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철환(鐵環)
사람은 보통 다른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 차림새를 보곤 한다.
이 방식에 따르면 대문이 열리자 드러난 통통한 중늙은이는 무척 대단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번쩍번쩍.
휘황찬란.
이런 표현도 모자란 의복과 장신구로 온몸에 휘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광에겐 고집불통에 악취미를 가진 인간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정광의 인사에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조카! 오랜만이구나! 그새 더 헌앙해졌군!”
“이 년 반밖에 안 됐는데요.”
“으하하! 까칠하기는. 어서 와라. 이숙(姨叔)이 한 번 안아보자꾸나.”
“싫어요.”
청해성주가 한숨을 쉬자 그의 옆에 있던 부인이 곱게 웃었다.
“대인. 쑥스러워서 저러는 겁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아닌데요, 이모.”
정광이 뭐라 하든 성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하하. 부인의 말이 맞소. 녀석,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정에 솔직해지거라.”
“아. 그럼 갈게요.”
“잠깐! 너무 솔직하지 않느냐!”
성주는 정광과 옥신각신하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 하시려는 것이오? 도장들께선 내가 반갑지 않은가 보오?”
신법을 펼쳐 담을 뛰어넘으려던 운 자 배 도사들이 굳어버렸다.
성주는 문인이었지만 상당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기도 했다. 그가 몇 년 전 곤륜을 방문했을 때처럼 노도사들이 도망가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내 체면이 있지. 서녕에서까지 이러면 곤란하오. 운학 도장, 내 말 이해하셨소?”
“……무량수불. 또 무엇을 주려고 오셨습니까? 저희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하는 도사들입니다.”
“전처럼 개인적인 호의로 시주하려는 게 아니오. 엄연한 공무(公務)의 일환이지.”
“……공무라니요?”
성주는 시선을 정광에게 돌린 뒤씩 웃었다.
“곤륜파의 협행을 치하해 달라는 상소가 빗발치더구나.”
정광은 황당했다.
상소?
대체 누가?
성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이 흘러나왔다.
“청해호 인근에 살던 한 낙향관리가 마두들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했는데 네 덕분에 살아남은 걸 기억하느냐?”
“마두들요? 아. 청해사견.”
“하하. 청해사흉이다. 관에서도 잡으려 했건만 하도 신출귀몰해서 애먹었던 놈들이지.”
성주의 말에 따르면 정광이 구해준 낙향관리는 곤륜파의 협행으로 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을 모아 엄청난 양의 상소를 올렸다 했다.
“거참. 그 많은 이들의 말을 전부 다 옮겨 적다니. 마차 한 대 분량이 나오더구나.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청해성을 관장하는 내가 어찌 모른 체할 수 있겠느냐?”
“그러셔도 되는데요.”
“으하하. 녀석, 이미 늦었느니라.”
정광이 그때 그냥 지나칠걸 그랬나 하고 고민하는 그때, 운학을 비롯한 노도사들은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주는 체면을 중시하고 과시하길 좋아할뿐더러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전에 못 다한 시주를 이번에 몰아서 하려는 것이리라.
과연 그랬다.
“가져오너라!”
“네!”
성주의 외침에 구경꾼들을 막고 서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 중 수십 명이 상자를 짊어지고 뛰어왔다.
쿵!
정예병들로만 데려왔는지 수많은 상자가 동시에 내려지며 큰 울림을 내었다.
“중원으로 나간다고 들었다.”
“청해성에는 비밀이 없네요.”
“워낙 심심한 곳이니 소문 퍼지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어쨌든 곤륜은 청해성의 얼굴, 청빈한 것이 좋다 하나 그 몰골로 보낼 순 없어.”
곤륜 도사들은 자신들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좀 낡았지만 깨끗한데?’
그건 그들의 기준일 뿐 성주의 기준은 드높았다.
“곤륜이라 하면 이쯤은 되어야지.”
* * *
구경꾼들은 곤륜 도사들을 보며 감탄했다.
“아아. 신선이 따로 없구나.”
“마음이 절로 경건해지는군.”
“곤륜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고 싶어져.”
성주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군. 도장들은 어떻소? 비단이 싫다 하여 명주로 지었으니 마음에 들 것이외다.”
곤륜 도사들은 어처구니없었다.
비단이나 명주나 광택의 차이만 있을 뿐,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짠 건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어색할 수가 있나.’
‘너무 가볍고 부드러워서 마치 벌거벗고 있는 것 같구나.’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눈처럼 하얀 도복이라니. 이런 걸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입느냔 말이다.
게다가 도복 곳곳에 구름 문양을 수놓다니! 그것도 금사(金絲)로!
도사들의 떨떠름한 표정을 오해한 성주는 이마를 찌푸렸다.
“역시 너무 소박한가? 가슴과 등에 큼지막한 황금용을 넣을걸 그랬군. 지금이라도 바꿔야겠어.”
도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큼지막한 황금색 용이라고?
그런 걸 입고 어떻게 다니냐!
다행히 성주 부인이 나섰다.
“대인. 지금처럼 은은한 금빛 구름을 수놓은 것이 더 고급스럽습니다.”
“음. 그렇소?”
“물론이지요. 진인들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평소 진인이라 불리면 부정부터 하는 운 자 배 도사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거침없이 수긍했다.
“무량수불. 물론입니다!”
“원시천존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흐음. 다들 그렇다 하니 그냥 이대로 해야겠군. 여러 벌 준비했으니 모두 가져가시오.”
성주가 수긍하자 도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구나.’
‘앞으로가 문제로다.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닐꼬?’
걱정에 빠진 그들과 달리 만족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정광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입어보네.’
비단이 아니라 명주여서 더 좋았다. 우아한 품격이 느껴지는 금빛 구름 문양도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 입었던 핏빛 장포(長袍)에 흑색 악귀의 형상보다 훨씬 나아.’
돌이켜 보니 맨 정신으로 그런 걸 잘도 입고 돌아다녔더랬다.
‘아니지. 이모가 아니었으면 이번 생에는 황금용이 번쩍거리는 촌스러운 옷을 입을 뻔했잖아.’
몸을 부르르 떤 정광은 연 부인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그 마음은 다른 도사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연 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것 아닌가!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나머지도 가지고 오너라!”
“네! 성주님!”
잠시 뒤.
성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거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뭐든 말하시오.”
곤륜 도사들은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부족은 무슨. 너무 넘쳐서 문제다.
대체 어느 정신 나간 도사가 청옥(靑玉)으로 만든 도관(道冠)을 머리에 쓰는가?
게다가 무슨 놈의 검이 이렇게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냔 말이다!
도사들은 모두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연 부인을 바라봤다.
잠시 난처해하던 그녀는 살짝 웃으며 얼버무렸다.
“대인께서 그것들까지 양보하시진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잘 어울리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군요.”
그녀의 말대로 구경꾼들은 탄성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아함과 신비함에 세속의 때도 적당히 첨가된 아주 절묘한 균형이었다.
“어서 검을 뽑아보시오.”
성주가 채근할 만했다.
햇빛 아래 드러난 검신은 묵빛과 푸른빛을 머금은 아주 제대로 된 것이었다.
띵-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본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그렇지? 하하하. 일전에 시주를 거절당한 뒤 절치부심해서 만들어온 것들이다. 역시 무인이라면 병기! 도(道)를 좇는 도문의 제자라 한들 어찌 좋은 검을 사양하겠는가!”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라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건만 곤륜 도사들은 기꺼운 얼굴로 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성주는 그 틈을 타 정광의 품에 묵직한 전낭(錢囊)을 쑤셔 넣었다.
-얼마 안 되지만 도움이 될 게다.
-뭔데요?
-금원보나 보석은 쓸데없이 짐만 될 것 같아 전표(錢票)로 준비했다. 신용 높기로 이름난 대륙전장(大陸錢莊)의 것이니 웬만한 곳에서는 다 통용이 될 것이야.
정광은 전낭을 열어보았다.
수많은 글자와 문양이 빼곡히 찍힌 특이한 재질의 종이들이었다.
-아. 이게 전표구나.
-허허. 처음 보느냐?
-네. 이 정도면 뭐 할 수 있어요?
-후후. 네 상상 이상일 것이다.
상상 이상이라.
나라라도 살 수 있나?
정광은 백승무를 불렀다.
-사제. 이리 와 봐.
-네? 무슨 일로…… 헉! 이, 이렇게 많은 전표가!
-이 정도면 뭐 할 수 있어?
-아!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가상단의 후계자 과정을 차곡차곡 밟고 있던 백승무였기에 꽤 정확한 정보를 정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정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성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너무 적은데요.
-으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 너무 많아서 어쩔 줄 모르겠지?
-어쩔 줄 모르겠는 건 맞는데 너무 적다고요.
-하하하. 그러니까…… 잠깐. 뭐?
정광은 두 눈을 부릅뜬 성주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첫 중원행인데 좀 더 쓰시죠.
-……얼마나?
-잠시만요.
정광의 전음에 백승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자 정광은 그걸 그대로 옮겼다.
-열 배만 더 하면 그럭저럭 맞출 수 있을 것 같네요.
-……조카. 무운을 빌겠네. 조심히 가게나.
-어라? 아저씨, 생각보다 가난하신가?
돌아섰던 성주의 몸이 절세고수보다 빠르게 되돌았다.
-가난하다니! 나 성주야!
-아. 청해성이 가난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정광의 말대로였다.
성주라 해봐야 이 시골에서 얼마나 벌겠는가? 게다가 그는 나름 양심적인 자였기에 말도 안 되는 수탈을 저지르는 다른 성주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후후. 조카. 내 가문 몰라?
-듣긴 했는데 글쎄요. 그게 대단한 건가요?
-호오.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쓰겠다?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성주는 여유를 되찾았다.
그의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 말만 하면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들 정도로 대단한…….
‘잠깐.’
성주는 정광을 뜯어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요 녀석, 진심인가?’
곤륜 도사들과 성주의 ‘그럴듯한 옷차림’에 대한 기준이 달랐듯이 성주와 정광의 ‘대단한 가문’이라는 기준 또한 달랐다.
-뭐 어쨌든 알겠어요. 이거라도 잘 쓸게요.
이거라도?
성주의 이마에서 핏줄이 툭 불거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녀석, 배포 하나는 대단하군. 아니지. 무공과 의술에 걸맞게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권력다툼에서 삐끗해 청해성주로 밀려났을 때만 해도 이를 갈았던 그였다.
청해성에선 하늘 같은 존재였지만 이런 변두리에서 왕 노릇을 해봐야 뭐에 쓴단 말인가.
‘최대한 빨리 중앙으로 돌아가겠다고. 자리를 되찾은 뒤 더 위로 올라가겠다고 수도 없이 맹세했건만…….’
지금의 아내가 된 연홍산을 만나며 모든 게 바뀌었다.
병약했던 그녀는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아직도 몸이 약한 상태. 아이를 가지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인 그녀를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그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성주는 이곳에서 그녀와 행복했다.
모두 정광 덕분이었다.
‘중원에서 날아오르는 네 소문을 들으며 산 매와 웃음꽃을 피우는 것도 괜찮겠지.’
성주는 마음을 굳혔다.
-주마.
-어? 괜찮겠어요?
-아니. 막상 주려니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구나.
성주의 손은 실제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양손 가득 낀 반지 중 제일 작은 소지(小指)의 것을 빼서 정광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이게 그렇게 비싸요?
-아까 말했던 대륙전장에 가서 이걸 내밀면 그 정도 금액은 내줄 것이다.
누런 황금에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는 다른 반지들과 달리 거무튀튀한 철환(鐵環)이었다. 그 표면에는 기묘한 도형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의미지? 전장이라는 곳에서 쓰는 기호인가?’
정광이 바라보기만 하자 성주가 채근했다.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가져가거라.
-너무 큰데 맞으려나?
-나는 그렇게 살찌지 않았다!
다행히 철환은 가운뎃손가락에 꼭 맞았다. 주먹을 오므려보기도 하고 검을 잡아보기도 했는데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괜찮네.’
따로 보관할 필요도 없이 손가락에 끼고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재물이 어디 있겠는가.
‘자금도 생겼겠다, 이제 중원으로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군.’
정광이 옅은 미소를 짓자 성주가 투덜거렸다.
-돈 앞에서는 장사 없구나. 네가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그런 식이면 아저씨는 맨날 웃으셔야죠.
-언젠 가난하다며?
-옛날 얘기해서 뭐 해요. 지금이 중요하지.
-하아. 됐다. 안 그래도 돈 들어갈 일이 넘치는데 네 덕분에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겠다.
-무슨 일인데요?
-인사이동 철이 다가온다. 본가에서 중앙을 설득해 나를 부르려는 낌새가 있어. 하긴 여기 너무 오래 있긴 했지.
-가고 싶지 않으세요?
-네 이모가 있잖느냐.
정광은 성주의 말을 이해했다.
이런 오지로 밀려난 관리는 중앙으로 복귀하기 위해 미친 듯이 뇌물을 쓰는데, 성주는 반대로 안 올라가기 위해 재물을 써야 할 판이었다.
-돈을 아무리 부어봤자 불려갈지도 모르니 불안해서 원.
-아저씨 말고 중앙으로 갈 만한 사람은 없어요?
-감숙성주가 돌아가고 싶어서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 힘들 거다.
-왜요?
-실적이 너무 안 좋아. 아무리 돈으로 기름칠을 해봤자 명분이 없어. 중앙 사람들도 책잡힐 일은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왜? 언젠가는 그걸 빌미로 물어뜯기게 되거든.
감숙성주는 공을 세우기 힘든 자리였다.
가장 큰 임무가 수시로 노략질을 하러 내려오는 몽고인들을 막아내는 것이었는데 그때그때 막아내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전공(戰功)을 세워야 하는데 그럴 만한 전력이 없다는 말이네요.
-그렇지.
정광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청해성주에게 받은 돈값도 하고, 감숙성주에게서도 뭔가 얻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감숙성주가 올라가면 아저씨는 안 가는 거죠?
-그래. 왜 자꾸 묻느냐?
정광이 싱긋 웃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