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21
2부 50화
의외의 단어
단 한 사람에 의해 거짓말처럼 전쟁 같은 싸움이 멎었다.
모두가 경악했으나 제일 큰 충격을 받은 건 회천회 무인들이었다.
성벽을 오르려고 애쓰던 자도, 기어코 올라와 분투하던 이도 넋이 나간 얼굴로 장창에 매달린 모용회를 망연히 바라봤다.
‘자, 장주께서…….’
‘……저 꼴이 되셨다고?’
평소의 패왕처럼 굳세고 거침없는 기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게거품을 질질 흘리는 초라한 노인이 세찬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정광은 멀찍이 피신해 있던 모용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주님. 오셔서 정리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모용오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정광의 역할이 아무리 컸다 해도 이 싸움은 모용의 것이었다.
모용의 가주인 자신이 정리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심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식솔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당당하게 걸었다.
그렇게 정광에게 다가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네.
-뭘요.
-그렇게 겸양할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야.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얘기하세나.
모용오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단전이 깨지는 듯한 고통도 개의치 않고 성벽 아래를 쓸어보며 위엄있게 외쳤다.
“대흥장주를 생포했다! 이제 누가 수장인가? 앞으로 나서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정적이 흘렀다.
절대적인 무공과 배분으로 회천회를 만들고 이끌던 모용회가 사로잡히자 지휘권을 이어받을 이가 불분명해져서였다.
이인자를 허락지 않는 절대자가 없어진 조직의 폐해였다.
그나마 모용회 다음으로 꼽을만한 인물이라면 척사당주 모용강밖에 없었으나 성문을 뚫으려다 정광에게 죽은 지 오래.
시간이 흘러도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 않자 모용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수장 노릇을 할 만한 자가 없는가 보군!”
“…….”
“개천(開天)을 논하던 이들이 이런 오합지졸이었을 줄이야! 시간을 줄 테니 빨리 정해서 말해라!”
“……!”
모욕적인 말에 분노한 회천회 무인들이 얼굴을 붉혔다.
허나 그러면 뭐 하는가?
냉정히 생각해 보면 모두 사실인 것을.
모용오는 성벽에 오른 회천회 무인들을 모두 내려보냄으로써 정말 대화를 할 의지가 있다는 걸 보였다.
이제 회천회 차례.
각 가문의 우두머리가 한데 모여 누가 수장을 맡을지 논의했다.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방계 가문에서 선출해야 하오.”
“허어. 우리 같은 호족과 이민족은 배제하고 시작하시겠다?”
“모용을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일어선 것이니 당연하지 않소?”
방계 가문들이 명분을 내세웠으나 호족과 이민족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껏 제일 피를 많이 흘린 건 우리 호족들이외다. 본거지가 쑥대밭이 됐는데도 열심히 싸웠거늘, 그렇게 선을 그어서야 되겠소?”
“우리는 또 어떻고? 부족의 명운을 걸고 협력했는데 이렇게 찬밥 대우를 하다니. 정말 실망이외다.”
개천을 대의(大義)라 여겨 모용회를 따른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을 이뤘을 때 얻을 것들에 끌려 참가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에게 사로잡힌 모용회가 몸 성히 풀려날 일은 없을 터.
다급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욕심을 버리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스로의 모자람을 알기에 남들 위에 설 생각조차 안 하는 이들도 협조하지 않았다.
‘내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저놈도 안 돼.’
‘조금이라도 본가에 유리한 자가 돼야 한다.’
논의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정광은 성벽 위에서 그 꼴을 바라보다가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옆에 있던 모용오가 작게 웃었다.
“하하. 졸리는가?”
“네. 좀 무리를 해서요.”
“그럴 만도 하지. 고생했네. 잠시나마 눈 좀 붙이게나.”
“어떻게 하시려고요?”
모용오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쳐 죽이고 싶지만…….”
현실을 무시할 순 없었다.
드넓은 요녕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사람이 필요한 법.
방계, 호족, 이민족, 어느 하나도 빼지 않고 협력이 절실했다.
“저들을 보게나.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어.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른 뒤 투항할 것을 권할 걸세.”
“응하는 분들은 죄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이죠?”
“그럴 수밖에.”
“모두 끝까지 싸우겠다고 하시면요?”
“잘 알면서 왜 묻는가? 자네 덕에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고 본가의 피해는 적어.”
모용오는 장창에 매달린 모용회를 흘깃 바라봤다.
기절한 채 차가운 겨울바람을 계속 맞아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적들은 구심점을 잃었네. 그뿐인가. 첫눈이 내렸고 진짜 겨울이 시작됐어. 요녕의 겨울은 내공을 지닌 고수라 해도 야외에선 오래 버티기 힘들 만큼 혹독하지. 저들은 얼마 안 가 물러날 수밖에 없을 걸세.”
모이긴 어렵지만 흩어지긴 쉽다.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가면 이미 금이 간 결속이 아예 무너져 버릴 게 분명했다.
“언젠가부터 호족들이 계속 술렁이던데 자네 작품인가?”
“네.”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힘써준 덕분에 호족들이 특히 안 좋은 상황인 것 같군. 그런 상태로 거친 요녕에서 버티긴 힘들어. 머리가 아예 없지는 않은 자들이니 내 제안에 혹할 게야.”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엉뚱한 분들에게 뺏기기 전에 가주님이 내미신 손을 잡는 게 여러모로 낫긴 하죠. 그러면 이민족분들도 흔들릴 테고…….”
“방계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 역도로 죽고 싶은가, 아니면 모용으로 남고 싶은가? 이 물음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하니까.”
모용오가 슬며시 덧붙였다.
“이쯤에서 물어야겠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네. 훌륭하신데요.”
“자네가 인정해 주니 안심이야. 혹시 내가 빠뜨린 게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주게.”
“언젠가는 피를 많이 보셔야 할 텐데, 그게 좀 마음에 걸리네요.”
모용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 말대로 반란을 일으킨 놈들을 거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이미 한 번 해봤는데 두 번이 어려울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세를 키우진 못할망정 줄일 순 없어. 언젠가 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정광이 씩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모용오가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포권했다.
“차마 염치가 없어 청하지 못하고 있었네. 어떤 방법인가?”
정광은 비초회와 낭인향은 물론 낭왕과 약조한 내용에 대해 적당히 설명했다.
모용오는 입을 떡 벌린 채 듣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재주도 좋군. 마적에 이민족에 낭인들까지 거둔 것도 놀라운데 낭왕과 싸워 이겼다니. 적들이 술렁이던 이유가 있었어.”
“동이 트면 비초회와 낭인향 분들이 도착하실 거예요. 낭인향은 역마살이 낀 분들이라 적당한 대가만 받고 떠나시겠지만, 요녕이 터전인 비초회 분들은 다르죠.”
모용오의 눈이 빛났다.
“비초회에 힘을 실어주라는 의미군.”
“네. 회천회 분들 중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도 있겠죠?”
“좋아. 그런 놈들은 모두 죽인 뒤 비초회에게 본거지를 넘겨주겠네. 가만. 비초회는 자네에게 승복한 것이지 내게 한 것이 아닌데. 나를 믿을까?”
“제가 보증을 서드릴게요.”
“정말 아낌없이 베푸는군.”
“아낌없이 받을 거니까요. 그분들을 잘 다독이셔서 지지 세력으로 삼으시면 한결 편해지실 거예요.”
“이해했네. 하하. 긴 싸움이 되겠어. 그래도 이게 어딘가.”
마적과 이민족을 설득하거나 감화시켜 한쪽 팔로 삼아야 한다.
반란을 일으켰던 놈들을 관리해 가며.
모용오의 이마에 여러 줄의 주름이 잡혔다.
“거참. 여기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
“황상 때문에 걱정이세요?”
역모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죄(重罪). 황제가 알게 되면 역모를 일으킨 자들뿐만 아니라 모용세가 자체를 지워 버리려고 할지도 몰랐다.
“낭왕이 그러기로 했듯, 우리도 황상을 도와 몽고와 싸워야겠지?”
“그러셔야겠죠.”
“황태손 저하께 말씀드려 줄 수 있는가?”
“네.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어려운 일인 거 잘 아네. 받은 게 너무 많아 셀 수도 없군.”
“그건 곤란한데. 찬찬히 세보세요.”
“기억은 전부 하고 있네. 사치품 사업은 이윤을 나누기로 했고. 성을 떠나기 전, 대흥장을 달라고 했었지? 토지와 재물은 물론 사람까지.”
“그랬죠.”
모용오의 시선이 강렬해졌다.
“이렇게 하세나. 지금까지 약조한 것들은 모두 그대로 하고. 앞으로 자네가 뭘 원하든 모용은 따를 걸세.”
“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만한 일도요?”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나.”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자네는 협객이야.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말일세.”
정광은 입을 떡 벌렸다.
협개애액? 내가?
“그냥 아까 하신 말씀, 취소하겠다고 하시죠. 저한테 대체 왜 이러세요.”
“내 말을 오해한 것 같군. 정의를 부르짖고 협행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야. 자신의 말을 책임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게 협객이 아니면 누가 협객이겠는가?”
“하아…….”
정광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용오가 계속 협객, 협객 해대니 듣기 괴로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좋을 대로 하세요. 전 잠이나 좀 잘게요.”
* * *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오 일행이 비초회, 낭인향과 함께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회천회 수장 자리를 놓고 다투던 여러 가문의 우두머리들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모용오는 식솔들과 함께 성 밖 중간 지점에서 그들을 만나 차근차근 요리했다.
그사이 잠에서 깨어난 정광은 장창에 매달아 놨던 모용회를 슬그머니 내렸다.
그걸 빤히 보고 있던 주위 무인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다, 단주. 무엇을 하려는 게요?”
“치료 좀 해드리고 오려고요.”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정광은 성 밖에 있는 모용오에게 외쳤다.
“가주님! 대흥장주님 모시고 가서 치료해 드려도 되죠?”
모용오는 쾌히 승낙했다.
“물론이지! 오히려 내가 부탁하려던 참이었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광은 모용회를 들쳐 메고 신법을 펼쳤다.
그리고 곤륜에 있는 자신의 방보다 친숙해진 모용상현의 방으로 가 의자에 앉혔다.
“장주님. 장주님.”
모용회는 미동조차 안 했다.
“장주님! 장주님!”
짜악! 짜아악!
따귀를 찰지게 갈기며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장주니임!”
쫘아아아악!
모용회는 입에서 이빨이 몇 개 튀어나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 이제 깨셨네.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 있나.
모용회는 말없이 원독 가득한 눈으로 정광을 쏘아봤다.
“아. 혈도를 풀어야지.”
닥치는 대로 다 짚었기에 그걸 전부 푸는 건 무척 귀찮은 일이었으나 아혈만 해혈(解穴) 하면 됐다.
“장주님?”
“끄으으으…….”
그제야 모용회가 입을 열었다.
이빨들이 빠져서 그런지 발음이 조금 샜다.
“여, 여긴 어디냐?”
“제…… 아니, 대공자님 방이요.”
“네, 네가 감히 나를…….”
“잠깐만요. 눈은 원래대로 되셨는데, 왜 칠칠맞지 못하게 아직도 게거품을…… 이런. 피거품으로 바뀌었잖아. 어쨌든 왜 흘리세요? 으으. 콧물까지.”
정광은 방구석에 있던 걸레를 가져와 모용회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았다.
“……!”
“이제야 좀 봐줄 만하게 되셨네.”
“……악귀 같은 놈.”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목갑(木匣)을 꺼냈다.
“흥. 독이라도 쓰려는 게냐?”
“아뇨. 치료부터 하려고요.”
목갑을 열자 청량한 향이 확 퍼졌다.
냄새만 맡아도 대단한 금창약(金瘡藥)임을 알 수 있었다.
“……치료부터 하겠다?”
“네. 당연한 일 아닌가요.”
모용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으냐?’
정광이 성벽 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귀천시켜 드리기 전에 여쭐 게 좀 있다고 했었다.
분근착골(分筋錯骨) 같은 부드러운 방식이 아니라 아주 제대로 된 것으로 대접하며 물을 거라고.
‘내가 극심한 고문을 당해도 죽지 않게 하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아니었다.
정광은 두 손가락으로 금창약을 듬뿍 떠서 모용회를 속이려고 깨물었던 자신의 입안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아, 따가워.”
“…….”
“음. 맛은 쓰지만 좀 나아졌네. 근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
“아. 분위기 어색하네. 더 서먹서먹해지기 전에 시작하죠.”
모용회는 이를 악물었다.
부러진 이빨들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나 그렇게라도 버티려 했다.
허나 정광의 고문 기예는 상상조차 못 하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대체 무슨 수법인지, 혈도를 통해 들어온 내력이 몸 내부를 치밀하게 헤집는 것 아닌가!
“끄아아아아악!”
“목청 좋으시네요. 내공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마음껏 지르세요.”
마음껏 지르다 못해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정광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훌륭하십니다.”
“끄으으…….”
“이렇게 나오시면 피곤한데.”
모용회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었다.
“클클클.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정말 자신하세요?”
“크하하하.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구나. 으으…….”
“대단하시네요. 현생에 이걸 견디신 건 장주님이 처음이에요.”
“끄으…… 혀, 현생?”
정광은 깨끗이 포기했다.
정상적인 수법은 버리고 마공을 쓰기로 했다.
‘이지를 흩트려 지배하는 것이라 한번 쓰면 폐인이 되어버려서 자제했는데.’
이렇게 된 판국에 별수 있나.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을 펼쳤다.
진물이 흘러나오는 모용회의 혼탁한 눈을 들여다봤다.
정광의 의념(意念)이 모용회의 눈을 통해 뇌리로 들어갔다.
심상찮은 느낌을 받은 모용회가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
정광은 그의 뇌를 의념으로 움켜쥐고 혼을 울렸다.
-영감.
“……!”
-혼자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고. 누구와 손잡은 거야? 아니면 따로 소속된 조직이 있나?
모용회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의외의 단어를 뱉었다.
“……밀약(密約)입니다.”
과거 가균이 언급했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