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31
2부 60화
따로 가보고 싶은 곳
정광은 개방했던 마혼(魔魂)을 갈무리했다.
무저갱의 암흑처럼 까맣게 물들었던 눈이 원래의 맑고 담담한 것으로 돌아왔다.
항마주를 다시 손목에 차고 두 손을 매만진 정광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맛이야.’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고향 요리를 맛보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흑서(黑鼠)를 자근자근 밟았다.
아혈이 짚인 흑서는 시꺼먼 핏덩어리를 토하면서 묵묵히 처맞을 수밖에 없었다.
마혈까지 제압당하진 않았으나 도주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정광이 진천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는데 어찌 감히 그럴까.
두들겨 맞다가 까무러치고,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또 밟히며 기절하길 수차례.
더 이상 토할 피도 없어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하며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하는데.
정광이 구타를 멈추고 빙그레 웃었다.
“아프냐?”
“…….”
“나는 안 아픈데.”
“…….”
다른 이라면 속이 뒤집혔겠지만 흑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진천마는 본래 이런 존재 아니던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자 억지로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놀릴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상대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차라리 성화(聖火)로 태워주면 좋으련만.’
아니었다.
정파무림의 명문이자 도교의 성지인 곤륜에서 나고 자란 정광이 전생과 똑같을 리 있나.
“뭐 해? 일어나지 않고. 더 맞고 싶어?”
“……!”
놀람도 잠시.
흑서는 감격에 찬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겨우 이쯤에서 끝내다니!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정광은 대자대비한 부처나 다름없었…….
‘아니!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몰라! 어서 일어나야 해!’
필사적으로 일어나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온몸에서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고 극심한 고통 때문에 혼절할 지경이었지만, 이가 깨질 만큼 강하게 악물며 가까스로 견뎌냈다.
‘크흐흑. 좋아! 이 정도면 늦지 않았어!’
정광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하냐. 더 맞고 싶은가 보네. 취향이 그쪽으로 간 거야?”
정광이 펼쳤던 주먹을 쥐고 흑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 순간.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뭉쳐 떨어졌다.
응삼이었다.
“진천마시여!”
“진옥룡.”
“……지, 진옥룡이시여! 사부는 아혈을 제압당해 말씀을 못 드리는 것입니다! 제발 사정을 살펴주십시오!”
“그랬구나.”
응삼의 처절한 변명에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온 김에 너도 맞자.”
“……네?”
사제동행(師弟同行)이라 했던가.
스승과 제자는 함께 같은 길을 걷는 법.
제자도 스승처럼 검게 죽은피를 수없이 토한 뒤 정광 앞에 오체투지하게 됐다.
응삼은 극심한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한 가지 의문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나, 나는 왜?’
마치 그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정광이 입을 열었다.
“치료해 줬는데 뭐 해? 어서 운기조식하지 않고.”
“……!”
흑서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었다.
응삼도 얼결에 따라 했고.
잠시 뒤.
자신들의 내부를 관조하던 두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진기가 이렇게 막힘 없이, 유실 없이 흐르다니!’
정광이 담담하게 충고했다.
“그러다 주화입마 걸리겠다. 운기조식부터 끝내.”
“아, 알겠습니다!”
사제는 벅차오르는 희열을 가라앉히고 정광의 명에 따랐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대주천(大周天)까지 마치게 되자 정광은 아혈을 풀어줬다.
흑서와 응삼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하해와 같은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오냐. 응삼이가 셋째니 응일, 응이도 있지? 황제 발치에 숨어 있던 놈이 응일일 거고. 응이는 황태자를 지키나? 걔들도 나한테 보네.”
정광은 감격하는 사제에게 주의를 줬다.
“잘하라고 이러는 거야.”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응삼이는 가서 황태손을 지키고, 흑서는 왜 나를 피했는지 말해봐.”
응삼의 신형이 사라지고 흑서가 입을 열었다.
“귀천하셨다는 소문은 전해 들었습니다만 믿지 않았습니다.”
“왜?”
“소교주, 아니. 교주시니까요.”
흑서의 기억 속에 있는 진천마는 사람이 아닌 악신이었다.
“살 만큼 살고 죽었는데 무슨. 그래서?”
“그러던 차에 제자 녀석이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비술을 알아왔습니다. ‘혁련후’라는 분이 내려주셨다면서 말입니다.”
“내 본명이잖아. 그럼 더 피하면 안 될 텐데.”
“분명 그랬어야 했으나 제자를 살려주신 것에 짙은 의혹을 느꼈습니다. 교주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뭐?”
흑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여삐 봐주셨어도 최소 팔다리 하나씩은 자르셨을 텐데 멀쩡히 돌아오다니요. 교(敎)의 누군가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얼마나 유한데.”
흑서는 감히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정광을 칭송했다.
“제가 살아남아 중원에 올 수 있었던 건 천운이 아니라 교주께서 놓아주셔서 그런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이렇게 부작용까지 없애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황궁에서 구르더니 혀가 매끄러워졌구나.”
“가, 감사합니다.”
“됐고. 네 제자에게 너희들의 목숨값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라고 했었는데. 도망치거나 준비해 놓은 게 시원찮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상상해 보라고. 잊진 않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좋아. 꺼내봐.”
흑서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먼저 설명을 좀 드려야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정광은 이해해 줬다.
‘흑서’라는 별호는 노인이 쥐새끼처럼 꾀가 많은 편이라 정광이 전생에 직접 붙여줬던 별호다.
그런 놈이 괜한 소리를 늘어놔 정광의 분노를 살 리 없지 않은가.
“말해.”
“감사합니다. 과거 마도 칠대가문 중 하나였다가 교주께 불충을 저질러 멸문당했던 북천호가(北天扈家)의 마지막 생존자인 소인이…….”
“어째 불만이 있는 것처럼 들리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명해 드려야 해서 그랬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쿵! 쿵! 쿵!
“일단 들어보고.”
이마를 몇 번이나 땅에 찧어 피를 흘리고 있던 흑서가 절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소인이 중원으로 흘러들어 왔을 때는 원(元)이 쇠락하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던 시기였습니다.”
쉽게 말해 격란의 시대.
흑서는 자연스레 그 급류에 휘말렸다.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약탈이 성행했습니다. 홀몸인 데다 마공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없었던 소인은 몸을 지키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뒷배가 필요했지요.”
“어디에 들어갔는데?”
“명교(明敎)입니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본교에서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찌꺼기에?”
“소인을 죽여…… 아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명교는 중원에 들불처럼 번져 같은 교도들끼리도 신분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천마신교의 무공에서 변형되긴 했으나 어쨌든 마공을 사용했기에 흑서가 신분을 감춘 채 몸담기엔 제격이었고.
“그곳에서 주원장을 만났습니다.”
“명(明) 태조(太祖)?”
“맞습니다. 아직 그의 힘이 미약할 때였지요.”
주원장은 원을 전복시키기 위해 일어난 여러 반란군 중 하나인 명교에 투신해 활약하고 있었다.
“소인은 그의 밑에 배속됐습니다. 그는 능력과 운이 맞물려 높은 자리로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날로 쇠약해져 가는 원과 싸우는 한편,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다른 반란 세력을 제거하고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지요.”
“줄을 잘 탔네.”
“꼭 그렇진 않았습니다.”
주원장의 빠른 출세를 시기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를 보필하던 흑서는 자신도 살기 위해 본신 무공을 드러내고 악전고투해야 했다.
“왼뺨은 그때 다친 거야?”
“……중원에 들어와 처음 유리걸식(流離乞食)할 때 개방 놈들과 싸움이 붙어서…….”
“장로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별 것 아닌 놈들이었는데 정체를 숨기느라 마공 없이 싸우다가 타구봉에 얻어맞아서 그만…….”
“저런. 그러게 왜 남의 밥벌이를 탐내 가지고. 쯧쯧.”
“……어쨌든 결국 주원장은 제 마공이 명교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죽이고 튀지 그랬어.”
“그럴 마음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게 아까웠습니다. 제 신분을 털어놓은 뒤 반응을 보고 정하기로 했습니다.”
흑서가 천마신교 출신인 걸 알게 되자 주원장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좋아했다.
“절대로 자신을 배신할 수 없는 수하가 생기다니. 이런 복이 어딨는가 하더군요.”
“난놈이네.”
“교주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는 멀리 내다보고 자신을 완전히 감출 줄 아는 자였습니다. 명교에 끝없는 충성심을 보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뒤통수를 후려치고 황제가 됐겠지.”
“그렇습니다.”
“신기하네. 네 뒤통수는 왜 안 쳤을까?”
흑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황위에 오른 뒤 개국공신들을 숙청했습니다.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었을 리 없지요. 그와 그의 자식들을 노리는 자객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 손이 아쉬운 터라 네 목숨을 붙여놨구나.”
“허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정국이 안정되자 그의 눈초리가 달라졌지요. 소인은 살기 위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흑서의 눈이 번들거리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현 황제에게 붙은 거야?”
“그렇습니다. 영락제는 아비처럼 야망과 능력이 있으나 신의는 더 강한 편이었습니다. 마침 그의 비밀수신호위 노릇을 하고 있던 소인은 사정을 설명하고 연왕으로 봉해진 그가 하북성으로 갈 때 저를 취해달라 청했습니다.”
흑서로부터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던 영락제는 청을 받아들였다.
“사실 영락제는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주원장은 그의 불만을 달랠 겸 응했습니다. 저를 죽이나 멀리 보내나 마찬가지라 판단한 점도 있었을 겁니다.”
그 후 흑서는 여러 차례 활약해 영락제가 황위에 오르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법 재밌는 얘기야. 본론이 아직도 안 나와서 문제지만.”
“다 왔습니다!”
흑서의 말이 빨라졌다.
“주원장은 죽기 직전에 연왕이었던 영락제를 남경(南京)으로 불렀습니다. 영락제는 그곳에 갔다가 황태손인 주윤문과 황군에게 쫓겼지요.”
“수왕이 했던 얘기네.”
“그때 소인은 연경에 남아 영락제의 식솔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뭐길래?”
“영락제의 정비(正妃), 인효황후(仁孝皇后) 서씨는 개국공신 서달의 여식입니다. 서달은 친우였던 주원장처럼 명교도였으나 그녀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가만. 혹시?”
“그렇습니다. 소인이 우연히 확인한바, 그녀는 열렬한 명교도였습니다. 명교가 지워진 지 오래된 시절에도 말입니다.”
정광이 눈을 빛내자 흑서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주께서 찾아오시면 무엇을 올려드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명교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걸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때, 기억 속에 묻어뒀던 이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할 테니 부디 어여삐 여기시고 받아주십시오.”
정광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나중에 혹시 써먹을 수 있을지 몰라 감추고 있던 수를 내게 준 거네. 나쁘지 않아. 그 여자 거처는 어디야?”
“십여 년 전에 죽었습니다.”
“……정말 끝내주는걸. 마치 내상을 입은 것 같아. 내 예상을 아주 훌쩍 뛰어넘었어.”
정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매만지자 흑서가 필사적으로 덧붙였다.
“아, 아직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서씨의 자식들 중 어미를 따라 명교를 숭배하는 이가 있습니다! 누구냐면 바로…….”
* * *
다음 날 아침, 자오가 입궐하고 혜진은 숙취 없는 얼굴로 일어났다.
정광은 그들과 함께 황태손의 방으로 갔다.
“저하. 안녕히 주무셨죠?”
“하하. 진옥룡이 지켜줘서 그런지 푹 잤소. 이렇게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려.”
“잘됐네요. 오늘은 어디에 가실 예정이신가요?”
“먼저 황상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국정에 참여해야 하오만. 혹시 따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소이까?”
정광이 씩 웃었다.
“공주님들이나 군주님들도 뵙고 싶어서요.”
황태손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깨달은 듯 진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네?”
황태손은 결의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황상께 갔다가 바로 갑시다. 꽤 많은 곳에 들르게 될 것이오.”