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289
2부 18화
도사답게
검이 아니라 숫자를 휘두르는 모용상현은 진정 고수라 할 만했다.
좌르륵-
정광에게 줬던 금원보를 몽땅 회수했다.
파라락-
정광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전표들 중 상당수를 털었다.
파르르-
정광의 눈꺼풀이 세차게 떨렸다.
단 한 푼도 깎아주지 않고 모조리 받아내는 무자비한 손속이라니!
“음. 이제 됐소이다.”
모용상현이 셈을 끝낼 때까지 정광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미 약조했던 것 아닌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좋게 생각하자. 좋은 쪽으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재료들을 손쉽게 구한 게 어디야. 그것도 상당히 싸게.’
그래도 아까웠다.
마음이 가라앉긴커녕 솟구쳐 오르려는 그때!
모용상현이 장차 대협이 될 만한 자질을 보였다.
“단주. 너무 아까워하지 마시오. 그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소이다.”
“차라리 약재값을 더 깎아주시죠.”
“그게 낫겠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역시 비룡이시네요! 그런데 그 선물이란 건 뭐죠?”
“이것이오.”
모용상현은 팔뚝만 한 목함을 들고 덮개를 열었다.
축축한 이끼 속에 큼지막한 삼(蔘)이 묻혀 있었다.
“오. 꽤 큰 삼이…… 응?”
곤륜비전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
정광은 목함을 냉큼 낚아채고 감사를 표했다.
“호의로 준비한 선물을 거절하는 건 강호의 도리가 아니죠. 감사합니다.”
“…….”
모용상현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가 그러든 말든 정광은 삼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화아아악-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광의 입꼬리가 휘었다.
“이거, 장백삼(長白蔘) 맞죠?”
아니면 정말 실망할 거란 눈빛으로 묻자 모용상현이 크게 웃었다.
“하하. 단주라면 알아보실 것 같았소. 맞소이다. 마음에 드시오?”
“물론이죠.”
진심이었다.
모용세가가 보유하고 있는 영초나 영물 목록에서 말도 안 되게 비싼 것들은 나중에 한번 말해보려 했거늘.
그것들 중에서도 희귀한 장백삼을 주다니!
그것도 선물로!
‘서책에서나 봤던 건데. 생김새며 향이며 적혀 있던 그대로네.’
효능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영초라 불릴 자격이 있는 녀석이야. 조금 과한 감이 있는데.’
아무리 모용세가라 해도 그렇지.
쉽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예 대놓고 물었다.
“가주님께서 주신 거죠? 대공자를 구해 드린 보답은 저 약재들로 하셨는데. 제게 뭘 원하시길래 이러실까.”
“아니오. 내가 드리는 것이오.”
의외의 대답에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공자의 권한이 그렇게 클 것 같지는 않은데요.”
가주도 아닌 자식 놈이 이러면 살림살이가 남아나겠는가.
모용상현도 인정했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내가 훗날 가지게 될 권리에서 장백삼만큼 빼기로 했소이다.”
“네?”
모용상현은 몸을 곧게 세우며 당당하게 설명했다.
“단주에게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오. 내 목숨값은 내가 직접 치러야 하지 않겠소?”
“…….”
때맞춰 해를 가리고 있던 구름이 움직였다.
밝은 햇빛이 쏟아져 내려 모용상현을 빛냈다.
비룡(飛龍) 모용상현.
그가 정광의 마음속에서 구룡사봉의 수좌(首座)에 올랐다.
‘꽤 쓸 만한 녀석이잖아.’
그런데 모용상현은 거기에서 멈출 인재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과신하는 건 아니나, 내 목숨값이 장백삼보다는 비싸다고 생각하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게 정확하겠지.”
“…….”
“훗날 그만한 자격을 얻어 그만큼 더 드리고 싶소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오.”
“……!”
스스로 가치를 높이고 기필코 올라갈 거라 맹세하는 모습이라니.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모용상현의 눈빛과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놈 보게.’
정광은 그제야 깨달았다.
모용세가와 요녕성을 이끌어갈 인재는 비룡 모용상현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대공자님, 힘내세요!”
“하하. 단주는 푹 쉬시오. 아까 수아가 가주께 가며 나보고도 빨리 오라 했으니 그만 가보겠소이다.”
정광은 멀어져가는 모용상현을 보며 무운을 빌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깨끗한 천 위에 수북이 쌓인 것들을 다시 확인했다.
약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추가로 요구했던 다른 것들도 있었다.
‘좋아. 시작해 볼까.’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것들을 구경하는 혜진에게 청했다.
“소저. 저 좀 도와주실래요.”
“아.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정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후원으로 옮기죠.”
* * *
뚝. 뚝. 뚝.
혜진의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훅. 훅. 훅.”
그녀의 입에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파파파파파-
전부 이 망할 놈의 부채질 때문.
혜진은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정광이 나무랐다.
“박자가 느려졌어요. 불길이 약해지면 안 되는데.”
“주의하겠습니다.”
파파파파파-
불길이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이 이맛살을 좁혔다.
“조금씩 빨라지네요.”
“주의하겠습니다.”
파파파-
정광의 주문은 무척 까다로웠다.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 중 하나인 혜진이 힘겨워할 만큼 강하면서도 일정한 화력을 요구했다.
부채질하다가 잔소리 듣고.
또 부채질하다가 또 잔소리 듣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자 정광이 무거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탕약 달이는 게 우스워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미산에서 검을 수련하실 때도 이렇게 대충하셨어요? 제대로 집중해서 하셔야죠.”
정광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검을 잡아야 무공을 수련하는 게 아니에요. 진정한 무(武)는 생활 속에서 수련하는 법. 부채가 검이요, 검이 곧 부채라. 무엇을 쥐든 검이라 생각하세요.”
“아! 그런 의도로 이걸 시키신 겁니까?”
“겸사겸사요.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들 하는데 모자라도 안 되는 건 마찬가지죠. 중도(中道)를 지키며 쭉 가세요. 그래야 영단이 잘 나오니까. 소저 몫도 있는 거 아시죠?”
생활 속의 수련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말보다 ‘소저 몫도 있는 거 아시죠’라는 마지막 말이 혜진의 의욕과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맡겨주십시오. 제대로 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정광도 놀지는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땔감을 밀어 넣고 때를 가늠하며 탕약을 휘저었다.
역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정광은 찡그린 얼굴로 그 향을 맡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량형이라 그런 건가? 이런 냄새가 아니었는데.’
진공묘유환(眞空妙有丸)은 향긋해야 하거늘, 이건 역하지 않은가.
‘좋은 약은 입에 쓰기 마련이니 냄새도 그렇겠지.’
몇 가지 약재를 추가하고 더 강한 화력으로 오랫동안 달여서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먹어보면 알게 될 건데 뭐.’
어둑어둑한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달이자 탕약이 잔뜩 졸아 걸쭉해졌다.
정광은 혜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수고하셨어요. 잠시 쉬세요.”
“……잠시 말입니까?”
“네. 잠시.”
정광은 화로의 불을 끄고 탕약을 식혔다.
탕약이 굳어가자 내공을 끌어 올려 손으로 조몰락거렸다.
얼마 안 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단약들이 완성됐다.
정광은 그것들을 ‘신진공묘유환(新眞空妙有丸)’이라 명명했다.
“하나는 됐고. 다음으로 가죠.”
“……!”
혜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재료들을 다듬었다.
그것들을 적절히 배합해 솥에 쏟아 넣었다.
거기에 물을 붓고 화로에 불을 붙이자 혜진이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잡았다.
정광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
“더 쉬셔도 될 것 같네요.”
“네?”
“소저보다 쌩쌩하신 분이 오셨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
자오가 나타났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주, 늦어서 죄송합니다.”
“좋은 눈을 하고 계시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싸움에서 승리한 무인의 눈에선 빛이 나죠. 패배를 안겼던 상대에게 설욕하면 몇 배는 더 밝아지고요. 결국 이기셨나 보네요.”
정광의 말에 자오가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혜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기다니요? 대협, 비무를 하고 오신 겁니까?”
“비무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려. 이공자와 삼공자를 물리치고 오는 길이외다.”
“네?”
자오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제는 꽤 오랫동안 자제해 오다 말하게 돼서 그런지 혀가 제대로 안 풀려 고전했지만 오늘은 아니었소. 두 사람의 호기심을 조금만 충족시킬 정도로만 말하며 조급하게 만든 뒤 일거에 휘몰아쳤소이다. 계단을 차근차근 쌓아 올려 상대가 심력을 낭비하게 한 뒤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고 할까.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자오. 이리 오셔서 부채질 좀 하세요.”
자오는 아까의 혜진처럼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부채질하게 됐다.
그가 힘겨워하면 혜진이 이어받고, 혜진이 지치면 자오가 교대하길 수차례.
정광도 연단(煉丹)하는 도사답게 진지하게 임했고…….
마침내 단약이 완성됐다.
정광은 그것들을 살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정광이 내민 신진공묘유환 때문이었다.
“자오. 진공묘유환 아시죠?”
“……!”
자오는 정광에게 다른 영약을 받았었지만, 진공묘유환이 무엇인지는 백승무를 통해 몇 번이나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이게 그것입니까?”
“음. 그것보다 더 강한 거예요.”
“……!”
“하나씩 받으세요. 어서요.”
“…….”
자오가 떨리는 손으로 단환을 받았다.
혜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하며 하나를 챙겼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두 분은 토양을 깨끗하게 하고 정순함을 높여야 해요. 이게 도와드릴 겁니다. 내일 아침, 공복에 드세요.”
내친김에 오랜만에 두 손을 모으며 덧붙였다.
“무량수불. 버린 만큼 얻으시길.”
“…….”
그 의미를 아는 자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혜진이 그에게 연유를 묻는 사이, 정광은 단약들을 챙겨 방에 들어갔다.
비어 있는 안을 보니 방 주인인 모용상현이 생각났다.
‘이래저래 머리 아픈가 보네.’
모용수수야 거처가 따로 있으니 그렇다 치고.
‘모용상현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정광이 어떤 영약을 만들어내는지 알아내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재료들을 다 안다고 만들 수 있으면 그게 영약이겠는가.
배합 비율과 연단 방법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만들 수 있었다.
‘……모용세가주가 대흥장에서 있었던 일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겠지. 그 전부터 수상한 점이 있었던 것일지도.’
정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웬만하면 요녕성의 권력 구도가 그대로 흘러가 삼십 년쯤 후에 모용상현이 가주가 되면 좋을 텐데.’
잿더미가 되어버린 조양사(朝陽寺)도 문제였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억울하지 않은가.
‘어? 왔네.’
잠시 뒤, 모용상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방에 들어왔다.
“오셨어요? 늦으셨네요.”
“어쩌다 보니 그리 됐소이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모용상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흘 후 작은 행사가 있소. 본가가 요녕에 터를 잡고 축성(築城)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오.”
“방계 분들과 호족 분들도요?”
“그렇소.”
“대흥장에서도 오시겠네요.”
“……그렇소이다.”
“작은 행사가 아니네. 그런데요?”
모용상현의 눈이 깊어졌다.
“단주께서는 언제 떠나실 생각이오?”
“글쎄요. 내일?”
모용상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잘됐구려. 내 생각에도 그게 나을 것 같소.”
정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렸다.
“사흘이나 나흘 후에 갈 수도 있고요.”
“…….”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만 가서 쉬세요.”
모용상현이 복잡한 눈빛으로 정광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여기가 내 방이오만.”
“그러게요.”
“……하긴. 며칠 다른 방에서 잤더니 이젠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드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모용상현이 피식 웃으며 포권했다.
“그럼 내일 봅시다.”
“푹 주무세요.”
모용상현이 떠나자 정광은 볼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흘 후란 말이지.’
어차피 약효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했다.
그때 가서 상황을 보고 어찌할지 정하면 될 터.
정광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신진공묘유환을 복용한 자오와 혜진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보다 일찍 먹고 마무리까지 끝낸 정광은 홀로 방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신진공묘유환은 기대 이상이고. 뭐를 먼저 먹는 게 나으려나.’
새로 만든 영단과 장백삼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가 마음을 정했다.
‘역시 이놈이 더 끌린단 말이야.’
정광이 택한 건 장백삼이었다.
서책으로만 접했던 것인지라 영단으로 만들지 않았다.
괜히 이것저것 섞었다가 효능이 떨어지면 얼마나 아깝겠는가.
‘이쯤은 빼도 되겠지.’
장백삼에서 잔뿌리들을 떼어내 술병에 넣고 휘휘 돌렸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이 술 냄새를 머금고 확 올라왔다.
그냥 산삼주도 아니고 장백삼주(長白蔘酒)!
그 이름에 걸맞는 향이었다.
‘좋은 선택이었어.’
자신이 마시든 팔아먹든 그만한 값어치를 할 게 분명했다.
‘그럼 본체를 먹어볼까.’
술병을 다시 밀봉하고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뚜둑- 뚜둑-
정광은 도사답게 가기로 했다.
도사 하면 생식!
입을 크게 벌려 장백삼을 씹어 먹었다.
와작!
‘……!’
정광의 눈이 커졌다.
바로 효능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장백삼은 정말 더럽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