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연화(煙火)
전생에만 해도 정광을 거부한 여인은 많았다.
어미가 그를 거부한 건 그렇다 치고, 유모가 되려는 여인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천마신교 소교주의 유모를 모집한다 하면 청운의 꿈을 품은 여인들이 구름처럼 몰리기 마련.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으로 태어나, 훗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자리에 오르게 될 존재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다.
그 소교주를 가까이서 보필할 수 있는 자리.
천마신교도라면 누가 그 자리를 탐하지 않겠는가.
분명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랬으나. 아니, 전대 교주의 때였다면 분명히 그랬겠지만.
정광의 아비가 교주인 그때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아비는 천마신교의 역대 교주 중 무공이 제일 약하다고 평가받던 한량.
언제 역천(逆天)이 벌어질지 모를 판이었다.
역도들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정광을 제거하려고 할 것은 뻔한 일.
괜히 가까이 있다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랐다.
목숨을 걸고 유모가 되려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지.’
정광은 전생에도 천재 중의 천재였기에 아주 어릴 적의 일들도 모두 기억했다.
‘첫 번째 유모는 강제로 끌려와서 일하다가 자객에게 죽었고.’
두 번째 유모는 사주를 받아 정광을 죽이려고 왔다가 아비의 손에 죽었다.
‘하북성에서 돼지가 사술을 펼쳤을 때 나왔던 셋째 유모도 강제로 나를 떠맡았었지만…….’
원체 온유하고 정이 깊은 여인이어서 그랬을까.
정광을 아낌없이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보필했다.
그 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고…….
결국, 그 대가를 받게 됐다.
자객으로부터 정광을 지키려다가 대신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적당히 도망가지 괜한 짓을 해서…….’
유모가 이렇다 보니 시비가 되려는 이도 없었다.
강제로 하게 되거나 정광을 암살할 목적으로 오는 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셋째 유모처럼 정을 붙이게 되거나 무슨 수를 써서든 정광을 죽이려 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정광이 힘을 가지게 될 때까지 끝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던 것들은 죽어 마땅하나 아닌 이들이 문제란 말이지.’
유족들에게 나름 챙겨주긴 했지만 개운치가 않았다.
죽으면 돈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본인이 받은 것도 아니고 유족이 받았을 뿐이니 관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흉수는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죽여 버렸지만 부족해.’
그놈들의 더러운 피 따위로 그녀들의 넋을 위로할 순 없었다.
위로가 됐다 해도 이미 죽어버린 그녀들은 돌아올 수 없었고.
‘뭐 독기가 있는 이들이니까 선계(仙界)에 있든 구천(九泉)에 있든 그때보단 잘 있겠지.’
정광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혜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미 모래가 되어버린 여인들의 얼굴이 그녀 위에 겹쳐졌다.
그 시선을 오해한 혜진이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진옥룡,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네?”
“잠시만 나가주시겠습니까? 어르신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냥 말하세요. 밖에 나가도 다 들을 수 있으니까.”
“…….”
“아. 그냥 나가서 듣고 못 들은 척할까요?”
“……차라리 그게 낫겠군요.”
“네.”
정광은 보현전 밖으로 나갔다.
밖을 지키고 있던 여승들과 눈인사를 하는데, 저 먼 곳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청신이 보였다.
그는 정광과 시선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 외쳤다.
“무슨 얘기를 그리 길게 했는가!”
“아직 안 끝났는데요.”
“……무어라?”
“안에서 부르면 다시 들어가야 하거든요. 꽤 걸릴 것 같으니 숙소로 돌아가셔서 한숨 주무시죠.”
청신은 부들부들 떨며 정광을 노려봤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보현전에서 들리는 대화에 집중했다.
어떤 대단한 이유로 저리 빼는지 궁금했다.
얼마 안 가 정광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뭐야. 별것 아니잖아.’
정말 별것 아니었다.
혜진은 자신을 키워준 아미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떠나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정광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언행이었다.
‘아니. 본심은 나가고 싶으면서 왜 쓸데없이 정을 들먹여.’
본인이 가장 중요한 데 왜 남을 신경 쓴단 말인가.
그것도 아미에서 먼저 나가라고 하는데.
‘어찌 됐든 빨리 좀 끝내라. 나도 들어가서 한숨 좀 자게.’
혜진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명을 거둬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그녀를 설득하던 대정이 지쳐서 정광을 불렀다.
정광은 들어가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가고 싶죠?”
“…….”
“그런데 정도 들었겠다, 혹여나 소저가 잘못되면 아미파에 피해가 갈까 봐 두려우신 거고.”
“…….”
정광은 명쾌하게 정리했다.
“잘못되지 않으면 되죠. 힘을 키우세요. 그러려면 실전을 많이 경험하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가셔야죠. 이해하셨죠?”
“……그렇게 쉬운 얘기가…….”
“강해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게 무인 아닌가요?”
“…….”
“정리할게요. 강해져야 죽지 않는다. 죽지 않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어쨌든 강해져야 하죠?”
궤변 같지만 맞는 말이었다.
“최선을 다해 강해지면서 죽지 않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혹 죽더라도 아미파는 강해요. 소저의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그 후폭풍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장문인, 추임새 좀 넣어주시죠.”
“음…….”
“어? 정말 황제의 딸?”
“…….”
“그게 뭐 대단하다고.”
“……!”
“황제라고 칼로 쑤시면 안 죽나…….”
“아미타불! 진옥룡,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네. 그만하게나.”
“장문인께서가 아니라 혜진 소저가 이해하셔야 하는데.”
혜진은 입을 떡 벌리고 정광을 바라봤다.
이런 광인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힘이 있어서구나. 그래, 힘이 있으면 돼.’
강호에서는 힘이 곧 논리다.
그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바라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제가 천하제일인이 되면 되는 것이군요.”
“그건 안 되는데. 천하제이…… 이것도 안 되네. 천하제삼…… 아. 사제도 있지. 그냥 십존 정도를 목표로 하시죠.”
혜진은 정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십존’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십존. 내가 그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자신을 버린 그 사람 앞에 당당히 서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껏 키워준 아미파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도움을 주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 지금밖에 없어.’
혜진의 눈빛이 단단하게 뭉쳤다.
탈진해서 기절했다가 깨어난 사람으로는 안 보일 정도로.
그 단단한 눈빛 너머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질 때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정광은 혜진을 무혈단원으로 받아들였다.
단원 선발은 단주의 권한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미타불. 아미의 혜진이라 합니다. 함께하게 돼서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단원들도 그녀를 환영했다.
심지어 단원은커녕 포로 신분인 철월마저.
살짝 벌게진 얼굴을 보면 그 이유는 뻔했다.
혜진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곧 떠날 테니까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대략 언제쯤으로 예정되어 있습니까?”
“글쎄요. 연락이 와야 확실히 알 수 있어서요.”
정광이 아리송하게 대답했지만 혜진은 일단 받아들였다.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터.
그 전에 동료가 된 이들을 더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언 소저가 있어서 다행이야.’
어린 소녀일 때부터 아미파에서 자란 혜진이었다. 사내는 아무래도 불편하던 터라 같은 여자인 언의진에게 묻는 것이 편했다.
“무혈단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피를 흘리지 않고 사마련의 지부들을 들쑤셔서 사마련주를 끌어내는 거예요.”
언의진은 시원시원한 성격만큼 대답도 명쾌했다.
허나 듣는 혜진으로서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구룡사봉 중 여럿이 포함되어 있다곤 하나, 겨우 십여 명인 인원. 후기지수의 모임일 뿐이다. 그게 가능할까?’
언의진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단주가 그렇게 말했으니 되겠죠.”
“……그렇다면 사마련주를 끌어낸 뒤가 문제겠군요.”
“아. 보나 마나 단주 혼자서 죽일 작정일걸요.”
“……네?”
“저 성격에 설마 합공을 하자고 하겠어요? 혼자 달려들어서 빨리 끝내려 하겠죠.”
혜진은 입을 살짝 벌렸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게 너무 놀라워서였다.
“……사마련주를 홀로…… 단주를 신뢰하시는군요.”
“어쩌겠어요. 이제껏 쌓아온 것들이 있는데. 가균에, 창……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하겠지만 가능할 것도 같아요. 뭐라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소문으로는 들었습니다만. 단주가 그렇게 강합니까?”
“그건 앞으로 직접 보시면 되고…… 언니. 저보다 나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씀 편하게 하시죠.”
“네?”
“한 식구가 됐는데 너무 딱딱하잖아요. 그렇지. 입단한 기념으로 비무나 한번 해요. 네?”
언의진은 스스로 서열을 정리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자유분방한 아미의 속가 제자들에게 단련된 혜진이었으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미타불. 언 소저가 농을 하는 것이니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공우 스님. 농 아닌데요. 그럼 스님이 하실래요?”
“그보다 무혈진(無血陣)에 익숙해지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맞다.”
언의진이 수긍하자 공우가 혜진에게 부탁했다.
“연무장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으나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무혈진이라는 것. 지금처럼 적은 인원으로도 펼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단주가 인원의 변동에 따라 여러 변형을 만들어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주? 단주가 만들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지요. 어서 가시지요. 소승은 준비됐습니다.”
혜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게 되었다.
정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허황되다 생각했건만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니, 소문이 오히려 부족했다.
‘이런 신묘한 진이 있나. 정말 대단하구나.’
정광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혈진은 몇 개의 원칙만 지키고 따르면 수많은 변형으로 펼칠 수 있는 절진(絶陣)이었다.
단원 개개인의 능력도 놀라웠다.
‘고룡과 권봉의 명성이야 익히 들었지만 듣던 것보다 더 뛰어나구나.’
정광의 사제 백승무도 훌륭했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들었는데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성의 청수검(淸秀劍)을 꺾은 게 요행이 아니었어.’
게다가 경험도 풍부했다.
백승무는 강호 경험이 없다시피 한 그녀에게 갖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덕분에 혜진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정광에 대한 주의사항은 이해가 안 갔지만.
“언니. 단주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도 그러려니 하세요.”
“아미타불. 손속이 과해도 협에 어긋난 적은 없으니 제지하지 말고 지켜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형은……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뭐 어찌 됐든.
아미산이 높다 해도 천하보다 높을까.
좁은 곳에 갇혀 있던 혜진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럴수록 갈망은 더 커졌다.
‘나가고 싶어. 빨리 더 넓은 곳으로.’
한편, 아미파는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장문인인 대정은 아미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사마련 무인들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본파를 드나드는 참배객에게 해를 끼치거나 위협하면 모든 걸 걸고 맞설 테니 그리 아시오.’
이는 본산제자는 물론 속가제자까지 동원해 싸우겠다는 의미.
사마련 무인들은 인상을 쓰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참배객 중엔 속가제자의 친인척도 많은 상황.
명문가의 식솔인 그들을 건드렸다간 많은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어차피 모르는 척할 계획이었으나, 대정의 이 말에 오히려 도움까지 주게 되었다.
마차가 진창에 빠져 움직이지 못할 때 달라붙어 밀어주거나 방향을 잘못 잡은 이들에게 길을 알려주기까지.
행여나 자신들과 있다가 사고가 나면 오해를 받을 게 뻔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양측 모두 바쁜 가운데 사흘이 지났다.
* * *
‘여기까지군.’
정광은 탁자 위의 풀들을 씹다가 탄식했다.
아무리 맛깔스러워도 풀은 풀이었다.
정광이 참을성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미의 속가제자들을 의식해 점잔빼던 철월마저 슬슬 밥투정을 하려는 기색이었다.
‘근처 촌락에 가서 밥을 얻어먹어야 하나.’
정광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식당 밖에서 한성의 고함이 들려왔다.
“진옥룡! 어서 나오시게! 드디어 왔네!”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정광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식당 밖에 있는 한성의 앞에 나타났다.
“헉! 이, 이런 신법이 있다니!”
한성이 놀라든 말든 정광은 북쪽을 노려봤다.
대략 백리 정도의 거리였다.
녹색 연기가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당가의 상징 백리연화(百里煙火)!
아미파가 타종을 이어서 함으로써 소식을 전했듯이, 당가는 백리연화를 봉화처럼 이어서 피움으로써 소식을 전달한 것이다!
‘독존이 날뛰다가 견디지 못하고 터뜨렸군. 여기까지 신호가 이어졌으니 대략 반 시진쯤 지났으려나?’
이제 출발할 때였다.
“무혈단.”
“네!”
“가죠.”
“네! 단주!”
무혈단이 움직였다.
새롭게 합류한 혜진과 함께.
그리고 그 뒤를 아미파가 따랐다.
당황한 청신이 영문도 모른 채 청성 제자들을 이끌고 합류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