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19
2부 48화
일기당천(一騎當千)
운룡은 신검(神劍)이라 불리고도 남을 명검.
모용강도 익히 들어 잘 아는 사실이었다.
동방장이 허공에서 신형을 돌리자 드러난 정광을 보고 경악했던 그는 내지르던 검을 놓고 급히 몸을 숙였다.
서걱-
나름 명검이라 할 수 있는 그의 검이 깨끗이 절단됐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잘린 건 검뿐만이 아니었다.
정수리를 덮고 있던 머리털도 함께 날아간 것이다.
‘이 정도일 줄이야!’
동방장은 정광을 업은 채 모용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바닥에 내려섰다.
그는 듣는 사람이 안쓰러울 만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 헉. 주군. 내려.”
“편했는데.”
“나는 안 편하니까 내리라고!”
동방장은 안 편한 정도가 아니라 당장 드러눕고 싶었다.
낭왕과의 치열했던 격전 후 사흘 동안 푹 쉬고 출발한 것까진 좋았다.
정광의 지론대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선에서 질주하는 것 역시 괜찮았다.
허나 그러면 뭐 하는가?
결국엔 이 꼴이 됐는데.
‘모용세가 본가의 피해를 되도록 줄이는 게 좋으니까 우리만큼은 빨리 가자고?’
말이야 옳았다.
거부할 힘도 없어서 따랐고.
헌데 업고서 뛰라고 할 줄이야!
거세게 반항하다가 주먹에 설득돼 죽어라 뛰었다.
그런 고난의 시간을 보내다가 성에 거의 이르렀겠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애원하는 그때 하필이면 화광이 충천하다니!
동방장은 정광 뒤에 주저앉으며 선언했다.
“훅. 훅. 나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주군이 알아서 해.”
“그러기엔 좀 많은데.”
정광은 모용강과 성문 통로를 꽉 메우고 있는 척사당 무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한번 해보죠.”
“일단이 아니라 계속! 쭈욱!”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하로부터 새 검을 건네받은 모용강이 포효했다.
“진옥룡! 네놈 혼자 가능할 것 같으냐!”
“천하유람단주인데요.”
“시끄럽다! 천하가 아무리 넓어도 검에서 황금빛 광채를 뽑아내는 이는 너밖에 없어!”
모용강의 말대로 웬만한 이들은 정광의 정체를 눈치챈 상태였다.
동시에 경악하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궁술은 직접 봤지만 검술 또한 그에 못지않구나!’
‘비록 기습이었다 해도 당주(堂主)를 단 일검으로 이렇게 만들다니!’
‘운룡이라 했지. 저런 신검을 무엇으로 상대한단 말인가?’
마치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정광이 움직였다.
‘……!’
단 한 발자국이었다.
짧지만 막대한 기세가 실린 그 걸음에 모용강과 척사당은 일제히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다시 한 걸음.
‘……!’
또 한 걸음.
‘……!’
정광은 단 세 걸음으로 성문 통로를 탈환하고 빙그레 웃었다.
“제가 누구든 간에 중요한 건 이거죠. 뚫느냐, 막느냐. 아.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에 주저앉아 지켜보고 있던 동방장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크크크. 뭐야 이게? 말이 돼? 진짜 혼자 알아서 할 것 같잖아.”
정광의 위엄에 감탄해서 나온 웃음이었으나 모용강과 척사당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저놈이 감히!’
‘우리를 놀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방장의 표정이며 말투며 좀 얄미워야지.
상대를 칭찬해도 비꼬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타고난 재능이랄까.
모용강이 살기를 쏘아냈다.
“동방장! 다음은 네놈이다!”
“이거야 원. 화낼 힘도 없네. 주군부터 처리하고 와. 그럼 놀아주마.”
동방장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거만을 떨자 모용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분노를 삼켜야 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뒤에서 계속 밀려오던 수하들이 성문 통로가 막히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당주! 어떻게 된 것이오?”
“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성벽 위에서 적들이 화살을 쏟아붓고 있…… 커억!”
고통스러운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갈 게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성(內城)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서 신법을 펼치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모용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주! 아니, 모용오!’
모용세가주 모용오.
전각들을 비조처럼 건너뛰다가 신형을 솟구쳐 날아오른 그가 정광의 옆에 내려서며 웅혼하게 외쳤다.
“모용강!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모용이 걸어갈 길을 바로잡는 중이다!”
“웃기지도 않는군. 그 더러운 입으로 모용을 논해?”
모용강이 모용오를 가주로 인정하지 않듯, 모용오 역시 모용강을 웃어른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뒤이어 내려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어조로 모용강을 비난했다.
“이런 후안무치한 자를 봤나!”
“간자를 써서 야밤에 기습을 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모용이더냐!”
모용강이 받아치기 전에 정광이 소리쳤다.
“그만!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가주님. 불이 꽤 크게 났는데 괜찮은가요?”
“물론일세. 사람도 불도 곧 잡을 테니 염려할 필요 없네. 다친 이도 그리 많지는 않아.”
“아뇨. 제가 두고 간 전표들요.”
모용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 자네였지.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뭘요.”
정광은 모용강과 척사당을 압박하며 모용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성문은 제가 막을 테니 다른 분들과 성벽 위에 올라 외부의 적들을 견제해 주세요.
-왜 성벽인가?
-지금까진 대흥장주님이 벌써 왕이라도 되신 것처럼 지시만 내리셨지만 전황이 변했잖아요.
-그가 직접 성벽을 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군. 자네 혼자 괜찮겠나?
-그분이 성문으로 들어오려 하시면 가주님이 내려와 도와주시면 되죠. 그런 일이 없어도 힘에 부치면 말씀드릴게요. 가주님은 괜찮으세요?
대흥장주 모용회를 상대할 수 있냐는 얘기.
모용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도 꽤 강한 편이지.
-날이 밝으면 원군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힘내세요.
-내성에서 사람이 더 올 걸세. 자네도 힘내게나.
모용오는 성벽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덧붙였다.
-행여나 힘에 부치면 말할 테니 도와주고.
-당연한 말씀을.
모용오를 따라왔던 이들도 정광에게 감사를 표한 뒤 신법을 펼쳤다.
성벽 위에 오른 그들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선봉으로 달려왔던 척사당 무인들이 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자 쏟아지는 화살에 꿰여 쓰러지고 있었다.
‘아래 있는 놈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모용오는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계속 몰려오는구나.’
기호지세(騎虎之勢)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성문을 점거하지 못했다고 물러섰다간 선봉으로 보낸 척사당 전원이 몰살당할 판 아닌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회천회 전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증오스러운 얼굴이 있었다.
“모용회!”
모용오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어둠을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헛된 망상에 빠져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노물(老物)아! 와라! 나 모용오가 직접 목을 쳐주마!”
그답지 않은 과격한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허나 이런 말까지 써가며 도발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를 잡으면 싸움을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진옥룡이 통로의 적들을 모두 밀어내고 성문을 닫을 때까지 내가 모용회를 잡아놔야 해.’
진옥룡도 자신이 그러기를 바라며 성벽 위로 올라가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역천(逆天)을 꿈꾸는 만큼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모용회가 도발을 거부하지 않을 것 또한 확실했고.
‘과연!’
기대했던 대로였다.
모용회가 쏟아지는 화살들을 쳐내며 날아올랐다.
모용오는 그 모습을 노려보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죽더라도 시간만큼은 끌어주마!’
성문을 책임지기로 한 정광도 바빴다.
모용강과 척사당을 향해 왼손을 까딱거렸다.
“뭐 하세요? 오시지 않고. 제가 갈까요?”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려던 참이다!”
성벽 통로에서의 싸움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는 없었다.
모용강은 척사당의 최고수들과 함께 정광을 공격했다.
‘힘은 들겠지만 어떻게라도 될 거다!’
‘우리는 강해! 전력을 집중하면 저 사악한 놈을 이길 수 있어!’
‘죽어라!’
그들의 무공은 척사(斥邪)라는 기치를 내세운 이들답게 훌륭했다.
허나 정광은 사(邪)를 아득히 뛰어넘는 마(魔).
거기에 정(正)까지 품은 특별한 존재 아니던가.
그 주인에 그 종이라. 그의 손에 들린 금룡(金龍)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스스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자유로이 유영했다.
우아하게, 때론 거칠게. 단순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복잡하게 변화하며 먹잇감을 몰아쳤다.
척사당은 피를 뿌리며 조금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도 남는 건 자신들의 죽음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신이 쌓여갔다.
정광은 그것들을 밟으며 한 걸음씩 계속 전진했다.
그리고 피투성이로 변해 버린 몸을 곧추세우며 처절하게 저항하던 모용강을 양단해 버렸다.
“끄아악!”
“다, 당주!”
정광은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어 피곤함을 푼 뒤 물었다.
“당주님은 보내 드렸고. 혹시 부당주님도 계세요? 대주님은요?”
“아, 안 돼! 으아아악!”
수장을 잃은 척사당이 공포에 질려 정신없이 물러났다.
정광은 산보하듯 몇 걸음 더 옮기는 것만으로 그들을 성문 통로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 할 수 있는 신위!
때마침 달려온 내성 고수들이 성문을 재빨리 닫아걸고 정광에게 예를 표했다.
“고맙소, 진옥룡.”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그들 틈엔 대공자 모용상현도 있었다.
“진옥룡. 지금까지의 고마움은 훗날 행동으로 갚겠소.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호칭 정정하기도 귀찮네요. 성벽 위로 올라가야죠.”
“이 판국에 미안하오. 수아는…….”
“아주 건강하게 잘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성문 잘 지켜주실 거죠? 동방장님, 쉬실 만큼 쉬셨으니까 그만 가죠.”
정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날아올랐다.
동방장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뒤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젠장. 이번 싸움 끝나면 나 건들지 마. 최소 사흘 이상은 죽은 듯이 잘 거니까.”
입으로는 불만을 토하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벽 위에 올라 보니 회천회 고수들이 용케 기어 올라와 본가 무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광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동방장님. 저분들 도와주세요.”
동방장은 평소와 달리 군말 없이 따랐다.
정광이 상대하려고 하는 모용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편안한 상대 아닌가.
혹시라도 정광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걸리적거린다, 비켜! 이 어르신께서 다 죽여주마! 아니! 그렇다고 전부 가지는 말고!”
동방장이 다급히 손을 내저을 때, 정광은 이미 모용회에게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심한 내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모용오를 제압하려던 모용회는 신형을 돌려 정광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혔다.
쩌엉!
“어?”
“음.”
정광도 세 걸음, 모용회도 세 걸음 물러났다.
정광은 발바닥으로만 슬금슬금 움직여 모용회의 시선에서 모용오를 가렸다.
안색이 창백해진 모용오가 겸연쩍게 웃었다.
“이것 참. 면목 없게 됐군.”
“무슨 말씀을. 하실 만큼 하셨는데요, 뭐. 그보다 대흥장주님. 꽤 좋은 검을 가지고 계시네요. 검날만 상하고.”
모용회도 감탄했다.
“내공이 제법이구나. 그 나이에 그럴 수가 있나. 영약이라도 먹은 것이냐?”
먹었다 뿐인가.
아주 꾸준히, 무수하게 먹은 정광이었다.
“장주님이야말로 그 연세에 움직이시는 게 용하네요.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어지럽진 않으세요? 피를 꽤 흘리시는데.”
“옛 가주를 잡는 데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지. 그래도 네놈을 죽이기엔 충분해.”
“거짓말.”
“무어라?”
정광은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려 대지(大指)와 식지(食指)를 비비며 이죽거렸다.
“정말 그렇게 믿으시면 돈이라도 거시든가요.”
모용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탈당한 것들을 되찾아야 하는 걸 잊을 뻔했군. 어디에 뒀느냐?”
“저런. 벌써 치매가 오셨나 보네요. 그런 중요한 걸 잊을 뻔하시고.”
“말장난 하나는 천하일절(天下一絶)이라 할 만하구나. 네놈을 죽이기 전에 분근착골(分筋錯骨)을 써서라도 전부 토설하게 해주마.”
모용회가 무거운 기운을 뿜어내 정광을 옭아매려 했다.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려 자신을 조여오는 기운에 대항했다.
천하일절이라 찬사받은 입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장주님도 그러셨어요? 마침 저도 장주님을 귀천시켜 드리기 전에 여쭐 게 좀 있는데.”
모용회가 코웃음 쳤다.
“웃기는 소리. 설령 네가 이긴다 해도 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광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근착골 같은 부드러운 방식이 아니라 아주 제대로 된 것으로 대접해 드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