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27
2부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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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을 빛내며 정광을 한동안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천하의 평안과 네 행복을 원한다고 했느냐?”
“네. 폐하.”
“너무 추상적이군. 자세히 말해보거라.”
정광은 숨김없이 답했다.
“천하가 평안해야 보고 즐길 거리도 많아질 테고 마음껏 놀러 다닐 수 있죠. 진행하는 사업들도 잘 풀릴 거고요. 제가 워낙 가난하게 자란지라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유람과 돈이 네 행복이구나. 그걸 위해 천하가 평안해야 한다는 말이고.”
“바로 그거죠.”
황제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천하가 일개 필부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니. 재밌군.”
정광은 재미없었다.
황제의 좌우로 시립해 있는 노인들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는데 뭐가 재밌을까?
그냥 노인들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역시 황궁이네. 수준이 높아.’
제멋대로인 무림인이 그렇게나 많고, 그중 고수라 할 만한 이들도 꽤 있다.
그런데도 황제가 늙어 죽을 때까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건 저런 대단한 고수들이 지켜줘서 가능한 일이리라.
‘그것뿐만이 아니지.’
황제를 높임으로써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정광의 무례한 언행에 자신이 모욕당했다 여겨 호통이라도 쳤으련만. 황제가 탓하지 않으니 눈에 힘만 줄뿐, 아무도 기세조차 키우지 않다니.
‘황제에게 복종하고 있어. 저런 애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
상대에게 감탄하는 건 정광만이 아니었다.
“짐(朕) 앞에서 너처럼 제멋대로 군 이는 없었다. 흥미로울 정도야.”
황제의 시선이 시립한 노인들에게 향했다.
“그대들의 평가를 듣고 싶다. 저자의 무위는 어느 정도인가?”
체격이 큰 위맹한 인상의 노인이 대표로 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臣)들의 아래가 아니옵니다.”
황제가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어림군(御林軍) 지휘사(指揮使)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폐하. 무능한 신들을 죽여주십시오.”
죽여달라는 말들이 연이어 나왔으나 아무도 엎드리지 않았다.
노인들은 진심으로 간청하되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정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황제의 어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쓸데없는 소리. 그대들이 죽으면 천하에 누가 있어 짐을 지킬 수 있을까?”
노인들의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정광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고.
‘저런 말에 감격한다고? 말이 돼?’
정광의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황제는 황태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말을 듣고 한번 써볼까 했는데 성품도 무공도 너무 과해. 남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네 생각은 어떻느냐?”
“소손이 어찌 감히. 폐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황태손의 공손한 대답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짐이 네 아비를 황태자로 삼았던 건 장자여서가 아니다. 너까지 길게 본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스스로를 죽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구나. 결과를 생각지 말고 네 의지를 말해라.”
황태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철혈(鐵血)이 흐르는 황제의 진노를 사더라도 말해야 할 때임을 알아서였다.
그의 입에서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손은 그를 거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벗으로 삼고자 합니다.”
“벗이라? 재미없는 농이군.”
황제의 노구에서 무거운 기세가 일어났다.
“장차 천하를 경영해야 할 몸이 벗 따위를 운운하다니. 거둘 힘이 없어 타협하는 것으로밖에 안 들려. 네가 오늘 큰 실망을 주는구나.”
황태손이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폐하. 기대에 어긋나 죄송합니다. 허나 그것이 소손의 최선임을 살펴주십시오.”
황제는 못마땅한 눈길로 내려보다가 일어설 것을 명했다.
어쩌겠는가? 그나마 제위(帝位)를 물려줄 만한 인물이 황태손밖에 없는데.
황제는 시선을 돌려 정광의 맑은 두 눈을 노려봤다.
‘지금까지의 행적도 그렇고, 직접 본 바로도 그렇고. 돈은 탐해도 권력에는 티끌만 한 관심도 없으니 그렇게라도 함께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겠지.’
제법 사람 보는 안목이 있는 수왕도 정광을 그렇게 평했었다.
황제는 입을 열려다가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거슬려. 지금이라도 없애는 게 나을까?’
대명의 영광을 위해 눈엣가시 같은 무림을 제대로 한번 밟아놓으려 했건만 실패한 상태.
밀약(密約)이라는 놈들이 걸리는 상황이나, 무림의 현재이자 미래라 할 수 있는 진옥룡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헌데 그 진옥룡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발바닥만 움직여서 슬금슬금.
‘……내 살기를 알아챈 건가.’
어느새 어림군 고수들이 움직여 사방에서 압박하고 있었으나 정광은 귀신처럼 흐릿하게 흔들리며 계속 물러났다.
기이한 신법도 그랬지만 더없이 당당한 얼굴도 인상적이었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더니 별놈이 다 있군. 이놈의 뜻은 어떨까?’
내친김에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하며 물어봤다.
“생각은 바뀌는 법이다. 너도 벗이 되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짐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마.”
“음…….”
정광이 도주를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놈은 난 놈이구나. 이 와중에 그런 걸 고민하고.’
정광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폐하. 제가 그 벗이라는 게 뭔지 잘 몰라서요.”
“…….”
“가끔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돈도 대신 써주고.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될까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정광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건 좀 그런데.’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더구나 황태손씩이나 되는 자가 어려워할 일이라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터.
‘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잖아.’
황태손이 황제가 되면 얼마나 많은 걸 뜯어낼 수 있을까.
믿을 만한 자이니만큼 말을 바꿀 위험도 거의 없을 테고.
정광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통 크게 받아들였다.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니 웬만한 일이면 서로 돕기로 하죠. 할 수 있는 것들만요. 이 정도면 괜찮나요?”
“……!”
모두가 기함했다.
황제만 빼고.
‘무턱대고 그러겠다는 것보단 믿을 만하군.’
불혹(不惑)에 이르자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져 조카인 주윤문을 주살하고 황위에 올랐다.
지천명(知天命)에는 대명(大明)을 굳건히 하라는 하늘의 뜻을 알고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리고 이순(耳順)이 지나니 귀가 순해져 어떤 말을 들어도 진의를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한다는 말이렷다.’
행동도 그러리라.
도주할 자신이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
황태손을 위해서라도 잡아야 할 자였다.
황제는 마음을 굳혔다.
“좋아.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지. 우선 모용 일족과 낭인 도당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주마. 황군과 함께 대명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정광은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피땀을 흘려야 하는 건 모용세가와 낭왕 무리이고, 그들이 원하던 대로 문서를 얻게 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황태손의 것이 아니라 더 확실한 황제의 것으로.
황제가 연이어 말했다.
“짐은 공과를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네 공이 과보다 크니 그만한 보상을 내려야겠지.”
정광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먼저 네 운신의 폭을 늘리기 위해 금의위(錦衣衛) 북진무사(北鎭撫司) 천호(千戶)로 임명하겠다.”
“……!”
모두의 눈이 커졌다.
무림인인 정광에게 그 누구도 체포, 감금, 문초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다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너를 간섭하지 않게 하마. 단, 황실이나 국운과 관련된 일만큼은 황태손에게 전부 알려야 한다.”
황제가 주위를 둘러보며 위엄 있게 명했다.
“지금부터 일의 경중을 막론하고 황태손이 국정에 참여할 것이다. 그를 대함에 있어 짐을 대하듯 하라.”
“……!”
황태손이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폐하! 어찌 그런 참람한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황제는 자신의 손자를 싸늘하게 응시하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황제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대고 내공을 불어넣고 있던 병필태감(秉筆太監)이 시선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었다.
황제도 피식 웃었다.
“장암, 네 이 녀석. 땀방울을 뚝뚝 흘리면서도 웃는 꼴이라니. 허세가 갈수록 심해지는구나.”
황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보필해온 병필태감 장암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폐하께서 이리도 정정하신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얼마나 남았느냐?”
부드럽게 휘어 있던 병필태감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닫혔다.
황제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대답하기 곤란할 때 입을 다무는 건 여전하군.”
그렇다고 더 이상 탓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진작에 목을 쳤겠지만 육십 년이 훌쩍 넘게 목숨을 걸고 충성해 온 충복 아닌가.
황제는 황태손에게 일어날 것을 명한 뒤 말을 이었다.
“장암이 곤란해하고 있다. 억지로 늘려온 짐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야.”
“폐하…….”
“네 아비의 상세가 좋지 않으니 너를 믿는 것이다. 내 기대에 부응하겠느냐?”
황태손의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렁였다.
“소손, 반드시 폐하의 기대를 충족시켜드리겠습니다.”
“좋군.”
황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정광에게 눈길을 돌렸다.
“말이 잠시 샜구나. 이번 일이 끝나면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들어가 세 가지를 택해라.”
“……!”
황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네 사문이 곤륜이었지. 무당에 준하는 혜택을 내려주면 적당하겠군.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쓸데없는 시기는 안 살 게야.”
“……!”
“곤륜의 기반인 청해성도 좀 더 키우는 게 나으려나. 서역과의 교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던데 더 밀어주마. 좁은 관도(官道)를 넓히고 한동안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이면 적당할 것 같다만.”
“……!”
“네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말해라. 네 표현대로 웬만한 것이면 모두 들어주지.”
“……!”
“단, 영원히는 아니야. 황태손이 황위에서 내려오는 그날까지만 계속될 것이다.”
모두가 경악했으나 정광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폐하. 감사하긴 한데 너무 파격적이신 거 아닌가요?”
“꼭 그렇진 않지. 요녕에서 벌이는 사업의 수익 중 일부는 황실로 들어올 것 아니냐?”
“그렇긴 하죠.”
“장강을 통한 수운이야 네가 수왕과 맺은 약조가 있을 테니 내가 손댈 곳이 없다만. 육로를 쓸 때 지원해줄 테니 일정 부분을 진상해라. 네게 이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는 없을 게야.”
“수왕 그분, 입이 가볍네요.”
“내게는 누구나 그래야 한다.”
“나중에 장강에 가서 인사 한번 드려야겠어요. 그런데 그것들만으론 폐하께서 여전히 손해이실 텐데.”
“너를 잡으면 무림을. 거기까진 안 되더라도 최소한 정파무림은 잡는 것과 마찬가지지.”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가 무림을 제어해 주길 원하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황제가 코웃음 쳤다.
“아무리 너라 해도 무림의 무뢰배들을 전부 제어할 순 없어. 감히 왕(王)이나 제(帝)가 들어가는 별호를 멋대로 쓰는 발칙한 놈들 아니더냐.”
그 외에도 역적으로 규정하고 쓸어버려도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짓들을 태연히 저지르는 게 무림인들이었다.
물론 모용세가처럼 실제로 역모를 일으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아. 마음이 넓으셔서 그냥 두시는 줄 알았는데.”
“힘이 없어서다.”
황태손과 노인들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죽여주십시오’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짐이 원하는 건 천하의 평안이다. 네가 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정사를 가리지 않고 악한 이를 벌하며 무림의 균형을 잡아주면 돼. 이해했느냐?”
당연히 이해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박살을 내서 무림의 힘을 약해지게 하고, 쓸데없이 큰 싸움은 안 일어나도록 하거나 일어나더라도 이번 정사대전처럼 최대한 빨리 끝나게 해달란 말 아닌가.
“세금을 안정적으로 걷고 싶으신 거였네요.”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지.”
“저도 이젠 나이가 들어서요. 계속 그렇게 뛰어다니는 건 좀 무리인데.”
“……내 상세를 보고도 잘도 떠드는구나. 다른 놈이 그런 말을 뱉었으면 당장 목을 쳤을 게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무겁게 선언했다.
“직접 뛰진 않더라도 영향력은 끼치거라. 그게 더 효율적이겠지.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 아직도 문제 되는 점이 있느냐?”
정광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금의위 직함요. 이번 일 끝날 때까지만 하고 벗어도 되는 거죠?”
“…….”
“매이는 건 영 질색이라.”
황제는 정광에게 물러나라 손짓하며 병필태감에게 명했다.
“저 녀석에게 필요한 것들과 사람을 붙여줘라.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사라질 수 있게. 그게 서로를 위하는 것이야.”
* * *
정광이 황태손의 거처인 단본궁(端本宮)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찾아왔다.
그것도 익숙한 사람이.
‘어?’
눈처럼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약관인지 중년인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에 흑색 비단옷을 입은 환관.
사마련 총단을 치러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長沙)에 갔을 때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자 아닌가?
“오랜만이네요.”
환관이 빙그레 웃었다.
“병필태감님이 보내셨어요?”
환관은 말없이 손바닥만 한 물건을 내밀었다.
정광이 원했던 병기 허가증보다 훨씬 대단한 것. ‘금의위 북진무사 천호’라는 직함이 새겨진 주황색 목패였다.
“고급스럽네요. 잘 쓸게요. 공공(公公)께서 저를 도우실 건가요?”
환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
“네?”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귀를 후비자 환관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했다.
“진화입니다.”
“뭐라고요?”
“진화입니다.”
“네에?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잠시 망설이던 환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확실히 아까보단 나았지만, 그래 봐야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작은 소리였다.
“진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