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25
2부 54화
복마전(伏魔殿)
혜진은 팽강휘에게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이분은 낭왕 휘하에 계시다가 단주에게 몸을 의탁한 동방장이십니다.”
동방장이 툴툴거렸다.
“의탁은 무슨. 두들겨 맞고 잡힌 거지.”
팽강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낭왕의 사지(四肢)와 같은 존재라는 사방장(四方將)?’
놀람도 잠시.
팽강휘의 험악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본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동방장이 팽강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김새는 곰탱이를 똑 빼닮았는데 성품은 훨씬 낫네. 네가 패룡(覇龍)이냐?”
“하하. 부끄럽지만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있습니다. 아직 한참 멀었지요.”
“흥. 안 어울리게 겸손은.”
팽강휘의 당당하면서도 예의 있는 언행에 동방장은 콧방귀를 뀌면서도 더 이상 타박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호탕하게 반기는 후배에게 어찌 시비를 걸겠는가?
정광을 만나 막혀 있던 기혈을 뚫은 뒤 마음이 넓어진 팽강휘도 동방장의 무례한 말투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안 어울리긴 하지요? 원래 이렇지는 않았는데 단주를 만나고 바뀌었습니다. 하늘 밖엔 하늘이 있더군요.”
“끄응. 이제 이해가 가네. 너도 좀 맞았냐?”
“좀이 아니라 많이 배웠습니다.”
“하아. 망할 주군 같으니…….”
동방장은 팽강휘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힘내라. 언젠간 좋은 날이 오겠지.”
“저도 그러길 빌겠습니다. 혜진 소저. 이분은 누구시오?”
혜진이 아니라 당사자인 모용수수가 직접 답했다.
“모용수수라 하오. 하북팽가의 이공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오. 모용세가의 공녀께서 오셨구려. 반갑소. 잘 부탁하오.”
“…….”
모용수수는 팽강휘를 올려다보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내 수양이 많이 부족하구나. 소개를 받는 건 받는 거고. 이런 강자를 눈앞에 두고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녀는 그녀답게 행동했다.
“팽 공자. 나야말로 부탁하오. 그대와 싸우고 싶소.”
모용수수의 건장한 체격과 등에 메고 있는 거대한 참마도(斬馬刀)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팽강휘도 그답게 받아들였다.
“으하하. 이렇게 호쾌할 수가 있나. 안 그래도 대평원을 질주하는 모용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던 참이었소.”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부딪혔다.
마침 서신을 다 쓰고 온 정광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야. 분위기 좋네요.”
팽강휘가 시선을 돌리며 반가워했다.
“단주! 오랜만이오. 중요한 일을 논의하시는 중인 듯해서 중간에 끼어들기 뭐해 이쪽으로 바로 왔소이다. 그간 잘 계셨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하시던 일 계속하세요.”
“하하. 이해해 줘서 고맙소. 이따 봅시다.”
팽강휘는 모용수수와 함께 떠났다.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도가 꽤 빠른걸. 잘됐어.”
혜진이 웃음을 참으며 설명했다.
“단주. 그쪽이 아닙니다.”
“네? 그럼 뭔데요?”
“비무를 하러 간 것입니다.”
“이런.”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바로 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요. 원래 싸우면서 정드는 거잖아요. 하아. 꼭 그래야 하는데.”
혜진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동방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군. 나 먼저 들어가서 잘게. 밥 시간 되면 깨워줘.”
“어려운 일은 아닌데. 뭔가 역할이 뒤바뀐 듯하네요.”
동방장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이제껏 해온 게 얼마나 많은데.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하긴. 그렇긴 하네요. 푹 주무세요.”
“……지, 진짜?”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너무 순순히 받아들여서 문제지.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야 있나.
“전혀! 아무 문제 없어!”
동방장은 정광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재빨리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혜진도 정광에게 양해를 구했다.
“단주. 저도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녕에서 뭔가 얻은 것 같은데. 잡힐 듯 말 듯해서 말입니다.”
“그런 상태면 당연히 그러셔야죠. 수고하세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혜진도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정광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전각 근처에 대어놓은 수레를 바라봤다.
‘앞으로 꽤 바빠질 텐데. 저건 어쩌지?’
수레에는 요녕에서 얻은 전표가 가득 실려 있었다.
‘대륙전장(大陸錢莊)에 또 맡기는 게 나으려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이번 싸움에는 돈이 필요해질 수도 있어. 일단 그대로 두자.’
그 돈이 더 늘어났다.
팽가의 안주인인 양희인이 찾아와 감사한 마음을 재물로 전한 것이다.
“진옥룡. 얼마 안 되지만 제 성의이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안 되는 게 아니라 꽤 됐다.
“뭘 이런 걸 다.”
정광도 말과 달리 날름 받았고.
“하하.”
양희인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전하시군요.”
“부인도요.”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정광은 양희인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처럼 웃는 상이시고. 주름살도 거의 늘어나지 않으셨는데요?”
양희인은 내심 기뻐했다.
정광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위인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감사합니다만 용모가 아니라 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아. 통이 더 커지신 거요?”
양희인이 크게 웃은 뒤 손을 내저었다.
“그냥 제가 알려드리지요. 처음 뵀을 때 드렸던 말씀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욕심은 사람을 망친다.”
“아.”
양희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진옥룡의 조언대로 쓰기 나름이었어요. 그이도 그렇고, 강웅이, 강휘, 수빈이 역시 똑같습니다. 전처럼 마음이 상해가며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지 않아요. 더 치열하지만 웃음이 많은 삶을 살고 있지요. 모두 진옥룡 덕분입니다.”
정광은 의아해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의 도움으로 각자의 벽을 깰 수 있었고, 그라는 선구자가 끝없이 앞서 걷는 걸 보았기에 자신들도 이룰 수 있다 믿으며 최선을 다해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가? 뭐 그런 것으로 하죠.”
정광은 대충 매듭지었고 양희인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은근히 말했다.
“허청 도장께서 진옥룡의 공적을 천하에 드러내시며 육식과 음주를 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본가에 머무시는 동안 좋은 요리와 명주를 올려드릴 테니 마음껏 즐기셨으면 합니다.”
“무량수불.”
정광은 오랜만에 두 손을 모았다.
“완전히 허하신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별수 없죠. 감사히 먹고 마실게요.”
“하하.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양희인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천하의 안위가 달린 큰일이 일어난 참이라 화려한 연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저녁이 되자 정광도 놀랄 만큼 수많은 요리와 술이 탁자 위에 빽빽하게 놓였다.
‘이걸 혼자 어떻게 다 먹어.’
명상 중인 혜진에게 갔다.
“소저. 그만하고 식사하시죠.”
“죄송합니다, 단주. 지금 뭔가 잡힐 듯한 참이라…….”
“명주가 엄청 많은데.”
“……억지로 깨달으려는 것만큼 헛된 욕심도 없지요. 어서 가시지요.”
팽만소, 팽강웅, 양희인은 너무 바빠 참석하지 못했다.
허나 만족스러울 만큼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받은 자오와 팽수빈이 돌아왔고, 격한 비무를 치른 팽강휘와 모용수수도 함께했다.
정광은 팽수빈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팽강휘와 모용수수에게 술을 권했다.
“자. 자. 드시죠.”
술잔이 몇 번 돌자 넌지시 물었다.
“어떠셨어요?”
팽강휘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왜 모용세가의 명성이 그리도 높은지 알게 됐소.”
모용수수는 분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을 새삼 실감했소이다. 허나…….”
그녀의 시선이 팽강휘에게 꽂혔다.
“영원히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팽강휘도 열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봤다.
“좋은 투지군. 기대하리다.”
정광은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텄네. 텄어. 머릿속도 근육으로 뭉쳐 있는 애들한테 내가 뭘 기대한 걸까.’
하북팽가와 모용세가가 조건을 잘 절충해 협력하기를 기원하며 먹고 마시는 데 집중했다.
‘오. 상당히 괜찮은데.’
술을 쏟아붓는 것처럼 마시는 혜진의 주량에 팽 씨 남매가 경악하고, 냄새를 맡고 달려온 동방장이 왜 안 깨웠냐고 분노하다가 술과 요리를 맛보고 누그러지는 사건이 있었지만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실컷 먹고 마신 정광은 배를 문지르며 모두에게 말했다.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만 자죠. 팽 공자는 소가주께 가보세요. 제법 큰일이 생겼거든요.”
“머리 아픈 건 질색인데. 어쩔 수 없지. 내일 봅시다.”
“수빈이는 남고.”
“네, 사부님.”
정광은 팽수빈과 함께 연무장으로 갔다.
내공이 약한 그녀를 위해 화톳불을 밝히고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간의 성과를 볼까?”
“제자,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팽수빈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작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검무를 췄다.
정광이 그녀를 위해 창안하고 전수한 수빈패검(秀彬覇劍)이었다.
강한 검격이 줄줄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를 부드러운 초식이 메웠다.
정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좀 더 빠르네.’
팽수빈의 훌륭한 자질을 염두에 두고 예상했건만 그보다 빠르다니.
그만큼 노력해서 나온 결과일 터.
“열심히 했구나. 잘했어.”
칭찬에 인색한 정광이 그런 말을 하자 팽수빈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아직 감사하긴 일러. 내공도 확인해야 하니까.”
정광은 제자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대고 수빈일기공(秀彬一氣功)의 성취를 확인했다.
“어라? 감사해도 되겠네.”
“감사합니다!”
“흠. 욕심이 생길 정도야.”
“네?”
정광은 잠시 고민하다가 품속에서 목갑을 꺼냈다.
덮개를 열자 속에 있던 흑단(黑丹)들이 드러났다.
그중 하나를 집어 팽수빈에게 내밀었다.
“영약이야. 먹어.”
“……!”
“받으라니까. 별로일 것 같아? 네 집이 부자라 영약이 꽤 있겠지만 이게 더 나을걸?”
“……그래서가 아닙니다. 사부님의 끝없는 은혜에 가슴이 벅차 그럽니다.”
정광도 동의했다.
“그러게. 마침 이거 이름도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이거든. 그 마음 잘 간직하고 꼭꼭 씹어먹어.”
“네! 사부님!”
팽수빈은 수은망극단을 먹은 뒤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부의 도움을 받아 나이에 맞지 않는 넓은 단전을 가지게 됐다.
정광은 감격하는 제자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지금은 내공을 쌓는 것보다 단전의 크기를 키우는 게 나아서 이렇게 한 거야. 어릴 때부터 이런 편법을 써서 쉽게 얻는 건 안 좋은데 네 의지를 믿고 그런 거니 실망시키지 마.”
“……사부님.”
팽수빈은 정광을 안고 펑펑 울었다.
정광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옷 더러워진다.”
“네. 죄송합니다.”
팽수빈은 사부가 쑥스러워서 엉뚱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상처받긴커녕 밝게 웃었다.
“그만 들어가서 자. 그래야 키 크지. 흠. 팽가니까 그럴 필요까진 없나.”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기에 그냥 보냈다.
정광도 숙소로 돌아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성취는 확인했으니까 됐고. 아미파 무공에서 느낀 부분을 전수해 줘야지. 현오가 남긴 불경 고사(故事)들도 들려주고.’
원래는 안락한 노후 생활을 위해 거둔 제자였으나 제법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것도 기특했고.
미적 감각은 심각한 문제였지만.
‘어쨌든 나도 꽤 한단 말이야.’
무엇보다 사부 노릇을 나름 잘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슬슬 자자. 내일이면 황태손이 사람을 보내겠지.’
눈을 감고 자려고 하는데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이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지워버렸으나 그 얼토당토않은 내용이 무척 인상 깊었는지 계속 떠올랐다.
그래도 전부 밀어 머릿속 한구석에 처박았다.
‘틈틈이 궁리할 물건이 아니야. 날을 잡아서 파고들어야 해.’
* * *
동이 트자마자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황태손을 근접 호위하던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황궁십대고수로 꼽히는 어림군(御林軍) 부지휘사(副指揮使)였다.
그는 먼저 팽만소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야.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어서 오게. 정 부지휘사. 황태손 저하께서 뭐라 하시던가?”
“아직도 못난 제자를 걱정해 주시는 사부께 죄송하고 또한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허어. 무슨 그런 참람한 말씀을.”
팽만소는 잠시 탄식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지금 저하를 알현하면 되는 건가?”
부지휘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길래 이러십니까? 더구나 진옥룡이 직접 알현을 청하다니요?”
“무척 중한 일이라 직접 말씀드려야 해서요.”
“그러니까 대체 어떤…… 헉!”
부지휘사가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미청년이 눈앞에 있었다.
“……진옥룡.”
“안녕하세요.”
“……반갑소. 경지가 더 높아진 것 같은데.”
“바쁘니까 가면서 얘기하죠.”
정광이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재촉하자 부지휘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가 이렇게 서두를 정도라니…… 알겠소. 노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광과 부지휘사는 말을 타고 달렸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는 표현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복마전(伏魔殿).
대명(大明)의 황궁 자금성(紫禁城)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