런 그들조차 치를 떠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태상가주인 독존 당기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문에 폐란 폐는 다 끼치고, 나이가 들자 가문을 넘어 강호에 악명을 떨쳤다.
성품이 더러우면 약하기라도 해야지, 더럽게 강해서 손을 댈 수조차 없는 강자!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두들겨 맞고 자라온 동생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머리에 세월이 내려앉아 허옇게 셌다 해도, 그 마음은 절대로 변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 가지 목표를 공유하게 됐다.
힘으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저 망할 괴물보단 늦게 죽고야 말겠다.
죽어가는 그를 내려다보며 그간의 악행을 성토하리라.
이렇게 없어 보이면서도 원대한 꿈을 품고 칼을 갈아왔건만.
그들보다 더 불쌍한 이가 나타났다.
괴물이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를 거둔 것이다.
‘불쌍한 것…….’
‘전생에 어떤 업보를 쌓았길래 저런 꼴이…….’
정광의 말도 안 되게 뛰어난 자질이야 그렇다 치고, 상대가 뒷목을 잡게 하는 성품이라 들었지만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성품이 엉망이다 해도 당기황보다 나쁘진 않을 것 아닌가.
게다가 정광을 직접 대해본 가문의 청년들은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며 칭찬하기 바빴다.
심지어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한 가주 당영중마저 호의를 내비칠 정도였으니 노인들이 느끼던 동정심은 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만나니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칼자국 노인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정광을 위로했다.
“……네가 참 고생이 많구나.”
“네?”
“……조금만 더 참거라. 저 양반이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느냐.”
“아.”
정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당기황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끼어들었다.
“지금 내 흉을 본 거냐?”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만.”
“나 오래 살 건데?”
“가문과 천하를 생각해 주시오.”
“네놈보단 무조건 오래 살 거야! 어떤 수를 써서든!”
당기황이 소리를 빽 지르자 노인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사마련 무인들과 싸울 때보다 더.
‘상상하기조차 싫군.’
‘그냥 지금 죽여야 하나?’
십존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숫자 앞에서는 무력하다.
마침 가문 안도 아니고 외부에 있겠다, 마음이 동한 김에 그냥 확!
그들의 마음속에서 살기가 꿈틀거리려는 순간, 정광이 나섰다.
“태상가주님. 식사하는데 자꾸 소리를 지르시면 어떡해요.”
“도사 말이 맞다. 철월도 밥 먹는 데 집중하고 싶다.”
정광이 철월의 옆구리를 두들겼다.
“많이 드세요.”
“알았다 도사. 자장이! 한 그릇 더 부탁한다!”
“아, 알겠습니다.”
정광과 철월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당기황은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작은 한숨을 토했다.
“휴우. 내가 죽어야지. 늙었다고 괄시나 당하고 말이야.”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살핀 당가 노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정광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
동정심이 아니라 감탄으로!
망종 중의 망종인 당기황을 구박하다니.
이렇게 통쾌하면서도 감복할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무공은 또 어떻고.’
‘소문이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구나.’
창사와 부사의 시신이 말에 실려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긴 창과 흉악한 빛을 흘리는 쌍부(雙斧)도 함께였다.
당기황이 창사는 자신이 잡았다며 으스댔지만 아니었다.
정광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젓가락만 올렸다는 사실을 당 씨 남매가 폭로했다.
당기황이 아니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노인들의 입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그저, 기쁠 뿐이었다.
그들은 따뜻한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진옥룡이라니. 너무 과한 별호라 생각했거늘.’
‘전혀 그렇지 않아. 아니, 아주 딱 맞아.’
하나가 좋아 보이자 모든 게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에도 허허거릴 정도로.
“어르신들. 혹시 남는 독 있으세요? 입가심 좀 하고 싶어서요.”
“허허. 맹에 갔던 아이들에게 들은 대로구나. 먹고 품평을 해주겠다는 말이냐?”
“겸사겸사요.”
“어디 보자. 이건 어떻느냐?”
당가 비전의 독을 줄 수는 없는 일.
노인들은 손주들이 그랬듯 저마다 연구하고 있던 독을 꺼내 내밀었다.
정광은 그것들을 시식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걸.’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처럼 아주 알싸한 독들 천지였다.
노인들은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독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가문에서의 위치에 어울리게 많은 자금을 쓸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이 만든 독이니 손주들의 것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정광은 신중하게 아주 조금씩 맛보며 칭찬했다.
“역시 당가. 오늘 진짜 당가를 봤네요.”
노인들의 가슴이 펴졌다.
칭찬에 인색하다고 소문난 정광의 칭찬 아닌가.
게다가 정광은 적절한 평을 함으로써 그들의 간지러웠던 부분까지 긁어줬다.
‘세상에 이런 인재가 있다니.’
‘가주가 이 녀석은 물론 곤륜과 친우로 지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었구나.’
‘우리 애들과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 들었다. 가문의 복이로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시간이 갈수록 정광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당기황이 망설이다가 나섰다.
“흥. 독 같지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웬 소란이냐. 제자야, 이게 바로 독이란다.”
작은 병을 열자 찰랑거리는 맑은 액체가 보였다.
그것을 본 노인들이 대경하여 외쳤다.
“지금 뭐하는 짓이오!”
“아직도 무형지독(無形之毒)을 만든답시고 삽질을 하고 계셨소이까!”
“그 불안정한 것을 이리도 쉽게 꺼내다니. 당장 넣으시오!”
그때, 정광의 손이 신비한 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곤륜 비전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였다.
‘어?’
당기황은 자신의 빈손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당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뺏겨 버린 것이다.
마음먹고 피했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뺏기진 않았겠지만 과연 몇 수나 그럴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었다.
‘……뭐 내 장기는 금나수가 아니니까.’
당기황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무색무취무미무형(無色無臭無味無形). 이른바 무형지독(無形之毒)이라 하지.”
노인들이 입을 모아 야유했다.
“허풍은!”
“정광아, 악귀의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무형지독은 개뿔, 하자투성이야. 당장 버리거라.”
“이놈들이 진짜! 뭐가 어째!”
당기황과 노인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키웠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맑은 액체를 주시했다.
‘무형지독이라…….’
색도 향도 맛도 모양도 없어 그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고, 당하는 순간 바로 절명(絶命)하게 된다는 전설의 독.
‘……그게 가능해?’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즉사하는 독성은 제쳐놓고, 물도 향과 맛이 있는데 독으로 어찌 그런 걸 만든단 말인가.
당예지가 만든 현인독(賢人毒)이 그런 속성을 갖고 있으나 약간일 뿐이다.
독한 술에 섞었고, 후위진의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으며, 홀로 있다는 안도감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 한번…….’
정광은 코를 킁킁거렸다.
아주 미세한 구린 향과 함께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후각이 예민한 정광이니까 알았지, 웬만한 이라면 연유도 모른 채 쓰러졌으리라.
‘완전 엉망은 아닌가 본데.’
그럼 일단 챙겨야지.
마개를 닫고 아주 자연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다른 노인들에게 받은 것도 꽤 되는지라 가슴이 불룩해졌다.
‘응?’
어느새 대치를 푼 당기황과 노인들이 어이없는 얼굴로 정광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아주 자연스럽게 넣는구나.”
“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아야죠.”
당기황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이 기분 좋게 외쳤다.
“바람도 찬데 그만 가시죠. 어르신들의 뼈마디는 소중하니까요.”
* * *
정광 일행은 당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가장 돋보이는 건 창사의 제자인 우이정의 활약이었다.
잠시 정광에게 끌려갔다 온 그는 아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생포된 사마련 무인들에게 쌍욕을 먹으면서도 꾸준히 설득했고, 그의 적절한 행동이 포함된 설득은 그들을 광명정대한 정파로 전향시켰다.
물론 무인답게 끝끝내 버틴 이들도 있었으나…….
‘당가에 도착해서 환영을 받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겠지.’
당가는 일반적인 정파와는 결이 다른 만큼 독으로 환영할 게 뻔했다.
그리고 우이정 역시 일반적인 사파와는 결이 달랐다.
아주 많이.
“어르신. 장이 소협이 사슴고기를 아주 맛깔나게 구웠습니다. 몇 점 가져왔으니 좀 드시지요.”
“……자네. 사파치곤 참 사근사근하군.”
“하하. 정(正)과 의(義)를 접했으니 사람이라면 변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술도 준비할까요?”
우이정은 당기황과 당가 노인들을 극진히 모셨다.
무혈단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찌나 열정적인지 차마 거절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광은 그의 언행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탑극랍마간 사막에 던져놔도 혈사풍 놈들과 어울려 살아갈 놈이네.’
경멸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꽤 높은 평가를 하게 되었다.
‘적절히 통제하면 쓸 만한 녀석이야. 밥값을 할 때가 오겠지.’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정광도 몰랐다.
아니, 아예 안 올 수도 있었다.
‘뭐 그럼 그런 거고.’
정광은 머릿속의 생각을 지웠다.
대신 눈앞에 있는 풍경에 집중했다.
‘제법 운치 있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근처.
강을 끼고 자리한 마을이 보였다.
그리 크진 않았으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장원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게 그 유명한 당가타(唐家陀)인가.’
강호에서는 당 씨 일족이 모여 사는 마을을 당가타라고 불렀다.
정광 일행이 당가에 도착한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걸.’
손끝까지 뒤덮는 짙은 녹의(綠衣)를 입고 크고 작은 주머니를 찬 무인들이 곳곳에서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탄 정광 일행을 발견하자 당황한 기색 없이 사방으로 소식을 전했다.
정광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괜찮은 대응이었다.
얼마 안 가 마을 중앙에 있는 거대한 장원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는 차가운 기세를 풍기는 사내가 있었다.
당가의 가주 당영중이었다.
그의 입에서 딱딱하면서도 웅장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당가에 오신 걸 환영하오, 무혈단!”
무혈단원들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포권했다.
당가의 가주가 직접 나와서 환영하다니.
그들같이 새까만 후배들이 받기에는 과도한 예였다.
물론 정광은 담담했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잘 계셨어요?”
“덕분에. 허청 도장은 잘 계신가.”
“아마도요.”
당영중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당가 노인들에게 예를 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오, 가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외다.”
칼자국 노인이 대표로 말했다.
그를 포함한 당가 노인들은 질자(姪子)인 당영중을 정중하게 대했다.
가주의 권위를 존중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당영중이 그 점을 지적했다.
“아버님께서 안 보이시는군요. 어디 가셨습니까?”
“조금 전에 사라졌소. 가주에게 켕기는 점이 많아 그랬을 것이외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주야말로…….”
그들은 서로를 위로한 뒤 정광 일행을 안내했다.
정광은 장원 내부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돈이 많은 만큼 많이도 해놨네.’
사방에 진(陣)이 깔려 있었다.
후위진이 급조해서 깐 사마련 섬서 지부의 것들보다 훨씬 나은 수준의 것들이었다.
‘생각보다 더 저력이 있을지도.’
우이정과 생포된 사마련 무인들은 장원 구석으로 끌려갔다.
무혈단과 철월은 좋은 숙소를 배정받았다.
당영중이 눈짓하자 노인들이 흩어졌다.
홀로 남은 정광은 당영중의 집무실로 가게 됐다.
안에 들어가 앉자마자 당영중이 물었다.
“제갈 군사에게 서신은 받았네. 사마련 사천 지부를 몰아낼 생각인가?”
“네.”
“……쉽지 않을 텐데.”
당영중이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리자 정광이 덧붙였다.
“하나 더 있는데요.”
“……하나 더?”
정광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당가를 사천제일(四川第一)로 만들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